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직전부터 20대 후반∼30대 초반인 김순남·姜長一·신막·이범준 등이 음악써클을 조직하여 활동해 오다 해방이 되자 8월 16일에 악단 조직을 발의하였다. 이들과 함께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로부터 악단 조직 종용을 받은 음악인들이 함께 조직한 단체가 조선음악건설본부이다.553)박영근,<악단회고와 전망>(≪문화통신≫2-1, 통권 7호, 문화통신사, 1946), 10쪽. 조선문학건설본부처럼 조선음악건설본부도 일제강점하의 친일행위 음악인들을 모두 망라하여 조직되었다.
조선음악건설본부는 중앙서기장에 박경호, 서기장에 채동선 외에 작곡부·기악부·성악부·국악위원회 등 양악분야 세 부서와 전통음악 한 부서를 포괄한 중앙위원회를 선정하고,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 중 김성태·박경호·안기영·安炳昭·채동선·함화진 등 4개 부서 위원장과 김재훈·김순남이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의 5개 부서 중 ‘음악건설부’ 위원으로 피선되었다. 이외에도 李想春·金慈璟·鄭榮在와 이흥렬 그리고 강장일·신막·이범준 등이 여기에서 활동하였다.554)이상춘·김자경·정영재는 1945년 10월 18일 조선음악건설본부 주최 ‘미군환영음악회’ 출연자로서, 그리고 이홍렬·강장일·신막·이범준은 조선음악건설본부 조직 발의자로 이 기간에 활동하였다.
이흥렬,<나의 인생, 나의 예술>(≪예술 원보≫20, 예술원, 1976), 28쪽.
박영근,<음악개관>(≪1947년판 예술연감≫, 예술문화사, 1947). 그러나 이 조직은 해방정국의 현실 앞에서 합의와 원칙 없이 조직한 데다 친일경력, 정당이나 각종 사회정치단체에서 활동, 경제적 기반의 약세 등의 이유로 처음부터 문제점이 노출되면서, 조선음악건설본부의 ‘문화전선의 통일’ 슬로건은 막연해 질 수 밖에 없었다.
조선음악건설본부의 ‘국악위원회’는 해방 전 조선음악협회의 조선악부(산하의 조선음악단과 조선가무단)를 비롯하여 조선창극단·이왕직아악부·조선정악전습소 등의 대표들과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그리고 朴憲鳳의 노력으로 ‘국악건설본부’로 발전하였다. 8월 29일 국악회는 10월 10일 ‘국악원’으로 전환하였지만, ‘아악부(구왕궁)’와는 일부 통합한 것이었고 또한 중심인물들과 합의된 것도 아니었다.555)장사훈,<국악15년의 발자취>(≪국악개요≫, 정연사, 1961), 345쪽 참고. 더욱이 조선음악건설본부는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가 요청한 ‘문화활동의 기본적 일반정책’ 즉, ①일본 제국주의의 잔재를 소탕하고 이에 침윤된 문화반동에 대하여 투쟁 전개, ②봉건적 문화의 요소와 잔재, 특권 계급적 문화의 요소와 잔재, 반민주적 지방주의적 문화의 요소와 잔재를 청산하고 인민적 기초를 완성하기 위한 투쟁 전개, ③민족문화의 계발과 앙양, ④문화의 통일전선 형성, ⑤각 부서의 구체적 활동을 위한 논의 전개 등에 관하여 인식할 수 있는 이론이나 그 실천방안에 있어 한계를 노출시키면서,556)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서기국은 1945년 8월 31일에 조선음악건설본부 등에게 문화활동에 관한 일반정책을 정하고 구체적인 활동을 요청하였다(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문화전선≫, 1945. 11. 15 참고). 치열한 해방정국 속에서 해체되어 갔다.557)‘8월테제’는 해방공간의 음악흐름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자료이다. 조선혁명의 단계를 부르조아 민주주의의 혁명으로 규정하고 그 과업과 반동적 정치노선을 비판한 이 ‘8월테제’는 음악인을 포함하여 모든 문화단체가 결성되어 당의 지도 아래 활동함과 동시에 보조단체로서 어떻게 활동해야 할 지를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일군의 비판신진들, 김순남·강장일·신막·이범준 등은 프롤레타리아 음악운동으로 기울어졌다. 이와 달리 박경호·함화진 등은 현제명과 함께 우익 중심의 ‘임시정부 및 연합군 환영 준비회’(1945. 9. 4, 위원장 권동진)를 조직하면서 실행위원(설비부)으로 활동하였고, 채동선은 우익의 ‘국민대회 준비위원회’ 결성시(1945. 9. 7) 발기인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현제명은 반공세력이면서 친일세력이 집결한 한국민주당 발기인에 음악인으로는 유일하게 선정되어 인민공화국 타도·임정 절대지지·미군정에의 협조활동에 참가하였으며, 한민당 창당대회(1945. 9. 16) 직후 한민당 문교부위원의 한 사람으로 정당활동을 하였다.558)玄濟明은 1945년 9월 8일 한국민주당 발기인, 獨孤璇은 한국민주당 경성지부 발기인으로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리고 현제명은 9월 16일 한민당 창당대회에 고려교향악단을 첫 출연시켰으며, 9월 21∼22일의 한민당 중앙부서를 조직할 때 문교부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독고선은 1947년 1월 현제명의 미국 방문으로 고려교향악협회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韓國民主黨發起人 名簿>와<韓國民主黨京城支部發起人 名簿>참고). 이러한 환경에서 경제적 기반이 없었던 음악인이나 일군의 신진비판세대들, 그리고 교향악단의 조직을 원하는 집단들이 조선음악건설본부에서 속속 이탈하였다.559)≪1947년도 조선연감≫(조선통신사, 1946), 300쪽. 1945년 9월 15일에 두 개의 단체, 조선프롤레타리아음악동맹과 고려교향악협회(고려교향악단)이 조직되면서 조선음악건설본부는 해산의 운명을 맞는다.
