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2. 미군정기의 경제
  • 2) 농지개혁과 식량공출
  • (1) 농지개혁
  • 가. 농지문제와 농지개혁 요구

가. 농지문제와 농지개혁 요구

 해방 당시 남한 인구의 7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므로 농지문제의 합리적 해결은 시급한 당면 과제였다. 그리고<표 1>과<표 2>에서 보듯이 남한 총경지의 63%는 소작지였으며, 총농가 가운데 자작농은 14%에도 미치지 못하고 순소작농이 절반 가까운 상황이었다. 즉 일부의 자작농을 제외한 대부분의 농민들이 지주와 직접적으로 대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일제말의 소작료율은 5∼6할의 고율이었다.501)조선총독부 농림국,≪朝鮮の農業≫(1942), 215쪽. 따라서 이러한 반봉건적 토지소유관계의 개혁은 농민생활의 향상을 위해 절실하게 제기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토지 종류 합 계
총경지 128(100%) 104(100%) 232(100%)
총소작지
 일본인 지주 소유지
 조선인 지주 소유지
89(70%)
18(14.5%)
71(55.5%)
58(56%)
5(5%)
53(51%)
147(63.4%)
23(9.9%)
124(53.5%)
자작지 39(30%) 46(44%) 85(36.6%)

<표 1>남한의 토지소유 상황(1945년 말) (단위:만 정보)

조선은행 조사부,≪조선경제연보≫(1948),Ⅰ부-29쪽.

 이리하여 해방이 되자 곧 일본인 지주의 농지를 소작농들이 접수·분배한다거나 소작료 납부를 거부하는 운동이 각지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어 갔다. 특히 인민위원회와 농민조합의 힘이 강력했던 지역에서는 이런 경향이 두드러졌다. 그리고 전국적 정치운동단체들이 조직됨에 따라 농지문제에 대한 접근은 보다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1945년 9월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이른바 朴憲永의 ‘8월테제’를 통과시켰는데 여기에서는 당시의 조선을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의 단계로 파악하고 그 중심 과업으로 토지문제의 혁명적 해결을 제기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제국주의자와 민족적 반역자와 대지주의 토지를 보상을 주지 않고 몰수하여 이것을 토지 없는 또는 적게 가진 농민에게 분배할 것이요, 토지혁명의 전개과정에 있어서 조선인 중 소지주의 토지에 대하여는 자기 경작토지 이외의 것은 몰수하여 이것을 農作者의 노력과 가족의 인구수 비례에 의하여 분배할 것이요, 조선의 전토지는 국유화한다는 것이요, 국유화가 실현되기 전에는 농민위원회·인민위원회가 이것(몰수한 토지)을 관리한다”502)김남식·심지연 편저,≪박헌영노선 비판≫(세계, 1986), 182∼183쪽.고 하였던 것이다.

남한 농가 호수(비율)
총호수 2,065(100%)
자작농 287(13.9%)
자작겸소작농
 자작50% 이상
 소작50% 이상
717(34.7%)
340(16.5%)
377(18.2%)
소작농 1,005(48.7%)
토지불경작 농가 56(2.7%)

<표 2>농민의 토지보유 상황(남한 1945년 말) (단위:천 호)

조선은행 조사부,≪조선경제연감≫(1949), 5쪽.

 다만 당면 과제로서는 “소작료를 3할 대 7할제로 인하하고 이것을 화폐지대로 정할 것이요 소작관계에 있어서 봉건적 잔재를 일소하자”503)김남식·심지연 편저, 위의 책, 188쪽.는 방침을 제기하였다. 1945년 12월 8일에 결성된 전국농민조합총연맹의 강령도 처음에는 조선인 지주 소유토지에 대해서는 조선공산당의 당면 과제와 같은 수준의 요구를 제기하였다.

 그러나 북한에서 명목적으로는 ‘무상몰수·무상분배’라는 혁명적인 방식의 농지개혁이 실시됨에 따라 그러한 영향 속에서 민주주의민족전선·남로당·전국농민조합총연맹은 일제·친일파·민족반역자뿐만 아니라 5정보 이상 소유하면서 자경하지 않는 지주들의 모든 소작지를 무상몰수하여 雇農 또는 토지가 없거나 토지가 적은 농민들에게 무상분배할 것을 주장하게 되었다.504)김성호 외,≪농지개혁사연구≫(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89), 331∼345쪽.
김남식 편,≪남로당연구자료집≫1(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1974), 349∼362쪽.

 반면 이러한 좌파의 요구에 대해 우파를 대표하는 한민당측에선 창당 초기엔 ‘농지제도의 합리적 재편성’이라는 다소 모호한 입장을 취했다.505)최봉대,≪미군정의 농민정책에 관한 연구≫(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4), 162∼163쪽. 그후 1945년 11월에는 “토지는 대소유를 금하여 자작농 정도에 한하고 대지주는 그 토지를 국가에 매각하여 기업가로서 진출할 기회를 주고 국유지는 소작인·고용농부들에게 경작권을 부여하여 소작료를 1/3 정도로 납입하여 생활의 안정을 기치 않으면 안된다”506)심지연,≪한국민주당 연구≫Ⅰ(풀빛, 1982), 194쪽.고 하였다.

 이러한 ‘유상매입 국유소작농’ 원칙은 1946년에 들어서부터는 ‘유상매입·유상분배론’으로 정리되고 이는 미·소공동위원회에도 제출되는 기본방침으로 정립되는 것이다. 한민당의 이러한 방침은 지주층을 대변하는 한민당으로서도 시대의 대세인 농지개혁을 전면적으로 거부할 수는 없었음을 드러낸다.

 한편 1946년 좌우합작위원회를 통해 표명된 중간파의 입장은 우익측의 유상매수안과 좌익측의 무상몰수안을 절충한 ‘유상매수·무상분배’였다. 적산토지는 물론 몰수하지만 조선인 토지는 소지주에 대해선 자경면적 이외는 시가 전액으로 매상하고, 중·대지주에 대해선 자경면적 이외는 체감매상하는 등의 방안이 제시되었다. 다만 이 안은 재정부담 문제로 인해 좌우익 양측으로부터 모두 공격받으면서 그다지 힘을 얻지는 못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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