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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 문학계의 재편 노력과 좌우문학논쟁(1946년 10월∼1947년 12월)

라. 문학계의 재편 노력과 좌우문학논쟁(1946년 10월∼1947년 12월)

가) 조선문학가동맹의 조직 개편과 서울 중심주의의 변화

 1946년 말에 이르면 좌우의 균형은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띠게 되었다. 좌파들이 큰 기대를 걸고 행했던 일련의 대중적 파업과 투쟁은 오히려 좌파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역량을 손실시키는 쪽으로 나아갔고, 우파는 이를 기회로 자신들의 주장을 한층 강력하게 밀고 나갔다. 물론 우파는 아직 대중을 획득하면서 세력을 확산하는 정도에는 미치지 못하였지만 분명 이전과는 다르게 자신의 입지를 강화시켰다.

 이러한 전반적 상황은 문학계에도 영향을 미쳐 판도가 재편되는 움직임을 보였다. 조선문학가동맹의 경우 상실된 역량을 회복하면서 미군정에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지 않았던 중도파를 끌어들일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을 것이고 더불어 우파에 대한 그동안의 소극적인 대응이 아닌 본격적인 비판을 감행하였다. 우파에 대한 강한 비판과 중도파의 견인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양상을 보였다.

 청년문학가협회를 비롯한 우파의 경우 조선문학가동맹에 대한 집요한 비판을 통하여 자신의 입지를 넓히려던 소극적 태도에서 벗어나 더욱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 정세가 좌파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도 그러하지만 무엇보다도 조선문학가동맹측이 그동안에 보였던 무시를 벗고 본격적으로 논쟁의 장으로 들어오는 것을 기화로 중심 무대에서 자신들의 역량을 보여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 좌우 문학계 사이의 논쟁이 격화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논쟁은 조선문학가동맹측에서는 주도적인 이론가보다 젊은 외국문학 전공자 중심으로 이루어진 대단히 한정적인 것이었다.