음악활동도 노래운동을 제외하고는 부민관(1945. 10. 18)에서 안병소·이상춘·김자경·정영재 등이 출연한 미군환영음악회 개최가 조선음악건설본부의 유일한 음악회이었다. 이때에는 조선음악건설본부·조선프롤레타리아음악동맹·고려교향악협회 등 세 조직체가 각자의 성격을 드러내면서 전개해 갔다. 해산상태에 있던 조선음악건설본부는 더 이상 머뭇거릴 수가 없었다. 조선음악건설본부는 1945년 10월 22일 “연합군 환영준비를 위한 잠정적 기관이듯 음악건설본부는 그 취지를 달성하였음으로 해소한다”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해체되어 갔다.560)주보≪건설≫1(건설출판사, 1945. 11), 14쪽. 민족현실 앞에서 대동단결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음악건설본부는 해소성명을 발표하였고 동시에 조선음악건설본부·조선프롤레타리아음악동맹·고려교향악협회가 함께 ‘음악가단체대회’(1945. 10. 22)를 열고, 조선음악가협회를 결성함으로써 조선음악건설본부는 완전히 해체되었다.
한편, 조선음악건설본부가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일은 민족에게 일본 군가풍의 노래가 아닌 ‘해방의 노래’를 새로이 지어주는 일이었다. 이미 해방 전에 김순남은<자유의 노래>를 창작하여 준비하였다가 해방이 되자 해방가요운동을 전개하였다. 새로운 노래의 창작과 보급이라는 조선음악건설본부의 노래운동 전개는 바로 일제잔재 청산과 민족음악 건설 과제의 실천이었다.
조선음악건설본부 작곡부 위원장인 김성태의<아침해 고을시고>(林學洙 작사)와<독립행진곡>(朴泰遠), 그리고 성악부 위원장 안기영의<해방전사의 노래>(林和), 작곡부 위원 김순남의<건국행진곡>(金泰午), 역시 같은 위원인 이건우의<여명의 노래>(華岩 작사), 박은용의<충성가>(정몽주), 羅運榮의<건국의 노래>(金泰午), 이흥렬의<농군의 노래>(궁상현 작사) 등이 잇달아 창작되고, 방송이나 거리에서 노래가 보급되었으며, 이 노래들이 실린≪임시 중등음악교본≫등의 음악교과서가 각급 학교현장을 통하여 호응을 받았다.
미군정의 기본학제는 6-3-3-4제이었고, 국민학교는 음악과 체육을 한 교과목으로 주당 2시간, 중학교는 음악교과를 필수로서 주당 2시간, 고등학교는 선택교과로 3시간을 편제시키고 있었다. 음악교사들이 사범학교 본과와 부설교원양성과, 교원양성기관 등에서 배출되고 있었으나 신학제 편제에 태부족이었으며, 음악교재도 부족한 실정이었다.561)<배우려도 책없는 설움>(≪한성일보≫, 1946년 3월 4일).
<임시미봉의 교재>(≪한성일보≫, 1946년 9월 1일). 해방 이전의 전국 10개(서울·개성·청주·공주·대전·광주·대구·진주·춘천) 사범학교에 초등교사를 양성할 수 있도록 개편하였고, 1946년에는 충주·군산·목포·순천·강릉·부산 등 6개 지역에 사범학교를 증설하여 교사양성을 확충하였지만, 충원이 늦어지고 있었다. 교재도 초등은 미군정 문교부의 14종이었으나 보급이 늦어지고 있었고, 중등인 경우는 15종 이상의 음악교과서가 검인정으로 있었으나 상당 학교에서는 프린트본을 사용하고 있었다. 한편, 음악전문교육기관으로 이화여자대학 음악과·국립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음악부·숙명여자대학 음악과·조선예술원 음악과·경주예술학교 음악과·부산음악전문학교 등을 있었으며, 그 밖의 전공별로 개인연구소들이 있었다.562)이화여자대학은 1945년 4월 일제의 의하여 경성여자전문학교로 개명되었다가 해방 직후인 10월 개학예정으로 종합대학이 되어 전공학과로 음악과를 두었다. 전문부와 대학부에 각 3년 과정이었다.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음악부는 현제명이 1943년 4월에 창립한 경성 대화숙 내 경성음악연구원을 1946년 2월 9일에 경성음악학교(교장 현제명, 교무주임 김성태)로 발전시키다가 국립대학설립안에 따라 1946년 8월 22일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음악부로 발전시켰다. 초대 학부장은 현제명이었다. 숙명여자대학 음악과는 1948년에 대학체제로서 신설되고 1955년에 음악대학으로 발전하였다. 인가된 남산의 ‘조선예술원’은 1947년 4월 입학예정으로 국악과 양악전공의 음악과를 영화과·연극과·미술과·무용과와 함께 본과 3년과 연구과 2년과정으로 신설되었다. ‘경주예술학원’은 1946년 5월 5일에 경주의 바이올리니스트 李義星이 설립한 전문과정으로 성악·기악·작곡전공을 두었고, 1948년 3년제의 경주예술학교로 발전시켰지만, 1952년 정부의 폐쇄조치로 폐교되었다. 1948년 5월 사립으로 부산음악전문학교가 신설되고 김학성 교장이 주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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