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2. 미군정기의 경제
  • 4) 노동자의 존재 양태와 노동운동
  • (1) 노동자의 존재 양태와 미군정의 노동정책
  • 다. 노동자자주관리운동

다. 노동자자주관리운동

 이상과 같은 영악한 경제적 조건과 미군정의 노조억압정책하에서 노동자들은 생존권을 확보하고 나아가 독립국가 건설의 주도권을 쟁취하기 위해 격렬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최대 규모의 노동운동은 1946년 9월과 1947년 3월의 총파업이었지만<표 14>와 같이 그밖에도 노동쟁의는 자주 발생하였다.

연  도 1945년 12월 1946년¹ 1947년 1948년
건  수 1 170 134 37
참가인원 308 57,434 35,210 21,389



임금인상
공장폐쇄 반대
해고반대
노동시간 단축
감독자의 배척
조합승인
휴일임금 지불
기타
1
-
-
-
-
-
-
-
107
1
28
1
16
4
4
9
16
-
35
1
4
1
2
75
5
-
14
-
2
-
-
16
파업인원
(건수)
308
(1)
36,400
(80)
24,422
(77)
54
(3)

<표 14>미군정기 노동쟁의 실태

조선은행 조사부,≪조선경제연감≫(1949), Ⅳ부-185쪽.
 1. 1946년 11·12월의 노동쟁의 건수는 미상이므로 통계에 포함되어 있지 않음.

 귀속재산의 처리에서 미군정의 접수·운영과 정면으로 대립되는 반대 축을 형성한 것이 노동자자주관리운동이었으며 이는 해방 이후 자본-노동관계에 커다란 격동을 초래하였다.

 한국인 노동자들이 일본인 사업체를 접수하려는 움직임은 8·15 직후 곧바로 시작되었다. 일본이 조선에서 소유하고 있는 재산은 따지고 보면 일본인의 재산이라기보다는 조선인들을 착취한 소산이라는 관념이 널리 퍼져 있었고, 따라서 일본인 사업체의 조선인 종업원들은 8·15 이후 즉각적으로 일본인 소유주를 축출하고 스스로 그 사업체를 장악하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사업체 접수는 일제축출이라는 성격 외에도 다른 한편에서는 사업체 재산을 보호할 필요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움직임이기도 하였다. 패전에 따라 일본인들이 자신의 사업체 재산을 처분하여 일본으로 귀환하려고 하였는데, 이로 인해 사업체가 해체되는 것을 막기 위한 자구책으로서 노동자들의 일본인 사업체 접수가 일어났던 것이다. 다만 노동자들의 의식과 조직이 미약했던 곳에서는 이러한 적극적인 자주관리로 나아가지 못하고 해산수당을 요구하거나 공장의 기계와 원료를 팔아서 생계비를 확보하려는 소극적인 움직임도 나타났다.

 노동자자주관리운동은 주로 공장에서 전개되었지만 상업회사·운수회사·극장에까지 파급되었으며 농민들의 일본인농지 접수도 같은 맥락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자주관리운동은 8·15 직후의 발흥기→미군진주 이후 법령 33호 공포시점(1945년 12월)까지 미군정과의 공존대립기→법령 33호 공포 이후 1946년 상반기까지의 몰락 및 저항기라는 변화 추이를 보였다.

 그리고 자주관리운동이 전개된 기업은 물론 일본인 기업이 대부분이었지만 친일대자본가의 사업체에서도 치열한 자주관리운동이 전개되었다. 식민지 통치하에서 일본인에게 협력하여 재산을 축적한 친일파 자본가들은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한국민중의 공격대상이었던 것이니, 이는 해방 후의 민족적 지상과제였던 친일파 청산운동의 일환이기도 하였다.

 한편 노동자자주관리운동은 사업장별로 유형의 차이를 나타내고 있었다. 첫째로, 사업체를 접수·관리한 주체면에서 대부분의 사업체에서는 그 사업체의 노동자가 단독으로 접수·관리를 담당하였으나 일부 사업체에선 그 지역의 인민위원회가 접수·관리하거나 사업체관리를 지시·감독하기도 하였으며 노동자와 자본가가 공동으로 운영하기도 하였다.

 둘째로, 자주관리의 추진 주체 면에서 상급직원이 중심이 된 ‘위로부터의 자주관리운동’과 생산직노무자 또는 노동조합이 중심이 된 ‘밑으로부터의 자주관리운동’이 있었다. 위로부터의 자주관리운동은 관리위원과 일반노무자 사이의 관계가 맹아적인 자본가-노동자관계였던 것으로, 이는 엄밀한 의미의 노동자자주관리에 포함시키기는 힘들고 해방 후라는 변화된 상황에서 이전의 자본-노동관계를 재구성하려는 체제 내적 자주관리였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밑으로부터의 자주관리는 단지 기업시설을 보호한다는 차원의 자연발생적 운동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나 인민위원회 등 좌익세력과의 연계하에서 목적의식을 갖고 있던 운동으로 나누어졌다. 전자의 발전방향은 기업 내외의 상황에 따라 달라졌고 후자의 경우는 바로 자본-노동관계를 위협하는 혁명적 자주관리운동이었다. 이런 자주관리 유형 중 일부 거대기업체에서는 혁명적 자주관리운동이 나타났고, 따라서 자주관리운동의 귀추는 경제체제 재편의 향방을 규정하는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 진주한 미군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주관리운동의 위험성을 감지하고 전술했듯이 관리인제도를 채택하면서 혁명적 자주관리운동은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체제 내적 자주관리운동은 미군정의 통제하로 포섭하려고 하였다. 물리력이 취약한 노동자들은 이런 미군정의 조치를 끝까지 물리칠 수는 없었지만 일단은 미군정의 기업체 접수를 거부한다든가 또는 일단 받아들인 미군정의 관리인에 대해 축출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혁명적 성격이 강했던 자주관리일수록, 그리고 부임한 관리인이 친일파일수록 그런 분규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1946년 중반에 이르면 미군정의 물리력과 자주관리운동 자체의 한계로 인해 이러한 운동방식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자주관리운동의 에너지가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고 1946년 총파업을 비롯한 전국적 규모의 정치투쟁으로 전개되었다. 게다가 그런 투쟁들이 모두 진압된 후에도 자주관리운동의 분위기는 여전히 남아 있어서 헌법제정이나<귀속재산처리법>제정과정에서 노동자의 경영참여 요구가 강력하게 제기되었다. 이런 흐름은 사회운동에 대한 미군정과 한국정부의 탄압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반공이데올로기가 장착·강화되고 노동자의 발언권이 사라지면서 비로소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기업체내에 자본-노동관계가 확고하게 재정립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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