 우선 조선문학가동맹에서 벌인 문학계의 재편 노력부터 살펴보자. 조선문학가동맹은 1946년 11월 8일 중앙집행위원회를 열고 조직의 개편을 단행하였다. 북조선예술총연맹의 발족으로 이미 노선을 달리하던 삼팔선 이북의 문학가들을 빼고 그 자리에 중도파 작가들을 끌어 넣었다. 부위원장이었던 이기영과 한설야를 빼고 그 자리에 이병기를 선임하였다. 그리고 중앙집행위원이었던 윤기정·한효·이동규·박세영·안함광 대신에 양주동·염상섭·조운·채만식·박아지·박태원·박노갑을 선임하였다.536)≪예술통신≫, 1946년 11월 11일. 서기장으로 권환 대신에 김남천을 뽑는 등 전반적으로 조직을 개편하였다. 이러한 조직 개편에서 유심히 보아야 할 것은 중도파 문학인들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이다. 양주동·염상섭·조운·채만식 등을 끌어들여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이전에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이들이 당시 조선문학가동맹의 이러한 제안에 호응하였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개개인에 따라 다를 수 있어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대부분이 그렇게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조선문학가동맹이 예전과는 다르게 이렇게 중도파들을 비중있게 넣었다는 것과 이것이 갖는 의미이다. 필자가 보기에 당시 조선문학가동맹은 문학가들을 광범위하게 포진시켜 조선문학가동맹의 외양을 넓히는 것이 미군정에 대해 운신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근거가 되고 나아가 간접적이나마 민주주의민족전선 진영을 강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537)당시 삼팔선 이북에 있던 이태준마저도 이 일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실명을 들어가면서 역설하고 있다.≪문학≫3(1947년 4월호)에 실린 편지글<영웅적 활동을 승리로 극복한다>(1947년 1월 30일에 쓴 것으로 되어 있다)의 일절인 “특히 가람선생과 무애선생에게 동맹일을 위해 적극적 지도를 청하시오며”는 당시 조선문학가동맹의 중도파 문학인에 대한 관심을 잘 말해준다. 조선문학가동맹은 조선문화단체총연합의 일원으로 민주주의민족전선에 속해 있었다. 그리하여 미·소공위의 결정대로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통일독립국가 건설의 길로 생각하고 이에 최선을 다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우익의 반대가 만만치 않기 때문에 이를 차단하고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민중의 역량을 강화하고 끌어들이는 것이 첩경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에 더 넓은 통일전선이 필요함으로 절감하였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고려할 것은 우파 문학인 즉 청년문학가협회의 구성원들에 대한 직접적 비판의 강화이다. 중도파 작가들을 끌어 넣는 것이 자기 진영을 강화하는 것이라면 이는 필수적으로 우파진영의 약화를 기도하는 일에 맞닿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파에 대한 비판이 따를 수밖에 없었고 이는 그동안 무시했던 논자들인 김동리 등에 대한 적극적 대응으로 이어졌다. 김동리가 1946년 4월 청년문학가협회를 만들고 난 다음부터 지속적으로 조선문학가동맹을 비판하여도 이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이는 분명 변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정세가 좌파에게는 불리하게 돌아가고 우파에게는 우호적으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중도파 문학인에 대한 적극적인 견인은 우파 문학인에 대한 비판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었다. 김병규가 김동리의 순수문학을 직접적으로 비판한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우파진영에 대한 비판은 김동리의 주장인 순수문학론에 대해서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민족주의 자체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은 특히 박종화 등이 중심으로 결성된 전조선문필가협회에 대한 것이었다. 박종화는<민족문학의 원리>538)≪경향신문≫, 1946년 12월 5일.에서 충무공과 논개의 불굴의 기개를 그린 문학이 민족문학이고 이러한 문학을 내놓는 것이 시급하다는 주장을 펼친 바 있다. 이것에 대해서도 조선문학가동맹측은 비판을 하였는데 이명선의<민족문학과 민족주의 문학>539)≪신조선≫, 1947년 2월.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청년문학가협회측의 김동리가 내놓은 순수문학론과 전조선문필가협회측의 박종화가 내놓은 민족주의 문학론에 대해 김병규와 이명선과 같은 조선문학가동맹의 젊은 논객들이 각각 비판을 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이 시기 조선문학가동맹의 위기의식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540)흥미로운 것은 김동리를 비판하는 김병규의<순수문학과 정치>와 박종화를 비판하는 이명선의<민족문학과 민족주의문학>이≪신조선≫잡지 같은 호에 나란히 실려 있다는 점이다. 또한 김동리의 순수문학론에 대해서는 이것과 관련이 깊은 불란서 문학전공자로, 박종화의 민족주의문학론에 대해서는 전근대 시기 문학을 전공한 이명선을 등장시키고 있다. 이런 것을 비추어 볼 때 조선문학가동맹은 이들 젊은 논객들로 하여 이 두 문제에 대해 동시적으로 비판을 조직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시기 조선문학가동맹의 문학계 재편 노력에 대해서 간과해서는 안될 것은 서울중심주의의 포기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1946년 2월 8일∼9일의 조선문학자대회를 계기로 하여 문학가 내부에서는 새로운 대립이 생겨났다. 과거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 출신의 문학가와 조선문학건설본부 출신의 문학가 사이에 문학자대회의 성격과 또한 1945년 12월 13일날 결성된 조선문학동맹의 성격을 둘러싸고 의견이 대립하였는데 조선문학건설본부 출신들의 주도에 반발하여 일부 문학가들이 월북하였다. 또한 재북 문학가들도 서울에서 벌어진 이러한 사태에 대하여 불만을 갖고 독자적인 조직을 만들었다. 이들은 서울에서 올라온 문학가들을 끌어들여 문학가 조직을 확대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남북 사이에는 두 개의 문학단체가 독자적으로 존재하였다. 조선문학자대회에서는 삼팔선 이북에 ‘총국’을 둘 수 있다고 하면서 이 문제를 풀어보려고 했지만 남북에는 전혀 다른 조직이 생겼던 것이다.

 삼팔선 이남에서는 10월 항쟁의 여파로 입지가 갈수록 어렵게 된 반면, 삼팔선 이북에서는 좌파의 세력이 강화되는 양상이 벌어지자 과거처럼 서울중심을 고집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다. 이러한 점으로 서울중심주의에 대한 강력한 반성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을 잘 말해주는 것으로 당시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심적 이론가였던 임화의 글<북조선의 민주 건설과 문화예술의 위대한 발전>을 들 수 있다. 조선문학가동맹은 심한 위기에 봉착하여 제대로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태인 반면 북한에서는 북조선예술총연맹 주도하에 커다란 발전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하는 임화의 인식에서 해방 직후나 혹은 1946년 초의 그것과는 현저한 차이를 읽을 수 있다. 서울이 한반도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기초로 모든 것을 고려하였던 그가 이제 평양을 또 하나의 중심으로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나) 좌우익 문학논쟁

