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직후의 문학예술운동은 크게 두 갈래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하나는 1945년 8월 17일 결성된 조선문학건설본부를 위시하여 각 부분의 단체들이 참여하여 만든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8월 18일 결성)이다. 이 조직에는 조선문학건설본부 이외에 조선미술건설본부·조선음악건설본부·조선연극건설본부·조선영화건설본부 등이 망라되었다.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의 의장과 서기장을 임화와 김남천이 각각 맡았다. 각 부문에서도 중앙위원장과 서기장을 선임하였는데 문학 분야에는 위원장으로 이태준, 서기장으로 이원조가, 미술 분야에서는 위원장으로 고의동, 서기장으로 정현웅이, 음악 분야에서는 위원장으로 박경호, 서기장으로 채동선이, 연극분야에서는 위원장으로 송영, 서기장으로 안영일이, 영화 분야에서는 위원장으로 이재명이 각각 뽑혔다. 이 단체에 참여한 문학인들의 면면에서 잘 드러나는 것처럼 일제하 문학인들이 전체적으로 참여하여 과거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보다는 1930년대 후반의≪인문평론≫과≪문장≫에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것이었다. 일제 말의 친일 문학단체를 대체한다는 의욕이 컸기 때문에 앞으로 지향해야 할 문학의 이념이라든가 건설할 문학의 성격 등에 대해서 명확한 방침을 내놓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말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후 과거 카프에 가담하였던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 새로운 대항적 문학단체가 발족하게 된다.
조선문학건설본부와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의 방식에 대해 불만이었던 문학가들이 주축이 되어 1945년 9월 17일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이 결성되었고 이후 다른 분야에도 이러한 조직이 만들어져 9월 30일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연맹이 결성되었다. 의장에는 한설야가 서기장에는 윤기정이 선임되었다. 물론 한설야는 당시 함흥에 있었기 때문에 이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고 다른 문화인들에 의해 추천되었을 뿐이다. 이들은 일제하에서 가장 저항적이었던 카프가 해산된 후 한번도 그 진로에 대한 토론이 없었던 상태에서 일부 문학가들이 전체 문학가들의 총의에 관계 없이 일방적으로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를 만든 것이 파당적이라고 간주하였기에 그 대안적 성격으로 이러한 단체를 결성하였다.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는 초기에 자신의 노선을 명시적으로 주장하지 않다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연맹이 건설되자 대타의식의 차원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기 시작하였고 이 과정에서 인민문학 혹은 인민예술에 대한 초보적 인식이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의 인민문학 및 인민예술과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연맹의 프로문학 및 프로예술이 대립되어 전개되는 양상을 띠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이것이 당시 남한내의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존재하였던 혁명단계론의 차이에 대응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박헌영을 중심으로 재건파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이야기하였고, 장안파는 프롤레타리아 혁명단계론을 주장하였는 데 반해 당시 문화계 내부에선 그 조직의 상이에도 불구하고 모두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론을 공통된 기반으로 삼고 있었다. 문제는 혁명단계론의 차이가 아니라 건설할 문학의 이념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이었다.
문화전선의 통일이란 과제가 정치권에서 제기되자 이 두 단체는 통합을 촉진하였는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정치정세에 대한 파악이 필요하다. 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좌파세력은 인민공화국을 주장하면서 통일독립국가의 구상을 하였으나 이는 해외에서 이승만과 김구 등이 들어오면서 난관에 봉착한다. 이들은 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고 새로운 통합체를 요구하였는데 인민공화국을 주장하던 좌파로서는 이를 거부하면서 종전의 인공 노선을 관철하려고 노력하였다. 정치적 상황이 이러한 판국이었기 때문에 좌파 내부에서의 단결이 절실하게 요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문학예술계의 경우 조선중앙건설협의회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연맹으로 나누어져 있어 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였다. 이들이 분열되어 성립할 때만 해도 임정인사를 비롯한 해외 독립운동세력이 아직 들어오지 않은 때이고 인민공화국의 성립에 대한 낙관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11월 3일 김구를 위시한 중경 임시정부의 요인들이 일차적으로 들어오면서 상황은 현저하게 바뀌기 시작하였다. 힘의 열세를 느낀 좌파 정치권 쪽에서는 통합을 요구하였고 문학계도 이것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던 것이다.
