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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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3. 미군정기의 문화
  • 1)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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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 문학계의 좌우대립과 민족문학논쟁(1945년 12월∼1946년 10월)

다. 문학계의 좌우대립과 민족문학논쟁(1945년 12월∼1946년 10월)

가) 민주주의민족전선과 좌파문학계의 대응

 1945년 12월 말에 발생한 찬·반탁 파동은 문학계에도 강한 영향을 끼쳤다. 반탁 쪽은 일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2월 1일 비상국민회의를 만들었다. 이승만은 이와는 다른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발족시켜 우익에서는 양 단체가 각각 병행하는 사세를 보여 주었다가 좌파에 맞서 싸워야 하는 요청으로 단일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찬탁을 주장하던 좌익 쪽에서는 민주주의민족전선의 결성으로 맞섰다. 당시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미·소공동위원회에 협력할 수 있는 단체와 개인들을 규합하여 이 조직을 만들었던 것이다. 비상국민회의가 만들어 졌던 2월 1일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위원회가 결성된 것이 이를 잘 말해 준다.

 비상국민회의와 민주주의민족전선으로 나누어져 있던 당시의 형국에서 조선문학동맹은 민주주의민족전선의 한 단체로 가입하면서 그 노선을 따랐다. 민주주의민족전선은 통일전선체라고 표방하였지만 당시 중도파를 비롯한 우익을 포괄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조선공산당의 외곽단체라는 성격을 뛰어넘지 못하였다. 좌우의 대립 속에서 좌익의 세력권을 넓히기 위하여 각 분야는 노력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나온 것이 바로 1946년 2월 8일과 9일 이틀에 걸쳐 거행된 조선문학자대회이다.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준비과정과 문학자대회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문학자대회에 보낸 민주주의민족전선 준비위원회의 메시지에서도 읽을 수 있다.533)≪건설기의 조선문학≫(백양당, 1946), 144쪽.

 조선문학자대회를 거치면서 1945년 12월 13일에 결성된 조선문학동맹은 새롭게 조선문학가동맹으로 바뀌었다. 조선문학자대회는 두 가지 점에서 문제성을 갖는다. 하나는 조선문학가동맹이 취하는 노선의 문제이다. 조선문학가동맹은 기본적으로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외곽단체가 되었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민주주의민족전선은 결성 직후 외곽단체를 확충하기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가 조선문화단체총연합이다. 1946년 2월 24일 조선문화단체총연합이 결성되었고 여기에 조선문학가동맹을 비롯하여 여러 문학예술단체들이 가입하였는데 그 중에서 조선문학가동맹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조선문학가동맹은 그리하여 민주주의민족전선이 가는 길을 따라가는 형국으로 진행되었는바 그것은 국제노선에 의한 조선임시정부 수립이었으며 또한 그것은 임정 출신들을 비롯한 우익인사를 배제한 채 이루어지는 협애한 통일전선의 길이었다.