 청년문학가협회의 우파는 처음부터 조선문학가동맹을 비판하여 왔다. 특히 그 맹장이라 할 수 있는 김동리 1인이 주도하는 것인 만큼 조선문학가동맹 측에서는 별다르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고 특히 이에 대해 반론을 펼 만큼 중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이러한 경향을 일제 말에 존재하였던 순수문학의 연장이기 때문에 새로운 사회적 환경 속에서 시간이 흐르면 수그러들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1946년 4월 청년문학가협회의 발족 이후 발표된 김동리와 조연현이 쓴 일련의 글은 물론이고 김동리가<순수문학의 정의>541)≪민주일보≫, 1946월 7월 11·12일.를 발표한 것에 대해서도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조선문학가동맹의 무시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글을 썼던 김동리가<순수문학의 진의>542)≪서울신문≫, 1946년 9월 15일.와<창조와 추수>543)≪민주일보≫, 9월 15일.를 발표하자 조선문학가동맹의 일원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김병규가 본격적인 반론인<순수문제와 휴머니즘>544)≪신천지≫, 1947년 1월.과<순수문학과 정치>545)≪신조선≫, 1947년 2월.를 발표하게 된다.

 그동안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던 조선문학가동맹측에서 왜 이시기에 정면 대응을 했는가 하는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시기 문학계의 상황, 특히 조선문학가동맹의 현실 인식을 감안해야 한다. 조선문학가동맹은 1946년 10월 사건을 거치면서 자신의 입지가 현저하게 축소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 이후 이제 민중들의 투쟁을 통하여 이를 성사시키도록 압박하고 나아가 인민공화국을 세우는 길을 선택하였지만 민중들의 항쟁에 대한 미군정의 대응은 생각보다 훨씬 강도가 강하였고 그 과정에서 많은 역량 손실이 따랐던 것이다. 특히 박헌영을 비롯한 몇몇 지도부의 활동가들이 체포 위기에 놓여 삼팔선 이북으로 올라가는 상황은 이러한 위기감을 한층 강화시켰다. 그렇기 때문에 그동안 행하였던 방침을 전반적으로 반성해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던 것이다. 그 중의 하나가 앞서 보았던 것처럼 중도파 작가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그들의 견인이었다. 우파진영에 대한 강한 비판을 통한 자기진영의 단결을 촉진하는 일도 더불어 진행하였다. 이 둘은 결코 뗄 수 없는 동전의 양면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동안 흘려보냈던 청년문학가협회진영의 순수문학론적 민족문학론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며 이 책임을 맡은 사람이 바로 김병규였던 것으로 보인다.

 김동리는<순수문학의 진의>에서 두 가지 점을 강조하는데 그 첫째는 순수문학이 결코 ‘상아탑의 문학’이 아니라는 점이다. 청년문학가협회 바깥에서 순수문학을 보는 입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졌다. 조선문학가동맹쪽에서는 순수문학은 일제 말의 파시즘이 강화된 상황 속에서 불가피하게 이루어진 것으로 당시에는 일정한 의의를 가지지만 해방 후에는 아무런 현실적 의미를 갖기 어려운 것으로 그런 점에서 이 새로운 변화된 현실에서 순수문학을 주장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조선문학가동맹 외부에 있던 김동석이 주장한 것으로 순순문학은 정치적 현실과 무관하게 그야말로 상아탑에 머물려야 한다고 하면서 그렇지 못한 김동리식의 순수문학을 비판하였다. 이 둘은 순수문학에 대한 상반된 평가-한쪽은 순수문학을 부정하고, 다른 한쪽은 순수문학을 긍정하고-에도 불구하고 순수문학을 현실과 떨어진 상아탑의 문학이라는 현상 인식은 공유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김동리는 순수문학은 결코 상아탑의 문학은 아니며 어디까지나 휴머니즘의 문학이라고 하면서 이 양쪽의 비판을 재비판하였다.

