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말 이후의 문학계는 정치 정세의 변화와 아울러 심각한 위기를 경험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경향의 공존이 불가능해지는 양상을 보여 주었다. 해방 직후부터 줄곧 문학계의 중심을 차지하였던 조선문학가동맹은 이 시기에 들어 커다란 타격을 입고 입지가 결정적으로 약화되었다. 1947년 8월에 들면서 미군정당국은 조선문학가동맹을 비롯한 조선문화단체총연합의 구성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시작하였는데 처음에는 이것을 앞으로 다가올 8·15기념 집회를 사전에 봉쇄하기 위해 의례적으로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가 그 구금 대상의 폭이라든가 8·15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검거가 이루어지는 것 등을 목격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것임을 알아 차리게 되었다. 이러한 대대적인 검거에 맞선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것임을 깨달은 이들은 자신들의 활동 무대를 옮겨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다. 게다가 그나마 마지막으로 희망을 걸었던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을 보면서 더 이상 남쪽에서 활동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깨달았고 이후 주도적인 문학가들이 월북을 하게 된다. 임화를 비롯하여 김남천·오장환 등 조선문학가동맹의 핵심적인 멤버들이 이 무렵에 월북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조선문학가동맹은 이 시기에 세 갈래로 나누어 활동이 이루어진다. 첫째는 평양계이다. 김남천은 월북하자마자 평양에 머무면서 조선문화단체총연합의 대변인 역할을 하게 된다. 여기에는 같이 월북하였던 오장환을 위시하여 1946년에 월북하여 평양에서 이미 활동을 하고 있던 이태준 등도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둘째는 해주계이다. 임화는 월북하여 평양에 거주하지 않고 해주에서 활동하였다. 그곳에서 남로당계 잡지인≪전진≫·≪노력자≫그리고≪별≫등을 출판하여 남쪽으로 내려 보내는 작업을 하였다. 거기에는 1946년 말에 월북하여 자리를 잡고 있었던 이원조 등이 포함된다. 셋째는 서울계이다. 조선문학가동맹과 조선문화단체총연합의 핵심 구성원들이 월북한 후 그 자리를 지킨 사람은 이용악·현덕을 비롯한 젊은 문학가들이었다. 해방 직후에 등장하여 문학활동을 했던 많은 젊은 문학가들, 예를 들어 이병철·박찬모·박산운·강형구 등의 문학가들은 간접적으로 연락을 취하면서 자체적으로 문학을 해 나갔다. 조선문학가동맹이 발간하던 기관지≪문학≫의 발행인이 이태준에서 현덕으로 바뀌어 나온 것을 보면 서기장을 맡고 있던 김남천이 월북한 후 조선문학가동맹이 얼마나 힘들게 견뎌내고 있었는가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문학가동맹쪽은 이러한 상태였기 때문에 기존의 관행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는 정도밖에 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점은 단독정부 수립을 전후한 시기에까지 계속 이어졌다.
청년문학가협회 조직에 관여하였던 문학가들은 남북의 분단고착화가 가시화되는 현실 즉 1947년 10월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한반도 문제가 유엔으로 넘어가는 것을 보면서 남북의 분단이 가져올 수 있는 위험에 대해 깊이 천착하지 못하였다. 항상 현실로부터 일정하게 떨어져 문학을 했던 이들로서는 이러한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상태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충하는 일에 더욱 매진하게 되는 것이다. 분단이 되더라도 자신이 지향하는 가치가 구현될 수 있다면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기에 와서 특별하게 위기를 느낀다거나 혹은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할 필요성 같은 것을 느끼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문학가동맹과 청년문학가협회가 이러한 양상으로 나누어져 있는 상황에서 가장 위기를 느끼면서 이에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한 이들은 중도파 작가라고 부를 수 있는 염상섭·채만식 등의 문학가들이었다. 이들은 어떤 특별한 조직에 가담하지도 않았고 또한 새로운 조직을 만든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이들은 정치적으로 당시 좌우 모두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민족문제와 계급문제를 통합적으로 보려고 하였으며 또한 현실주의적 사고 속에서 한반도 주민들의 바람직한 삶을 모색하였다. 특히 미·소 모두로부터 우리가 독립하는 것이 남북의 분단을 막으며 동족상잔을 막는 길이라고 생각하였기에 이에 주력하였다. 당시 좌파들이 소련에 기대어, 우파들이 미국에 기대어 자신이 생각하는 체제를 만들려고 노력한 것에 반해, 이들은 미·소 모두에 대해 공히 비판적 거리를 두고 이로부터 벗어나 독립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민족문제의 시급한 해결을 주장한 이들을 중도파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작가들은 주로 작품활동을 통하여 자신들의 지향을 드러낸 셈이기 때문에 이 시기에 이들이 발표한 작품들을 중심으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염상섭은 이 시기에 단편<삼팔선>과<이합>그리고 장편≪효풍≫을 발표하였다.<삼팔선>은 이북에서 이남으로 내려오는 사람들이 겪는 고난을 통하여 분단이란 문제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분단이 가져올 수 있는 치명적 상처를 아직 예감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작가는 현실의 심각함을 깨우쳐 주려고 하였던 것이다.