 두 번째로는 조선문학가동맹과 조선문학동맹의 관계였다. 조선문학자대회에서 구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 출신과 조선문학건설본부 사이에 일대 논쟁이 벌어졌는데 이것은 표면상으로 단체의 이름을 조선문학동맹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조선문학가동맹으로 할 것인가의 문제였지만 실제로는 다른 두 가지의 쟁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하나는 대중적 문예활동과 전문작가 사이의 관계이며, 다른 하나는 조선문학동맹 조직의 성격문제였다. 특히 후자의 문제는 심각한 대립을 야기시켰다. 조선문학동맹이냐 조선문학가동맹이냐 하는 것은 1945년 12월 13일에 열렸던 조선문학동맹결성대회를 어떻게 평가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구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측에서는 이 결성대회를 가장 중요한 대회로 보고 있기에 그 때의 결정을 따라야 한다고 보는 반면, 구 조선문학건설본부측에서는 그 결성대회는 과도기적인 것이고 이번의 전국대회를 통하여 모든 것이 확정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상반된 입장을 갖고 있기 때문에 토론 가운데서 조선문학동맹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입장을 두고 양쪽이 서로 다른 주장을 하게 된 것이다.534)당시 회의에서 구 문건 출신들과 구 예맹 출신들은 각각 다른 주장을 펼쳤는데 발언자들의 구 소속을 병기하여 회의록의 일부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오장환(문건):“낭독자로부터 명칭자구 중 ‘家’字를 인쇄·오식인 것으로 하여 지금까지 문학동맹이라 불러 왔지만 문학동맹이라 하면 너무 막연하니 인쇄된대로 문학가동맹이라고 했으면 좋겠습니다.”하고 동의.
홍효민(예맹):“문학동맹은 이미 작년 12월 13일 문학동맹결성대회에서 결정되었으므로 문학자대회에서는 논의될 것이 아닙니다.”라고 이의.
김오성(문건):“문학동맹이란 것은 잠정적 명칭이었습니다. 전국문학자가 모인 본 대회에서 결정하여야 될 것입니다. 문학가동맹이라고 하자는 오장환씨 동의에 재청합니다.”
박찬모(문건):“어느 나라에 있어서나 문학자의 단체가 ‘작가동맹’이니 ‘문학가동맹’이니 하지 그냥 문학동맹이라고 하는 데는 없습니다.”
홍효민(예맹):“김오성씨의 말은 법규적으로 보아서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학자대회에서 동맹의 명칭은 운위될 바 아닌 줄 압니다.”
박아지(예맹):“명칭에 대하여 논의되는 것보다도 문학자대회의 소집을 문학동맹에서 소집하는 것이냐 문학자대회준비위원회에서 소집한 것이냐가 명백해져야 할 줄 압니다.”(중략-인용자).
박승극(예맹):“문학동맹이나 문학가동맹이나 다 좋다고 봅시다. 과거 프로레타리아문학동맹에서는 문학동맹을, 문학건설본부에서는 문학가동맹을 서로 고집하는 듯하나 이런 고집은 서로 말기로 합시다. 왜냐하면 농민조합이니 노동조합이니 했지 노동자조합이라고 한 곳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문학가의 모듬이라고 해서 반드시 문학가동맹이라 해야만 할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문제를 나오게 하여 회의가 불통일하게 된 것은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홍효민(예맹):“문학가동맹이란 문제가 왜 나왔는지 그것을 반성하는 동시에 그것을 고집말기로 합시다.”
한효(예맹):“준비위원회로서 ‘家’자를 붙인 것은 잘못으로 사과합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런 타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가지고 과거 프로문학동맹이니 문학건설본부니 하는 감정을 갖지 맙시다. 우리는 민족문학건설이라는 중요한 시기에서 적은 점에서 감정적으로 나가지 말고 다른 중요한 것을 토의하기로 합시다.”
이원조(문건):“여하간 여러 의견이 많으니 민주주의적으로 가부 중 다수결을 취함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의장:“가부로 채결하는 데 거수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일동:“좋습니다.”(거수결과 문학동맹이 28명 문학가동맹이 43명).
(≪건설기의 조선문학≫, 백양당, 1946, 227∼230쪽).
조선문학동맹을 하나의 과도기적인 것으로 보는 것은 삼팔선 이북에 있는 문학가들을 무시하는 견해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당시 대회에서 삼팔선 이북의 문학인들까지 참여한 70명의 문학가들이 결정을 했고, 따라서 이를 바탕으로 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단순히 과도기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朴贊謨와 같은 젊은 문학가들이 수를 내세워 결정하는 것은 서울중심주의의 발현으로 당시 삼팔선 이남과 이북으로 갈라진 상황에 대한 심각성을 고려하지 않은 다분히 반국적 시각의 노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태도로 하여 많은 문제들이 제기되었다. 첫째로는 조선문학가동맹내에서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 출신들이 조선문학건설본부의 자의석인 해석과 이에 근거한 독주에 불만을 품고 삼팔선 이북으로 올라갔다. 박세영·박아지·한효 등을 비롯한 문학가들이 1946년 중반에 월북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내부적 불만에서 싹튼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음으로는 삼팔선 이북에서 독자적인 문학단체의 출현을 낳게 했다는 점이다. 삼팔선 이북의 문학가들은 당시 정치권으로부터 북조선의 독자적인 문학단체의 결성을 지속적으로 요구받았지만 문학계의 남북 분단의 가능성 때문에 이를 물리쳐 왔다. 1945년 12월 10일에 여러 명의 문학가들이 서울로 내려와 조선문학동맹결성대회에 참가하였던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서울의 조직과는 다른 혹은 그와 연관성은 있지만 독자성을 갖고 있는 조직을 삼팔선 이북에 만드는 것이 편리하겠지만, 남북의 분열을 야기시킬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서울의 문학가조직에 합류하여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1945년 12월 13일의 조선문학동맹결성대회 이후 열린 서울에서의 조선문학자대회에서 조선문학동맹을 과도기적인 것으로 취급하면서 이전의 합의를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서 다분히 서울중심주의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들이 참여한 그야말로 전국적인 문학대회는 과도기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자신들이 참여하지 않은 채 서울에서 열렸던 대회를 마치 전국적인 대회라고 하면서 이 결정을 우선하는 것을 보면서 삼팔선 이북의 독자적인 문학조직을 결성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남북의 문학계를 분열시킬 수 있다는 부담감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문학가조직을 만들기에 이르고 이는 정치권에 이어 문학계에서도 남북의 분단이 이루어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것이 바로 1946년 3월 25일에 결성된 북조선문학예술총연맹이다. 이로써 남북에는 각각 다른 두 개의 문학가조직이 탄생하게 되었다.535)당시 삼팔선 이북의 이러한 사정에 대해서 김재용,<민주기지론과 북한문학의 기원>(≪분단구조와 북한문학≫, 소명출판사, 2000)을 참고할 수 있다.

