• 신편 한국사
  • 근대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2. 주요 정치세력의 통일국가 수립운동
  • 3) 중도세력과 좌우합작운동
  • (4) 민주주의독립전선과 민족자주연맹
  • 나. 민족자주연맹

나. 민족자주연맹

 1947년 중반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중도파들은 독자적인 세력결집을 위해 정치적으로 새로운 모색을 시도하였다. 첫째로 중도파세력들의 결집력과 세력강화를 위하여 정당을 조직하기 위한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둘째로 정당 통합의 수준에 이르지 못한 경우 공동협의체를 조직하고자 하였다. 마지막으로 강령의 원칙적인 합의를 바탕으로 민족주의진영을 포괄하는 ‘연맹’ 형태의 조직을 구성하고자 하였다.

 첫 번째 시도는 民主獨立黨의 결성으로 나타났다. 민주독립당 결성을 위한 시도는 洪命熹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홍명희는 식민지시기부터 유명한 소설가이자 지식인으로서 8·15 직후부터 수많은 정당·사회단체로부터 참여 요구를 받았지만, 이에 참여하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그는 과도입법의원의 관선의원에 선임되었으나, 이를 사퇴하고 1946년 12월 신간회 서울지부 인사와 학계·언론계·실업계 인사 20여 명으로 民主統一黨을 결성하였다.410)도진순, 앞의 책, 178쪽.

 민주통일당 창당 이후 홍명희는 여운형·안재홍과 함께 중간정당의 통합을 논의하다가, 여운형이 암살되고 중도좌파 정당들이 독자적인 길을 모색하자 중도우파의 5개 정당을 통합하기 위한 움직임을 구체화하였다. 이에 민주통일당의 홍명희, 신진당의 김호·김원용, 민중동맹의 김병로, 신한국민당의 안재홍·박용희·건민회의 이극로 등 5정당 7인은 합당에 관한 공동성명서를 발표하였다.411)≪조선일보≫, 1947년 9월 9일. 1947년 9월 11일 홍명희를 위원장으로 하는 신당발기위원회가 조직되었고, 10월 19일∼20일 民主獨立黨이 결성되었다. 합당을 둘러싸고 각 정당 내부의 의견차이로 인하여 5개 정당의 모든 세력이 참여한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명망있는 중도적 인사들이 대부분 참여함으로써 민주독립당은 중도파를 이끌 수 있는 강력한 정당으로 부상하였다.

 한편 근로인민당·민주한독당·민중동맹·사회민주당·천도교청우당 등 중도좌파의 5개 정당은 민주독립당에 참여하지 않고 공동으로 정치활동을 전개하였다(소위 ‘5당캄파(campaign)’). 이들은 1947년 9월 5일 한국문제의 유엔이관 반대, 미·소공동위원회의 속개 등을 내용으로 하는 공동성명서를 발표하였다.412)≪새한민보≫, 1947년 9월 중순호(도진순, 앞의 책, 180쪽에서 재인용).

 이러한 중도우파와 중도좌파의 독자적인 움직임은 민족자주연맹의 결성으로 통합되었다. 1947년 10월 1일 김규식·원세훈·안재홍·崔東旿·김병로·김붕준·홍명희·이극로 등은 중도파의 조직을 만들기로 합의하고 민족자주연맹 준비위원 30명을 선출하였다.413)송남헌,≪해방3년사≫Ⅱ(까치사, 1984), 444쪽. 초기에는 민주한독당의 권태석을 제외한 중도좌파세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했지만, 5당 캄파의 반발로 근로인민당·민주한독당·민중동맹·사회민주당의 주요 인사들이 준비위원에 추가로 선정되었다(도진순, 앞의 책, 187쪽). 민족자주연맹의 조직은 11월 중순 이후 본격적으로 추진되어 12월 20일 전국 대의원 8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조직되었다.414)≪동아일보≫, 1947년 12월 23일.

 민족자주연맹에는 4개의 연합단체, 14개의 정당, 25개의 사회단체 및 개인으로 조직되었다. 4개 연합단체는 김규식계의 좌우합작위원회, 시국대책협의회와 제3전선 계열의 민주주의독립전선, 미·소공동위원회대책위원회였다. 정당으로서는 天道敎輔國黨(대표:신숙)·朝鮮共和黨(대표:김약수)·朝鮮農民黨(대표:원세훈)·민주독립당·天道敎靑友黨(대표:이응진) 등 중도우파 정당, 사회민주당·민중동맹·민주한독당·근로인민당·근로대중당 등 중도좌파 정당들이 참여하였다. 사회단체는 朝鮮建國靑年會·愛國婦女同盟 등이 참여하였다. 민족자주연맹에는 다양한 정당·사회단체가 참여하였지만, 주로 김규식의 좌우합작위원회 계열 인사들과 홍명희의 민주독립당 계열 인사들이 주도하였다.

