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음악가동맹은 1945년 12월 13일 조선프롤레타리아음악동맹의 해소와 조선문학가동맹이 결성될 때 함께 결성되었다. 조선음악가동맹은 조선프롤레타리아음악동맹 이외에도 조선음악가협회의 일부를 흡수, 7대 강령을 발표하고 결성하였다. 조선음악가동맹은 해방공간 제2기 기간을 주도하고, 제3기부터는 비합법 단체로, 그 이후 시기는 해체되었다. 강령은 “일본 제국주의 잔재 음악의 소탕을 기함, 봉건주의적 유물 음악의 청소를 기함, 음악의 국수주의적 경향을 배격함, 악단의 반민주주의적 세력의 구축을 기함, 음악의 민족적 유산을 정당히 계승하고 외래 음악의 비판적 섭취를 함, 진보적 민주주의 민족주의 문화의 건설을 기함, 국제음악과의 교류협조를 기함”이었다. 임원은 위원장 김재훈, 부위원장 안기영, 서기장 신막, 총무부장 이범준, 조직부장 박영근, 사업부장 최창은, 작곡부장 김순남, 연주부장 정종길 등이었다.579)1947년 2월 19일 음악동맹 제2회 중앙확대위원회에서 중앙서기장이 朴榮根으로 바뀌었다(≪예술통신≫, 1947년 2월 21일). 그리고 중앙집행위원은 김재훈·안기영·신막·정종길·이범준·박영근·최창은·김순남·이건우·鄭榮模·金薰·吳昌鎭·신용팔·강장일·
河吉漢·金昌燮·朴南洙·盧光郁·李根樂·신현영·尹泰燮·韓平淑·張寶媛·崔星鎭 등이었다. 또, 조선음악가동맹은 강철수 등의 서울지부,580)서울시지부는 1947년 1월 11일 국립도서관회의실에서 결성되었다. 의장에는 최창은·박영근·김재훈·최희남·이영세 등이 선출되었고, 1월 20일 35명의 집행위원회에서 위원장 최창은·부위원장 정종길과 윤태섭·서기장 이범준을 결정하였다. 서기장은 1947년 2월 19일에 이건우로 교체되었다(≪예술통신≫, 1947년 1월 14일, 1월 23일, 2월 21일). 신형찬 등의 인천지부, 그 밖에 춘천지부·대구지부·부산지부·광주지부·대전지부 등 전국적으로 조직화되었으며, ‘음악동맹 합창단’과 윤기선·정희석·趙念·이강렬 등의 ‘음악동맹 현악4중주단’를 구성하고 활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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