나) 반탁과 우익 문학가들의 대응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에 대해 우익은 찬탁은 사대주의적인 것이고 반탁은 민족적인 것이라는 구도로 몰고 갔다. 이승만과 김구는 각각 다른 전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점에 있어서는 공통된 생각을 하였다. 그리하여 그 동안 조선문학동맹의 강한 영향력 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조선문학가동맹에 참여하지 않은 문학가들이 독자적인 조직을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 우익 문학가들 사이에는 문학관과 현실관에 있어 차이를 보여 두 개의 조직으로 나누어졌다. 찬탁을 반대하고 좌파적 경향을 반대한다는 점에서는 공통되나 그 구체적 지향에 있어서는 나누어졌다.

 하나는 민족주의 경향의 것으로 일제 때부터 민족주의적 지향을 추구했던 사람들이 만든 전조선문필가협회이다. 1946년 3월 13일에 발족된 이 단체는 문학가들뿐만 아니라 언론인 등 광범위한 문필가를 망라하였다. 정인보를 회장으로 하여 박종화 등이 부회장으로 일하였다. 그 외에도 이헌구 등이 여기에 가담하였는데 이 단체의 구성원은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기본으로 민족주의적 사고를 기본 축으로 하였다. 이러한 점은 이후 박종화가 쓴<민족문학의 원리>에 한층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가 “우리의 2세에게 충무공의 소설을 지어 읽혀주자, 우리들의 딸에게 논개로 희곡을 써서 읽혀 주자”라고 하는 대목에서 분명해지는 것처럼 당시의 민족의 현실과는 유리된 다분히 복고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전조선문필가협회의 구성원들이 모두 이러한 공통된 지향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주류가 이러한 성향을 강하게 띠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와는 다른 경향의 단체도 생겨났다. 1946년 4월 4일 김동리의 주도로 순수문학을 주장하는 조선청년문학가협회가 기독교청년회관에서 결성되었다. 최명익을 명예회장으로 삼고 회장에는 김동리가 앉았다. 여기에 참석한 인물들은 최태응·임서하·조연현·조지훈·곽종원·유치환·김달진 등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1930년대 중반을 전후하여 등장하여 문학활동을 하였던 사람들이다. 주지하다시피 1930년대 후반 순수문학론 논쟁과 세대 논쟁을 통하여 이들은 자신들의 독특한 감성을 이론적으로 설파하였는데 그 핵심은 민족주의나 사회주의와 같은 계몽적이고 이념적인 문학은 하지 않으면서 또 다른 세계를 지향하겠다고 했던 이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조선문학가동맹에 대해서도 반대하였지만 같은 우파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전조선문필가협회측의 민족주의적 경사에 대해서도 동의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순수문학론을 내세우게 되었다. 카프문학과 민족주의 경향 모두로부터 벗어나 있었던 문학가들 중에서 가장 선배 작가로 최명익을 발견하고 그를 명예회장으로 끌어들인 데서 이를 확연하게 읽을 수 있다. 당시 조연현이 최명익론을 썼던 것도 그런 점에서 우연이 아닌 것이다. 그들은 자신 나름대로 문학사적 계보를 세우고 그 속에서 자신의 문학적 정당성을 찾으려 하였고 나아가 미학을 수립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보하려고 하였고 이는 필연적으로 조선문학가동맹 측과의 논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전조선문필가협회가 이후 영향력을 가지지 못하였던 반면, 조선청년문학가협회는 시간이 갈수록 힘을 얻었다. 여기에는 전자의 조직에 속했던 이들이 민족주의적 정서를 강하게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민족의 분열을 바라지 않는 마음에서 가능한 한 자기의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지 않으려 했던 반면, 후자의 조직에 속했던 이들은 자신의 정체성 확보의 욕망이 훨씬 강했기 때문에 비타협적으로 논쟁하였고 이 과정에서 영향력을 얻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때로는 이를 위해서 논쟁을 야기시키는 측면도 존재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문학계는 좌우의 대립을 경험하게 되어 내부적으로 격심한 분열이 초래되었다.

