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2. 미군정기의 경제
  • 2) 농지개혁과 식량공출
  • (1) 농지개혁
  • 나. 미군정의 농지개혁

나. 미군정의 농지개혁

가) 소작료 3·1제의 실시와 신한공사 관리

 미군정은 진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45년 10월 5일 ‘소작인의 반노예화’를 해소한다는 명목으로 최고소작료율을 1/3로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다. 또한 현존 소작권의 유효기간 중에 지주가 일방적으로 소작권을 해제할 수 없다는 규정도 마련하는 등 소작인의 지위를 보호하는 일련의 조치를 취하였다.

 이러한 미군정의 조치는 당시 농촌의 혁명적 분위기를 완화시키기 위해 취해진 것이고 지역에 따라 제대로 실시되지 않기도 했지만, 어쨌든 지주들의 일정한 양보를 강제함으로써 장차 단행될 농지개혁의 전주곡 역할을 한 셈이었다. 즉 일단 지주제를 인정한 틀 내에서나마 농민들의 급진화를 막기 위해선 지주세력의 약화를 용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미군정은 1945년 10월 6일 일제하의 동양척식회사를 신한공사(The New Korea Company)로 개명하여 미군정 관할하에 두고, 이후 일본인 소유농지 모두의 관리권을 신한공사에 넘겼다. 이리하여<표 3>에서 보듯이 신한공사는 남한 전체 경지면적의 12.3%(논의 경우는 16.7%, 밭의 경우는 6.5%)를 소유하고 그 소작농은 전체 농가호수의 27.1%에 이르게 되었다. 곡창지대인 전라도의 비중이 크다는 점이 눈에 띄는 부분이다.

 미군정이 이처럼 신한공사를 창설하고 일본인 소유농지를 직접 관할한 것은 해방 후 밑으로부터 전개된 일본인 농지 접수와 일본인 지주에 대한 소작료 불납운동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미군정은 좌익운동을 억압했음은 물론이고 남한농민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경지
도별
전 + 답
신한공사 전체 신한공사 전체 신한공사 전체
경기·황해 23,634 230,442 9,658 162,575 33,292 393,017
강원 819 42,048 1,055 100,161 1,874 142,209
충북 4,927 65,320 3,971 77,983 8,898 143,303
충남 24,035 152,568 7,053 76,116 31,088 228,684
경북 13,499 196,973 6,503 164,714 20,002 361,687
경남 26,084 172,301 7,327 88,433 33,411 260,734
전북 57,905 167,929 8,496 73,169 66,401 241,098
전남 55,068 205,890 17,663 125,115 72,731 331,005
제주 17 789 905 89,020 922 89,809
합계 205,988 1,234,260 62,631 957,286 268,619 2,191,546

<표 3>신한공사 소유경지의 규모와 비중(1948년 2월 10일 현재) (단위:정보)

C. Mitchell, Final Report and History of the New Korea Company, USAMGIK National Land Administration, 1948, pp.4·8.

 즉 3,000명 가까운 정식직원뿐만 아니라 그보다 많은 촌락유지로 구성된 農監이 신한공사를 위해 각 지역에서 활동하였던 것이다. 또 신한공사 소속 농가의 비중은 경지의 두 배 이상이고, 이들이 경작하는 면적은 신한공사 소유지 이외의 다른 지주소유지나 자작지도 포함하여 남한 전체의 27.7%였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장악은 전체 농촌·농민 장악의 핵심고리였던 셈이다. 이러한 사실은 후술하는 식량공출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나) 귀속농지 매각

 미군정은 귀속농지의 처리문제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관심을 갖고 있었다.507)최봉대, 앞의 책, 130∼132쪽. 다만 이를 전반적인 토지개혁과 관련시킨 체계적인 실행계획을 수립하고 있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1946년 1월에 미국무부의 번스사절단도 구일본인 토지의 분배를 권고하였으며, 1946년 3월 5일 북한에서<토지개혁법>이 공포되자 이에 대응하여 미군정 장관은 동 3월 15일<구일본인토지의 불하 방안>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이는 다분히 즉흥적이었고 미군정은 동 6월에 이 매각안을 보류하고 미·소공동위원회의 추이를 보고 결정하기로 보류하였다. 미군정은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좌우익의 대립을 돌파하고 좌익을 분열시키기 위하여 온건좌우파를 중심으로 좌우합작 정책을 추진하였으나 이 역시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 대신 1946년 12월에 과도입법의원을 구성시켜 여기서 농지개혁 문제를 처리하려 한 것이다.

 그런데 입법의원에는 지주 출신을 비롯한 우익진영이 많았기 때문에<토지개혁법안>의 작성에 대단히 소극적이었다. 토지개혁이 대세이긴 했으나 될 수 있는 대로 지연시켜 보려고 한 것이다. 이에 미군정은 번스 등이 포함된 한·미농지개혁연락위원회가 성안한 법안을 1947년 12월에 본회의에 상정시키기에 이르렀다. 이 법안의 골자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봉건적 토지소유의 타파와 민주경제적 토지제도의 수립이 목적이다.

둘째, 토지개혁 사무를 관장하기 위해 중앙토지개혁행정처를 설치하고 지방에는 지방행정처와 함께 토지개혁위원회를 조직하되 이 위원회는 반수 이상을 소작농 내지 소자작농으로 구성한다.

셋째, 매수대상 농지는 자경하지 않는 농지, 3정보 초과농지, 학교·교회·병원 등의 자경 초과농지로 하되 귀농 희망자에게는 3정보 이내의 농지 소유를 허용한다.

넷째, 매수지가는 연평균 소출의 3배로 하고 면적증가에 따른 법정체감률을 적용한다. 그리고 지주는 연평균 소출의 2할씩을 15년 동안 지급받는다.

다섯째, 농지분배 순위는 ①농지를 경작하는 현재의 소작농, ②농지가 적은 자작농 또는 소작농, ③고용농가(머슴), ④귀환동포(농가)의 순으로 하였다.

여섯째, 농지를 분배받은 농가는 연평균 소출의 2할씩을 15년 동안 현물로 분납한다(김성호 외,≪농지개혁사연구≫, 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89, 351∼353쪽).

 이 법안은 입법의원들의 사보타지로 제대로 심의되지 못하고 폐기되고 말았지만 한국정부 수립 이후 농지개혁의 원형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다만 정부수립 이후의 농지개혁에서는 매수·매각 가격이 연평균 소출의 1.5배로 낮추어지고, 상환기간이 5년으로 줄어들고, 토지개혁위원회가 농지위원회로 바뀌면서 농지개혁의 주체라기보다는 보조적인 조직으로 위상이 저하되는 등의 차이는 존재하였다.

 한편 미군정은 이렇게<농지개혁법안>이 폐기되자 다가올 5·10총선에서 농민들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 1948년 3월 22일<귀속농지매각령>을 발표하고 신한공사가 보유하고 있던 구일본인 소유토지만을 분배하기에 이르렀다. 신한공사 보유토지 중 임야 등은 제외되었으며 매각조건은 소유한도를 2정보로 설정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입법의원에 상정했던 법안의 내용과 대체로 일치하였다. 다만 정부수립 이후 1951년의<귀속농지특별조치법>에 의해 귀속농지의 매각가격도 한국정부의<농지개혁법>에서와 마찬가지로 연평균 소출의 1.5배로 조정되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