둘의 통합이 구체적으로 이야기되기 시작한 것은 1945년 12월 3일부터이다. 12월 6일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가 들어섰던 한청빌딩 건물 사무실에서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산하의 조선문학건설본부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연맹 산하의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의 합동위원 11명이 출석하여 양 단체를 해소하고 ‘조선문학동맹’을 결성하기로 합의하고 성명을 발표하였다. 당시 여기에 참석한 사람으로는 조선문학건설본부측에서는 이태준·이원조·임화·김기림·김남천·안회남이었고,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측에서는 윤기정·권환·한효·박세영·송완순이었다. 이 합동회의에서는 향후 양 단체 산하의 부문별 단체통합을 촉진할 통합촉성위원회가 조직되었고, 조선문학가동맹의 새로운 기관과 부서들을 전형하기 위하여 전형위원이 선출되었다. 합동회의가 있고 난 다음 조선문학동맹결성대회가 열렸다.
조선문학동맹으로 합동하기로 한 직후에 낸 성명서를 보면 ①일본제국주의 잔재의 소탕, ②봉건주의 잔재의 청산, ③국수주의의 배격이었는데 특히 ③번 항목은 당시 이승만과 김구 등이 인민공화국에 가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임시정부를 추대하려고 하는 움직임에 반대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연맹이 합동하기로 한 것이 바로 이승만과 김구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진보 진영 전체의 결속을 다지기 위한 것으로 이는 바로 성명서의 강령으로 이어졌다.
조선문학동맹의 결성대회는 12월 13일에 열렸다. 그동안 이 시기 문학운동에 대한 연구자들이 이 결성대회에 대해서 별로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나 이는 재고되어야 한다. 남북의 문학계를 통합적으로 볼 때 이 조선문학동맹의 결성대회는 연구자들에게 널리 주목을 받고 있는 1946년 2월의 조선문학자대회보다 훨씬 중요하다 할 것이다. 종로에 있는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의 사무실에서 오후 12시 반부터 열린 결성대회에는 소설가·시인·평론가 등 70명이 참석하여529)≪자유신문≫, 1945년 12월 14일. 그날 오후 5시경 폐회하였다. 이원조의 사회로, 이태준의 개회사, 한효의 경과보고가 있었으며, 한설야가 의장으로 추대되었다. 이 결성대회에서는 조직의 선언과 강령이 발표되었는데 과제로서 제기된 것은 ①일본제국주의의 소탕, ②국수주의의 배격, ③봉건입헌잔재의 소탕, ④진보적 민족문학의 건설, ⑤조선문학의 국제문학과의 제휴였다. 12월 6일의 것과 비교하면 대체적으로 동일하고 ④번과 ⑤번 항목만 추가되는 정도였다. 이상의 강령을 채택하였고 다음으로는 긴급동의로 하지중장의 성명서에 대한 문학동맹의 반박성명서를 발표하기로 하고 그 기초를 특별위원에게 일임하였다. 이어 중앙집행위원 19명을 선정하였다. 중앙집행위원으로는 홍명희(위원장)·이기영(부위원장)·이태준(부위원장)·한효(서기장)·이원조·한설야·임화·안회남·권환·윤기정·박세영·조벽암·안함광·김남천·김기림·김오성·이병기·김광섭·정지용이 선출되었다. 이후 중앙집행위원회는 회의를 열어 각 부의 위원들을 결정하였다.530)小說部 위원장:안회남, 위원:이기영·한설야·이태준·최명익·박노갑·김남천.
詩 部 위원장:김기림,위원:변영로·정지용·김상호·권환·박세영·오장환·김광균·조벽암·김광섭.
評論部 위원장:김태준, 위원:이원조·한효·안함광·김남천·박치우·윤규섭·김오성·서인식·윤기정·임화.