다) 민족문학논쟁

 민족문학에 대한 자각적 이해는 해방 직후부터 바로 시작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1945년에 이루어진 문학계의 논의에서 민족문학에 대한 뚜렷한 자의식을 보여주는 논자를 발견하기는 매우 어렵다. 민족문학이 제기된 것은 1946년 초 조선문학자대회를 전후한 무렵부터이다. 특히 이 대회에서 임화가 발표한<조선민족문학 건설의 기본 과제에 대한 일반 보고>는 그 기초를 마련하는 역할을 하였다. 문학사에 대한 부정확한 이해에도 불구하고 이 논문은 당시 문학계 특히 좌파에게 있어 민족문학의 논의를 불러 일으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수립해야 할 문학의 이념이 민족문학이라고 하면서 계급문학이냐 민족문학이냐 하는 이전의 대립은 넘어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삼팔선 이남에서 이러한 논의가 있을 무렵에 삼팔선 이북에서도 민족문학논의가 일어났다. 앞서 지적한 바 있는 것처럼 1946년 2월 서울에서 조선문학자대회가 열리게 되면서 1945년 12월에 있었던 조선문학동맹이 서울중심으로 변하여 가자 1946년 3월에 평양에서는 북조선예술총연맹이라는 별개의 단체를 발족하였다. 그 단체의 발족 직후 이루어진 문학자대회에서 안함광은<민족문화론>을 발표하였다. 이 글은 임화의 것과는 달리 민족문화의 성격에 대해 자세하게 논의를 하고 있다. 노동자계급의 이념과 민족문학이 결코 모순될 수 없음을 논증하고 있다. 노동자계급의 이념을 따른다고 해서 노동자계급의 이해만을 고수해서는 안되고 당시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친일파 숙청이나 토지문제의 해결이란 과제를 충실하게 수행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노동자계급의 이념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계급의 이념과 민족문학이 결코 모순될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그런 점에서 임화의 논의와는 다르게 훨씬 구체적 성격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민족문학 자체에 대한 한층 정확한 이해에 도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삼팔선 이남과 이북에서 민족문학에 대한 성격을 놓고 다소 다른 의견을 내놓고 있었는데 흥미로운 것은 이 둘은 모두 좌파계열에서 나온 것이고 우파쪽에서는 이에 대한 별다른 의견을 내놓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이 시기의 민족문학 논쟁은 좌파계열 안에서만 이루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삼팔선 이남과 이북이 각각 다른 의견을 내놓는 데 그쳤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양쪽 사이에는 상대방의 규정에 대한 불만으로 하여 논쟁적 성격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물론 각각의 안에서도 이견이 존재하였고 이를 둘러싸고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은 남북 사이 즉 조선문학가동맹과 북조선예술총연맹 사이의 대립이었다.

 안함광은<민족문학재론>에서 자신의 민족문학관을 다시 한번 펼치게 되는데 이 글에서 주목을 해야 하는 것은 당시 이남의 조선문학가동맹의 민족문학론에 대한 비판과 또한 북조선예술총연맹 내부에서 제기된 다른 논자들의 민족문학관에 대한 명시적 비판이다. 그는 현재 한반도의 현실에서 민족의식과 계급의식은 결코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민족문학이냐 계급문학이냐 라는 식의 접근이라든가 혹은 우리가 세워야 할 문화는 ‘근대적 의미의 민족문학’이라고 하는 등의 임화를 비롯한 조선문학가동맹이 제시한 주장은 매우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한다. 이와 더불어 그는 무산계급문학과 민족문학을 같은 것으로 보는 북조선예술총연맹 내부의 논의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있다. 민족이 당면한 과제를 해결하는 것이야말로 현재의 시점에서 노동자계급의 관점이기 때문에 무산계급문학이 곧 민족문학이라고 보는 것은 사태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삼팔선 이북에서 안함광의 민족문학론이 진행되고 있을 때 이남에서 가장 의식적으로 민족문학 논의를 펼쳤던 임화도 이전의 논의에서 나아가는 주장을 펼쳤다. 1947년 초에 발표한<민족문학의 이념과 문학운동의 사상적 통일을 위하여>에서는 이전에 자신이 펼쳤던 견해를 바꾸어 나갔다. 이전의<조선 민족문학 건설의 기본 과제에 대한 일반 보고>에서는 ‘근대적의 의미의 민족문학’을 주장하였는데 이 글에서는 ‘식민지의 현대적인 민족문학’이라고 규정하였다. 이전의 글에서는 서구의 근대와 비서구의 근대 사이에 벌어진 중요한 차이를 간과하였던 반면 이 글에서는 비서구의 근대가 갖고 있는 특수성에 주목하였다. 이에 기초하여 민족의식과 계급의식이 결코 모순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이의 통일적 이해로 다가갔다. 이 무렵의 논의는 안함광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게 되어 수렴되는 양상을 드러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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