<이합>역시 마찬가지이다. 삼팔선으로 말미암아 흩어졌던 사람들이 다시 만나게 되는 과정을 통하여 분단이 초래할 수 있는 억압적 상황의 심각성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처럼 이 시기에 발표한 두 단편이 보통 사람들이 분단의 가능성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과는 달리 이것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위험성을 예각화시켜 보여줌으로써 이를 막아야 하는 것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미·소의 외세가 한반도에서 행사하는 억압과 우리 내부의 차이를 딛고 통합해야 할 필요성 등이 절절하게 흐르고 있다. 장편≪효풍≫은 미국과 소련을 각각 자신의 이상국으로 삼고 이들에 기대어 미래를 건설하는 사람들에 대한 강한 비판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러한 사람들과는 달리 미·소 모두로부터 독립하여 우리 스스로 통일독립국가를 세우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투쟁도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는 미국과 소련에 기대어 자신의 이익과 이상을 세우려고 하는 사람들이 갖는 단견을 아주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어, 작가가 이러한 분단을 조장하는 사람들에 대해 얼마나 강한 분노를 느끼고 있었으며, 또한 그들과는 다른 길을 걸으려고 했던가 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채만식은 염상섭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이 시기 중도파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작가이다. 해방 직후에<역로>를 비롯하여 여러 편의 작품을 발표하였던 채만식은 1946년 말 이후 침묵을 지키다가 1948년 들어서면서 또다시 문제적인 단편인<도야지>와<낙조>를 세상에 내놓는다. 그 역시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한반도의 문제가 소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뜻대로 유엔으로 넘어가면서 남북이 분단될지 모른다는 강한 위기감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도야지>는 남북분단의 구실을 제공하였던 1948년의 5·10선거를 다루고 있다. 그가 눈여겨 본 것은 이 선거에서 후보로 나오는 사람이 민중과 민족의 삶과는 무관하게 오로지 자신의 부와 명예만을 위하여 행동한다는 사실이다. 분단이 코 앞에 닥쳐오고 있는 현실에서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소신도 주장도 없고 오로지 자신의 치부만을 위해 선거에 입후보하는 이런 인물들이야말로 모리배와 정상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과 이들이 판을 치는 이 선거라는 것이 결국 단독정부의 수립과 나아가 분단을 촉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일임을 아주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그의 문제의식이 가장 빛나는 것은 역시<낙조>이다. 이 작품은 세 사람의 입장이 팽배하게 맞서면서 전개되는 방식을 취함으로써 당시의 시대적 현실의 한 복판에서 존재하는 분단과 그 해결에 대한 상이한 입장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고 나아가 이에 대한 작가의 전망을 명료하게 보여주고 있다. 황주 아주머니는 북의 공산주의를 무력으로 붕괴시켜 통일을 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반면에 영춘은 남이 북을 통일하든 북이 남을 통일하든 통일만 하면 된다는 입장으로서 오로지 남에 의한 북의 통일이란 입장을 지니고 있는 황주아주머니와는 분명 다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영춘은 가히 통일지상주의자라고 부를만 한 인물로 통일을 물신화시킨 것이다. 이 작품의 화자는 통일이란 것이 무조건 되면 좋은 것이 아니라 어떤 통일이냐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하면서 남북이 서로 무력으로 통일하게 되면 동족상쟁은 물론이고 그 뒤에 자리잡고 있는 미·소에 의한 새로운 간섭으로 심각한 재앙을 남길 뿐이기 때문에 미·소에 의하지 않고 남북이 평화적으로 통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뜻을 비치는 것이다. 작가는 당시 현실에서 존재하는 분단과 통일에 대한 이러한 상이한 입장 사이의 대화를 통하여 바람직한 길을 모색한다.
이상에서 보았던 것처럼 이 시기에 이르러 문학계에서 자기 나름의 전망을 갖고 활동하는 것은 바로 이 중도파에 속한 작가들뿐이었다. 좌파의 작가들은 현실적 지반을 상실하여 자신의 보위 자체가 최대의 과제가 되는 상황이었기에 새로운 대응방식을 제출하지 못하고 관행적으로 움직일 뿐이었다. 당시 구국문학 등의 구호를 내걸기도 하였지만 이것이 이전의 것과 다른 새로운 대응으로 보기에는 현실성이 약하였다. 우파에 속한 작가들은 이러한 현실문제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거나 혹은 단독정부 수립에 밀접하게 닿아 있기 때문에 분단을 막고 통일독립국가를 수립할 수 있는 그 어떤 전망도 제출하지 못하였다. 그런 점에서 바로 이 중도파 작가들이 그 위기 속에서도 활발하게 자신의 전망을 찾고자 분투하였던 것은 냉전적 분단구조의 해체를 더욱 가속화시켜 한반도에 평화정착을 모색하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에서 볼 때 한층 의미있는 작업이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金在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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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