 김동리 주장 중 다른 하나는 순수문학이 주장하는 휴머니즘은 세계사적 차원에서 볼 때 희랍시대의 제1휴머니즘과 르네상스시대의 제2휴머니즘의 정신을 이어받은 제3의 휴머니즘이라는 것이고 이는 그런 점에서 민족문학과 상통한다는 점이다. 르네상스 이후 진전된 산업혁명을 비롯한 제반 물질적 생활의 진전과 이에 대해 반발한 맑시즘의 유물사관은 모두 근대 과학이란 공통된 틀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를 넘어서는 것이 바로 제3 휴머니즘이고 이러한 지향은 민주주의의 결과물의 하나인 조선해방의 노력과 이어지기 때문에 민족문학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김병규는 우선<순수문제와 휴머니즘>에서 정면으로 반박한다. 첫째는 순수문학이 상아탑의 문학이 아니라고 한 김동리의 주장에 대해 서구문학 특히 19세기 중반 이후 불란서 문학의 근거로 순수문학은 현실로부터 유리되어 진행된 것이기 때문에, 이것에 대한 파악과 나아가 조선의 현실에 대한 이해가 없이 이를 마구잡이로 사용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런 의미의 순수문학론은 결국 인간을 추상적으로 파악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둘째는 휴머니즘을 세 단계로 구분하는 것도 사실과 맞지 않지만 더구나 자본주의의 물질적 변혁과 맑시즘의 유물론을 근대 과학의 공통 틀 속에서 파악하고 이를 넘어서는 것이 휴머니즘이라고 하는 것은 일제의 파시즘이 제고하였던 논리를 답습하는 것으로 매우 잘못된 파악이라는 것이다. 그의 다른 글<순수문학과 정치>에서도 앞의 글과 마찬가지로 두 가지의 문제를 중점적으로 부각시키면서 비판하고 있는데 특히 전자의 문제에 대해서는 각도를 달리하여 구체적으로 비판하고 있어 주목된다. 김동리의 순수문학은 “순수문학에 정치를 도입하기 보다 순수문학을 정치의 도구로 삼으려고 하는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김동리가 당시의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서 있는 자리를 비판한다. 김동리의 순수문학은 현실 정치에 있어 반탁이라든가 단독정부 수립 등과 같은 이승만 계열의 우익 정치에 밀접하게 닿아 있기 때문에 서구의 순수문학과 김동리의 순수문학과는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앞의 글에서는 원칙적으로 언명되던 것이 이 글에서는 아주 구체적으로 거론되고 있어 훨씬 분명해진다.

 김동리는<순수문학과 제3세계관>546)≪대조≫, 1947년 8월.에서 본젹적인 반론을 하게 된다. 그 동안 자신이 조선문학가동맹에 대해 여러 차례 비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반향이 없다가 김병규의 반론을 접하자 이를 넘겨버릴 리가 만무하였던 것이다. 김병규의 비판 논리에 일 대 일로 대응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우선 순수문학은 현실과 무관한 채 존재해 왔다는 김병규의 견해에 대해 김동리는 자기가 말하는 순수문학은 그러한 것, 즉 발레리나 말라르메가 말하는 그러한 순수문학이 아니고 오히려 세익스피어와 괴테가 추구했던 그러한 문학이라고 하였다. 단지 자기가 그냥 문학이라 하지 않고 순수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발레리나 말라르메식의 ‘탐미주의’적 문학관이나 프로문학 같은 공리주의 문학관과 구별짓기 위해 순수문학이라고 사용하고 있는 것이라고 반론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순수문학은 본격문학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서구의 순수문학에 조응하지 않는다고 해서 자신의 순수문학이 잘못된 것이라고 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반론을 보면 김동리의 순수문학은 김병규나 김동석 등이 말하는 순수문학의 정의와는 출발부터 맞지 않기 때문에 비생산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제3의 휴머니즘이란 것은 결국 자의적이고 더구나 유물사관을 근대주의로 보면서 인간이 소외되어 있다고 보는 것은 타당치 않다는 김병규의 반론에 대해서이다. 김동리는 자신이 주장하고 있는 제3휴머니즘은 부르주아 사회가 만들어 낸 일련의 부패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이 자본주의를 극복하겠다고 나온 맑시즘의 유물사관도 결국 근대주의의 변형태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자본주의를 말함-인용자) 정치제도와 경제기구와 생활자료 산출방법에 있어서의 갖은 모순과 죄악과 불합리 불공평들을 과학적으로 구체적으로 통렬히 해부 비판한 맑시즘체계의 세계관은 그 체계구성의 조직과 방법에 있어, 또 그 유물론적 인식 태도에 있어 완전히 과학주의, 물질주의, 기계주의를 취하게 되었던 것이므로 그 사회관에 있어서는 근대주의(자본주의 사회)에 강경히 항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유물론적 인식론적 본질에 있어서는 당연히 양기되어야 할 근대주의의 연장과 그 여식의 응결에 불과하게 되었던 것”이라고 하는 비판의 대목은 그의 생각을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며 또한 김동리와 김병규 사이의 차이가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김동리의 반론에 대한 재반론으로 김병규는<독선과 무지>547)≪문학≫, 1948년 4월.를 발표하는데 이는 새로운 각도의 반박보다는 기존의 입장을 한층 더 세밀하게 논증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논쟁에서 항상 두 가지가 문제가 되었는데 하나는 순수문학의 성격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제3휴머니즘의 현실성 문제였다. 이 글에서도 전자의 문제에 대해서는 김동리의 ‘독선’을 후자의 문제에 대해서는 ‘무지’를 각각 비판하였다. 순수문학의 성격에 대해서 김병규는 서구문학사를 구체적으로 예시하면서 순수문학이란 본격문학과 같은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정의를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개념정의를 하는 김동리의 ‘독단’을 비판하였다. 후자에 대해서는 김동리가 맑시즘의 유물사관을 근대주의의 연장이라고 비판하면서 특히 그것이 갖고 있는 주체 부재를 비판하였는데 이는 오해라고 비판하였다. “유물사관은 절대로 주체적 조건을 무시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물론 씨와 같이 주체가 모든 것인 것처럼 독선적 태도도 취하지 않는다. ‘르네상스 휴머니즘’은 이하 보아온 바와 같은 객체적 조건에서 시발하였고 또 그 자체의 주체적 조건은 객체적 조건에 반작용하여 시민계급의 발전을 추진시켰다고 보는 것이 유물사관의 입장인 것이다. 즉 객체와 주체와의 상호작용에서 역사의 발전운동을 보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유물사관이야먈로 휴머니즘의 정신을 이어받는 것이라고 반론하였다.