농민문학 위원장, 아동문학 위원장, 고전문학 위원장, 외국문학 위원장.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삼팔선 이북의 문학가들의 움직임이었다. 당시 서울에 있었던 문학가들은 삼팔선 이남과 이북의 차이에 대해서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인민공화국만 성립되면 자연스럽게 한반도내에 통일독립국가가 건설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남북의 문학가들이 자연스럽게 서울의 조직으로 모일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삼팔선 이북의 문학가들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삼팔선이란 것이 결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기에 결코 가볍게 볼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동안 극히 간헐적으로 참여하였던 방식을 지양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로 결정하였고 그 속에서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1945년 12월 6일에 열린 두 단체의 통합의 소식을 듣고 조선문학동맹 결성대회에 참석하여 이를 의논하려고 서울로 출발하였다. 이기영·한설야·김사량 등 여러 명이 철원을 거쳐 1945년 12월 10일 서울에 도착, 잡지들이 주최하는 몇몇 좌담회에 참석한 후 13일에 열렸던 결성대회에 등장하였다.
이북에서 내려온 문학가들은 남북이 삼팔선을 경계로 나누어져 있는 상태에 대해 우려를 하였는데 그것은 남쪽과 북쪽을 미국과 소련이 점하고 있는 당시의 현실이 심각함을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이 무렵까지만 해도 특별히 평양중심주의와 같은 사고를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한반도 전체의 현실이 상대적으로 명료하게 보였던 것이다.531)한설야는 당시의 우려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삼십팔도선이란 마치 국경 이상의 장벽이 되어 있어 자칫하면 모든 운동이 분열·불통일을 가져오기 쉬운 현 단계에 있어서 이 분열과 불통일에 대한 극복 즉 통일전선에의 움직임과 그 전개가 조선민족통일전선에 있어서 가장 크고 긴급한 당면 과업으로 되어 있는 것은 진실히 민족재건의 뜻을 두고 있는 누구나가 다 같이 느끼고 있는 문제이다”(≪중앙신문≫, 1945년 12월 5일). 이에 반해 서울의 문학가들은 서울중심주의에 사로잡히기 쉬운 구조였다. 우선 과거와 마찬가지로 서울에서 줄곧 활동했기 때문에 서울중심으로 사고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삼팔선으로 갈라져 있고 미·소가 주둔하고 있는 한반도 전체의 현실이 쉽게 시야에 들어오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이 대회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하지성명서에 대한 반박성명서이다. 조선주둔 미군 최고사령관인 하지가 12월 12일 조선인민공화국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 주된 내용은 조선인민공화국을 정당으로서는 인정할 수 있지만 정부로 행세하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유일한 정부는 군정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향후 임시정부 수립의 주체로서의 인민공화국을 부정하는 것으로 당시 이를 지지하고 이에 매달려 있던 조선공산당과 일부 좌파들에게는 놀라운 소식이었다. 조선문학동맹 결성대회 하루 전에 나온 이 성명서에 대해 조선문학가동맹은 반박하는 성명서를 내기로 합의하였다. 이 성명서에는 “인민의 총의로서 국가적 이념의 표현 형태인 인민공화국을 육성시켜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국가적 이념의 표현 형태라는 말은 미군정이 문제삼는 ‘정부’라는 어휘를 피해가면서도 자신의 그러한 뜻을 표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당시 조선문학동맹의 구성원들 특히 서울에 있었던 문학인들이 인민공화국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컸던가 하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조선문학동맹의 위원장을 맡았던 홍명희의 불만 표시로 일시적으로 긴장되기도 했는데 당시 조선문학동맹의 인식의 한 단면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홍명희는 1946년 1월 5일≪서울신문≫에<성명>을 발표하는데 여기에 조선문학가동맹이 자신과는 상의 없이 하지의 성명서에 대한 반박성명을 낸 것에 대해 “바지 저고리 입힌 허수아비가 되고 말았다”라고 간접적으로 불만을 표시한다.532)이에 대해서는 강영주,≪벽초 홍명희 연구≫(창작과 비평사, 1999)의 3부 1장 참고. 이러한 불만은 자기와 상의하지 않은 것에 대한 것도 있지만 동시에 인민공화국을 일방적으로 지지하는 조선문학동맹의 노선에 대해서도 불만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 성명서를 둘러싼 일시적 긴장은 조선문학동맹의 노선을 간접적으로 알려 준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