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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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제1기 음악
  • 나. 조선프롤레타리아음악동맹

나. 조선프롤레타리아음악동맹

 분명한 해방의 민족이론 없이 성급히 악단을 망라하여 조직한 조선음악건설본부가 민족음악의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기도 하였지만, 이에 앞서 처음부터 현 단계에 관해 뚜렷한 역사인식을 하고 있는 일군의 신진비판세력이 조선음악건설본부와 결별하였다. 그리고 조선프롤레타리아음악동맹을 1945년 9월 15일에 결성할 것에 합의함으로써, 한국음악사에서는 처음으로 음악인에 의한 진보적 집단이 출현하였다. 이미 조선프롤레타리아음악동맹의 출현은 해방 직전부터 신막·이범준·김순남·강장일 등이 중심이 되어 지하 음악써클인 ‘聲硏會’를 조직한 데서 예고되고 있었다. 해방 직후 성연회는 조선음악건설본부를 “공중 누각적이요 특권적인 경지에서 이탈하지 못한 단체”로 규정하고, 전면에 조선프롤레타리아음악동맹을 결성하였다.

 1945년 9월 28일 서울 관훈동 임시회관에서 결성식을 가진 조선프롤레타리아음악동맹은 9월 30일에 문학·연극·미술동맹측과 함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연맹을 결성할 때 합류하여 집단 역량화를 꾀하였다. 이들 조선프롤레타리아음악동맹의 구성은 위원장에 신막, 서기장 이범준, 작곡부장 김순남, 기악부장 윤기선, 성악부장 정종길을 선임하고, 중앙집행위원으로 신막·이범준·김순남·윤기선·정종길·강장일·朴賢福·李瑚燮·김혜란·金賢淑·이건우·李康烈·鄭熙錫 등을 선임하였다. 그리고 강령은 “우리는 프롤레타리아 음악 건설을 기함과 우리는 반동적 음악에 대한 적극적 투쟁을 기함”이었다.563)조선프롤레타리아음악동맹 위원 중 신막·이범준·김순남·정종길·강장일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연맹의 중앙위원이자 중앙상임위원이었다.

 조선프롤레타리아음악동맹은 성숙한 기량의 음악가를 확보하기 위하여 동맹에 가입하지 않았더라도 유기적 관계를 맺으며, 전 조선 음악가를 민족통일전선적인 성격으로 구성하고자 하였다. 또한 고전음악연구회·향토음악연구회 등의 연구단체와 지방별·학교별·직장별 음악단체를 적극적으로 육성·지도하여 음악 대중의 확충을 꾀하고자 했다. 연극동맹과도 긴밀한 관계를 가져 각 가극단·악극단 등을 동맹의 영향하에 두고 곡과 가사들을 제공하여 비속화를 방지하고 질적 향상을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고, 음악학교·음악강습소를 개설하여 음악인을 양성하고, 공장·사업장 등에 음악써클을 두어 지도하는 문제 등을 기본방침으로 하였다.564)한효,<예술운동의 전망, 당면문제와 기본방침>(≪예술운동≫창간 12월호, 조선예술연맹, 1945), 9쪽. 그리고 조선프롤레타리아음악동맹은 최초의 지부를 인천에 두었다.565)인천지부는 원래 인천 신문화협회의 산하 음악단체로서 조선프롤레타리아음악동맹 인천지부이었다. 1945년 8월 말에 李弼商·崔星鎭·申鉉瓚 등이 중심이 되어 ‘인천음악협회’로 독립하고,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5년 9월 30일의 (羅災동포구제음악회 개최, 11월 4일 중앙의 愼幕·尹琦善·鄭熙錫 등을 심사위원으로 초청하여 전인천남녀현상음악대회를 개최하였으며, 같은 해 11월 10일 조선프롤레타리아음악동맹 인천지부로 승인을 받은 단체이다(≪문화통신≫, 문화통신사, 1946년 1월 20일).

 조선프롤레타리아음악동맹은 첫째로 프롤레타리아 음악이론을 확립하기 위해 신막과 정종길을 중심으로 비평활동을 전개하였고,566)신 막,<조선프롤레타리아음악의 역사적 맹아>(≪예술운동≫창간 12월호, 조선예술연맹, 1945), 21쪽.
정종길,<근로대중의 음악>(≪인민예술≫창간 12월호, 연문사, 1945), 17∼20쪽.
둘째로 프롤레타리아의 광범위한 지지와 중간층 획득을 위해 김순남·이건우 등의 민요적인 요소를 숙고한 노래운동과 예술제·순회공연을 개최하였으며,567)김순남의<해방의 노래>·<우리의 노래>등이 창작되어 1945년 11월 5일∼12월 24일 기간의 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국청년단체총연맹·전국농민조합총연맹·전국부녀총연맹 등 각종 집회에서 독창·제창·합창단 운영으로 보급시키면서 프롤레타리아음악운동을 펼쳤다. 셋째로 비동맹 음악가와 통일전선적인 관계를 설정하였고, 동맹원들이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연맹의 중앙위원으로 활동하거나 고려교향악단 단원 또는 각종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는 등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조선프롤레타리아음악동맹의 일부 음악인들이 프롤레타리아 음악운동을 대중화운동으로 펼치는 과정에서 정치성에 기울어 음악의 독자성과 전문적 입장을 망각하였다고 비판하기도 하였다.568)김순남,<악단 회고기>(≪백제≫2-2, 백제사, 1947), 16쪽.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연맹의 해소에 따라 조선프롤레타리아음악동맹도 해소되어 1945년 12월 23일에 결성되는 조선음악가동맹으로 흡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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