 김병규와 김동리의 이러한 논쟁에서 중요한 것은 전자 즉 순수문학의 정의가 아니고 후자 즉 맑시즘의 유물사관의 평가 문제였다. 전자가 크게 쟁점이 될 수 없는 것은 이 두 사람이 대상으로 하는 순수문학의 정의가 원천적으로 다른 만큼 서로 과녁이 빗나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후자는 같은 대상에 대해서 다르게 평가하는 것이기 때문에 쟁점이 되는 것이다. 김동리의 주장 즉 제3세계관이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그가 말한 것처럼 자신이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자본주의의 폐해에 대해서 올바르게 비판하고 나아가 당시의 역사적 맑스주의가 범하는 문제를 제대로 짚어줄 때 가능한 것이나 당시와 이후 그의 활동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볼 때 이에 미친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만약 이러한 논지를 계속 철저하게 수행했다면 그는 자신의 말처럼 근대주의와 근대주의의 연장으로서의 변형태를 근본적으로 극복하여 근대 이후를 준비할 수 있고 그렇게 되었다면 그는 마땅히 20세기 한국근대문학사에서 한 정점을 차지하면서 진경을 보여주었을 것이지만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김병규의 경우 역사적 맑스주의와 맑스의 견해를 구분해가면서 설득할 수만 있었다면 참으로 근대문학의 이론적 수준을 높일 수 있었겠지만 그것은 당시의 시대적 한계 속에서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서구의 문학사를 개괄하면서 프리체 類의 것을 그대로 대입시키는 것은 그 자신의 한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좌우문학논쟁에는 위에서 다룬 것 이외에 김동석과 김동리 사이의 논쟁을 들 수 있다. 김동석이<순수의 정체>548)≪신천지≫, 1947년 11월.에서 김동리의 문학관을 비판하였고, 이에 대해 김동리가<생활과 문학의 핵심>549)≪신천지≫, 1948년 1월.으로 반박을 하였다. 이후 이들의 논쟁은 단독정부 수립 이후에 대담의 형식으로까지 번져 논쟁을 하기도 하는데550)이 대담의 내용과 의미에 대해서는 이현식의<해방직후 순수문학논쟁 연구>(≪민족문학사연구≫7, 1995)를 참고할 수 있다. 의외로 그 내용은 간단하였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그렇기 때문에 핵심적인 쟁점이 제대로 부각되지 않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이 논쟁에서 앞의 것과 다른 것은 좋은 문학작품의 평가 기준을 둘러싼 시론적 모색이었다. 김동석과 김동리는 세익스피어가 좋은 문학가라는 데는 일치하지만 그 평가 기준은 다르다. 김동석은 세익스피어가 당대 현실에 충실하면서 인민들의 지향을 그 역사적 전망 속에서 제대로 보여주는 리얼리즘에 충실했기 때문에 위대한 좋은 작품이라는 것이고, 김동리는 세익스피어가 생명의 呂律과 이에 입각한 인간됨을 추구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동석과 김동리의 논쟁은 훨씬 근본적인 것을 다루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소 추상적으로 흐른 느낌을 준다. 특히 김동리가 ‘동양의 전통’ 운운할 때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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