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2. 미군정기의 경제
  • 2) 농지개혁과 식량공출
  • (2) 식량공출
  • 나. 식량공출제의 시행

나. 식량공출제의 시행

가) 실시과정

 일제 말기의 식량관리제도를 다시 계승한 미군정기의 식량공출제는 그 첫 시행년도인 1946년 미곡년도(1945년 11월∼1946년 10월 말)에는 그다지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즉 군정당국은 총 예상생산량을 1,285만 석으로 잡고 이 중 551만 석을 공출한다는 목표를 세웠으나 실제로는 68만 석 정도밖에 수집하지 못했다. 이는 전체 생산량의 5.3%, 목표량의 12%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미곡공출 실적이 저조했던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한국의 식량수급 사정에 어두웠던 군정당국이 뒤늦게 식량공출에 착수했던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일제의 공출기구 활용에 따른 농민들의 거부감, 시장가격에 훨씬 못미치는 공정가격에 의한 매입과 보상물자의 결핍, 미곡 운송수단의 부족, 지주와 모리배에 의한 미곡의 암거래도 공출 실패의 주요 요인들이었다.

 아울러 미곡공출을 체계적으로 통괄할 중앙행정기구의 부재도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군정의 판단에 따르면 지방 말단에서 해방 직후 활발하게 성장한 여러 민중적 조직들로 인해 미군정의 권력 행사가 일정한 제약을 받았고, 이것 역시 식량공출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한편 이러한 1945년산 미곡수집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미군정은 식량관리기구를 정비하여 1946년 5월 중앙식량행정처를 신설하고,<경제통제령>을 제정하여 경제 전반에 걸쳐 종합적인 통제체제를 구축하였다. 그리하여 미군정은 미곡수집의 부진으로 인한 식량수급 악화를 타개하기 위해 1946년산 하곡을 수집하였다.

 원래 하곡공출은 일제하에서도 실시되지 않았던 것으로 하곡은 소작인의 몫이 되는 것이 관례였다. 따라서 하곡공출은 농민의 강력한 저항에 봉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1946년의 하곡 예상수확량 496만 석의 약 25%인 129만 석을 수집 목표로 설정하였으나, 실제 수집량은 62만 석 미만으로 목표의 절반 정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1946년 미곡수집부터는 사정이 크게 달라졌다. 당국은 1946년 8∼9월에<중앙식량규칙>제2호와 제3호를 제정하여 공출농가를 자작농과 소작농으로 분리하고 소작농의 소작료를 전량 공출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이리하여 지주도 비농가와 동일하게 배급을 받아 생활하도록 하였다. 즉 지주도 소작료를 직접 소작농으로부터 현물로 수취하는 것이 아니라 공출대금을 공정미가를 기준으로 지불받았던 것이다.

 이 결과 1946년 미곡에 대해선 예상수확고 약 1,200만 석의 1/3인 429.5만 석을 목표량으로 설정하고 수집에 착수하여 목표량의 82.9%인 356.2만 석이 수집되었다. 또 1947년 하곡의 경우엔 목표량의 97.9%를 수집하였고, 1947년 미곡수집에서는 목표량의 97.1%가 달성되었다.

나) 식량공출과 농촌지배구조의 변화

 식량공출은 기본적으로는 식량수급구조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긴급조치였다. 하지만 식량공출제도의 확립과정은 그와 동시에 농촌에 대한 미군정의 지배력을 정착시키는 과정이었고, 아울러 종래의 지주-소작관계를 변모시키는 힘으로도 작용하였다. 즉 농촌의 지배구조는 농지개혁뿐만 아니라 식량공출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미군정은 식량공출 과정에서 농민들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였던 바, 1946년 추수봉기도 그 한 표현이었다. 농민층은 낮은 공출대금에 불만을 갖고 있었고, 또 해방 후 성장한 전국농민조합총연맹과 같이 미군정에 저항하던 세력도 여기에 가세하였다. 그리하여 군정당국은 경찰력은 물론이고 군대까지 동원하여 공출을 강행하였던 것이다. 1946년산 미곡에서부터 공출실적이 크게 향상되고 특히 1947년산 하곡부터는 목표치를 거의 완전히 달성함으로써 미군정의 농촌 장악은 성공을 거두어 가는 것이다.