 민족자주연맹은 감찰위원회·중앙집행위원회·정치위원회·상무위원회·상임위원회로 구성되었다. 중앙조직의 구성원을 보면 홍명희·이극로·안재홍·배성룡·이상백 등 지도부 내에 학자들이 많으며, 김규식·윤기섭·최동오·홍명희·안재홍 등 식민지시기부터 민족유일당운동·신간회 등 좌우합작의 성격을 가지는 정치운동 또는 단체에 참여한 인사들이 많았다. 이 외에 민족자주연맹에 참여한 중도좌파 정당들의 성원 중에는 좌익적 색채를 띠는 인사들도 있었다. 이렇게 다양한 성원들이 참여했기 때문에 확실한 정치노선을 가지지 못하였고, 선언문과 강령·정책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광의의 민족주의적 색채를 띠었다.415)도진순, 앞의 책, 191∼195쪽.

 민족자주연맹의 주된 활동은 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반대와 남북회담의 추진이었다. 유엔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남북회담을 통해 분단정부의 수립을 막는다는 것이었다. 민족자주연맹의 김규식은 한독당의 김구와 함께 소위 ‘2월 서신’을 통해 38선 이북의 정치세력들에게 남북정치회담을 개최할 것을 제의하였다.416)≪조선일보≫, 1948년 4월 1일.
≪경향신문≫, 1948년 4월 1일.
김규식과 김구가 제안한 남북정치회담은 북한의 김일성과 김두봉이 함께 하는 4김회담이었으며, 유엔의 활동을 통해 남북한에 공히 총선거를 실시하고자 하는 것이었다.417)도진순, 앞의 책, 209∼210쪽.

 민족자주연맹은 김규식의 소극적 태도로 南北連席會議의 참여문제에 대한 결정이 지체되기도 하였지만,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하는 5개항의 조건을 결정하였다. 이 조건들은 다음과 같다.

1. 어떠한 형태의 독재정치도 배격하고 민주주의국가를 건립할 것

2. 독점자본주의 경제제도를 배격하고 사유재산제도를 승인할 것.

3. 전국적 총선거에 의해 통일된 중앙정부를 수립할 것.

4. 외국에 어떠한 군사기지를 제공하지 말 것.

5. 미·소 양군의 조속한 철퇴에 관해서 미·소 양국이 협상하여 공포할 것.

 (≪새한민보≫, 1948년 5월 중순호;도진순,≪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이승만·김구시대의 정치사≫, 서울대 출판부, 1997, 246쪽에서 재인용).

 민족자주연맹의 5개 원칙은 민족자주와 민주주의적 체제를 지향하는 중도파 인사들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1948년 4월 15일 김규식·원세훈·최동오·배성룡·여운홍·박건웅 등 19인의 대표를 선출한 민족자주연맹은 북한측이 5개 원칙을 수락하자 4월 19일부터 21일에 걸쳐 북행하였다. 4김회담과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한 민족자주연맹의 대표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한쪽은 김규식을 중심으로 38선 이남으로 되돌아오며, 다른 한쪽은 홍명희를 중심으로 38선 이북에 잔류하였다.

 38선 이남으로 돌아온 민족자주연맹은 5월 19일 정당협의회, 한독당 등 민족주의 정당·단체들과 총선 불참과 통일독립노선의 추진을 재천명하였다.418)≪동아일보≫, 1948년 5월 20일.
≪경향신문≫, 1948년 5월 20일.
또한 민족자주연맹은 한독당과 함께 통일운동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새로운 기관 설치를 모색하였다. 민족자주연맹과 한독당은 좌익 민전 이외의 정당·사회단체를 규합하여 기존의 統一獨立運動者協議會를 확대, 강화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통일기구를 창설하고자 하였다. 獨立勞農黨 柳林의 반발로 조직의 확대가 어렵게 되자 민족자주연맹은 새로운 기구인 ‘統一獨立促進會’를 조직하였다.

 민족자주연맹은 1948년 6월 29일 제2차 남북연석회의가 개최되면서 분열되기 시작하였다. 통일독립촉진회를 통해 표명한 공식적 입장은 제2차 남북연석회의에 불참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근로인민당·신진당·사회민주당·민주독립당·근로대중당·근로대중당 등의 일부 성원들이 제2차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한 것이었다. 김규식은 민족자주연맹상무위원회를 소집하여 북한의 제2차 남북연석회의와 북한에서의 선거에 참여한 12인에 대하여 정권 처분하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민족자주연맹은 뚜렷한 활동을 전개하지 못하였다. 내부의 분열로 세력이 약화된 데다가 남북연석회의 이후 공동보조를 취하고 있었던 김구의 암살, 대한민국정부의 중도파세력에 대한 공세의 강화, 그리고 한국전쟁 시 김규식의 납북 등은 결국 민족자주연맹의 통일운동을 위한 노력이 물거품으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민족자주연맹의 일부 세력들이 북한의 정권에 참여하였지만, 더 이상 민족자주연맹의 깃발 아래에서 활동하지 않았다.

<朴泰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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