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프롤레타리아음악동맹과 고려교향악협회-고려교향악단 결성으로 타격을 입은 조선음악건설본부는 1945년 10월 22일 “연합국 환영 준비를 위한 잠정적 기관이던 조선음악건설본부는 그 취지를 달성하였으므로 해소한다”라는 성명 발표와 함께 해소한다. 이에 앞서 악단이 분열되어서는 안 된다고 인식한 고려교향악협회측의 현제명·김성태, 조선프롤레타리아음악동맹측의 신막·이준범·박영근, 조선음악건설본부측의 채동선·박태준·崔熙南·韓甲洙 등은 새로운 조직체 결성을 위한 소집 위원이 되어 기독교청년회관 강당에서 10월 22일 조선음악건설본부 해소와 함께 ‘전국음악가단체대회’를 열어 조선음악가협회를 결성시켰다. 서울시 종로구 종로 2가 19번지에 사무실을 둔 조선음악가협회는 조선음악건설본부·고려교향악단 그리고 조선프롤레타리아음악동맹 등이 중심이 된 조직체였다.
조선음악가협회의 강령은 “친선도모와 자주독립 촉성, 음악예술의 향상과 발전, 음악가의 생활향상 도모”였다. 중앙위원으로 위원장 李永世, 부위원장 신막, 상무 박영근, 위원으로 이흥렬·안병소·박태현·김성태·한갑수·최희남, 고문으로 계정식·박경호·채동선·김재훈·박태준·안기영 등이 선임되었다.576)회원은 계정식·김성태·김세형·김순애·김원복·김영애·김인수·김재훈·김형로·나운영·문학준·박경호·박영근·박은용·박태준·박태현·송진혁·신막·신재덕·안기영·안성교·안병소·유경손·이강렬·이관옥·이상춘·이순희·이영옥·이은순·이인범·이인수·이흥렬·윤락순·장보원·정정식·정희석·채동선·최희남·한갑수·한평숙·현제명 등 악단을 망라하여 조직되었다.
조선음악가협회의 결성은 음악인에 관한 실제적 관심과 자주독립에 관한 역할 등 조선음악건설본부보다 강령이 구체화되어 통일적 조직체로 보여졌다. 그러나 조선프롤레타리아음악동맹이 조선음악가동맹으로 재결성하여 해방공간 제2기부터 흔들릴 수 없는 민족음악이론과 치열한 사회 인식으로 활동하고, 고려교향악협회-고려교향악단 역시 활발한 연주활동을 독자적으로 이루자 조선음악가협회의 대동단결은 무색해 질 수밖에 없었다.
‘전재동포 세말 구제음악회’(1945. 12. 28)와 ‘신춘음악 대연주회’(1946. 1. 14), ‘3·1절 기념 야외음악회’(1946. 3. 1) 그리고 조선음악가동맹이 불참한 가운데 개최한 ‘우리 작품 발표 음악회’(1946. 6. 29∼30)를 끝으로 조선음악가협회의 존폐문제가 부각되었다.577)신춘음악 대연주회는 조선음악가협회 창립기념 연주회(2. 14∼15, 국제극장)로서 조선인민원호회와 중앙신문사 후원으로 개최되었다. 이 음악회의 출연진과 작품은 해방공간의 음악인들과 음악회 성격을 확인할 수 있는 주요 음악회였다. 1일과 2일이 약간 달랐다. 金永羲 지휘와 尹寶姬 반주의 梨花女大合唱團 출연, 李銀順 소프라노독창과 張寶媛 반주의 李建雨 작곡<黎明의 노래>와 마스카니 아리아, 李康烈 첼로독주와 金元福 반주, 李想春 테너독창과 金元福 반주의 洪蘭坡의<봉선화>와 오페라 아리아, 李仁範·崔熙南·宋鎭赫·金炯魯 등 서울男性四重唱團과 金永愛 반주로<멍텅구리 장가가네>등, 李順熙 알토독창의 외국가곡과 아리아, 鄭熙錫 바이올린독주와 金元福 반주로 金載勳 작곡<비가>외, 소프라노 韓平淑과 申載德 반주의 金順男곡의<人民의 나라>와<獨立의 아침>외 오페라 아리아, 바이올린 文學俊·비올라 安聖敎·첼로 李康烈의 서울絃樂三重奏團의 베토벤 3중주곡(작품 8), 朴殷用 테너독창과 李英玉 반주의 羅運榮 곡<건국의 노래>와 金聖泰 곡<말>외, 첼로 金仁洙와 金元福 반주의 쇼팡 작품, 알토 柳慶孫과 羅運榮 반주의 외국 작품, 소프라노 李觀玉과 鄭貞植 반주의 이태리 작품, 바이올린 朴敏鍾과 金元福 반주의 비니아프스키 작품, 愼幕 베이스독창과 張寶媛 반주의 金順男곡<勞動者의 노래>와<獨立의 아침>외 러시아민요, 바이올린 李永世와 李仁秀·비올라 尹樂淳·첼로 羅運榮의 올페우스四重奏團의 모차르트 현악4중주 제4번 등이 공연되었다(<朝鮮音樂家協會創立記念 新春音樂大演奏會>, 1946년 2월 14일·15일, 國際劇場 팸플릿 참고). 이런 와중에 1946년 8월 결성된 전국음악문화협회에 일부가 흡수되자, 모든 악단 구성원들은 조선음악가협회 존속을 희망하여 1946년 12월 2일 국악원·구왕궁아악부·고려교향악단·조선교육음악협회·음악문화협회·조선음악가동맹·서울합창단·종교음악협회·서울관현악단·올포이스4중주단·연악원·벨가토회 등이 발기인회가 되어 1947년 1월 10일에 조선음악협의회로 재조직되었다.578)≪예술통신≫, 1947년 1월 10일 및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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