 사실 해방 직후 일제시대의 식량관리제도를 폐지하고 새로운 민주적 식량관리제도를 수립하려는 노력이 전국농민조합총연맹 등과 같은 밑으로부터의 움직임에서 나타난 바 있었다. 그런데 이것을 미군정이 대체하고 식량공출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간 것은 결과적으로 농촌을 장악하는 세력의 교체를 의미하였다. 즉 일제와 마찬가지로 농민은 식량관리기구에서 배제되고 농민단체는 급속히 와해되어 갔던 것이고, 여기서 식량공출의 반농민적 성격이 드러내는 셈이다.

 한편 군정당국의 식량공출은 억압적인 물리력의 동원을 통해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신한공사라는 남한 최대의 국가지주를 활용함으로써 식량공출정책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우선<표 5>에서 보듯이 신한공사 소작농들에 의한 공출실적은 대체로 일반 농민의 공출실적보다 우수하였던 것이다.

   공출량
공출시기
신한공사 공출량 일반 농가 공출량
1946년 하곡 81.3% 43.8%
1946년 미곡 87.5% 82.9%
1947년 하곡 101.0% 98.2%
1947년 미곡 101.0% 93.6%

<표 5>신한공사와 일반 농가 공출실적 비교

최봉대,≪미군정의 농민정책에 관한 연구≫(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4), 125쪽.

 뿐만 아니라 신한공사 소작농가의 공출실적이 우수했던 점을 살려서 1947년 하곡공출 때부터는 신한공사 소작농이 경작하는 공사 소작지와 일반 지주 소작지 모두에 대해 신한공사 소작농을 공출책임자로 지정하였다. 그리하여 신한공사 소작농은 공출기간 동안 다른 농민들을 이끌어 왔다.509)최봉대,≪미군정의 농민정책에 관한 연구≫(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4), 128쪽. 신한공사가 식량공출의 전략적 거점으로 활용되었던 셈이다.

 이렇게 신한공사의 공출실적이 양호했던 것은 신한공사가 소작농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농장사무소를 설치·운영하였던 점 외에도 다음과 같은 요인들이 작용하였다. 즉 신한공사와 소작농의 소작계약은 1년 단위로 체결되었기 때문에 공출실적이 부진하면 소작권이 박탈될 위험이 있었다. 또한 1947년 하곡공출 때부터는 신한공사 소작료분에 대해서는 현금 납부를 허용하였으며, 식량공출에 협조하는 소작농에게는 군정당국이 토지개혁시 소작지 매입의 최우선권을 부여하겠다고 약속했던 것이다.

 그런데 식량공출 과정에서 농민들이 배제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일제하에서와 같은 지주세력의 복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식량공출을 비롯한 농촌행정에서 정치적 지배구조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청년단체·경찰·지방행정관리였던 것이다. 즉 농민층은 지주세력이 아니라 미군정의 직접적 통치조직하에 놓여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미군정의 식량공출정책은 지주가 소작료를 현물로 직접 수취하는 것을 배제하였고, 공출대금을 3·1제 소작료를 기준으로 한 공정미가로 지불했기 때문에 지주계급의 물질적 기반을 침식하고 지주제를 해체하는 압력으로 작용하였다. 이미 일제 말기의 공출제를 통해 타격을 입었던 지주계급은 일제하에서보다 더 불리한 공출정책으로 인해 심대한 타격을 받았던 것이다.

 물론 지주계급은 과도입법의원의 법령개정 등을 통해 식량공출정책을 무력화한다든가, 식량을 빼돌린다든가 하는 노력을 하기도 했지만 그다지 효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즉 군정당국은 공출을 회피하는 지주들을 체포하기까지 하면서 식량공출을 강력히 추진했던 것이다. 여기다 토지개혁에 대한 불안감도 작용하였으므로 지주들은 아예 토지를 방매하는 일도 있었고, 결국 이런 제 요인들로 인해 지주세력의 힘이 약화되고 농지개혁이 이루어질 수 있게 된 셈이었다.

 요컨대 농지개혁이든 식량공출이든 농민들의 밑으로부터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친지주적인 정책도 아니었던 것이다.510)이것이 바로 한편으로 지주세력과 연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지주세력과 대립하였던 미군정의 양면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김기원,<미군정의 경제정책에 관한 연구>(≪한국방송통신대학 논문집≫5, 1986), 347쪽.
즉 정치권력인 미군정의 휘하로 통치조직과 물적기반을 끌어들이면서 종래의 지주제를 해체시키고 농촌으로부터 끌어낸 잉여를 공업화 쪽으로 돌리게 되는 것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