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음악가동맹은 ‘8월 테제’를 발전시킨 ‘조선 민족문화 건설의 노선’에 입각하여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리고 당의 전위조직인 민주주의민족전선과 그 외곽단체로서 25개 단체가 모인 조선문화단체총연맹에 참여하여 집단역량화를 꾀하기 시작했다. 조선음악가동맹은 현 단계에 건설되어야 할 과제가 프롤레타리아 문화가 아닌 민족음악문화의 건설로 간주하여 제국주의 잔재와 봉건적 유물의 청산을 기하는 음악운동, 인민 속에서 그리고 인민을 통한 민족음악 건설의 목표, 혁명적 로맨티시즘과 진보적 리얼리즘이 바탕이 된 민족음악, 전통음악의 장점을 계승하고 외국의 진보적 문화를 비판적으로 섭취하여 민족음악 문화를 창출시키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 조선문화단체총연맹과 공동 문화전선을 펼쳤다. 특히 이의 실천을 위하여 국악원과의 제휴는 물론 아악부에서 전통 국악기를 연구했다.584)박영근,<음악개관>(민주주의민족전선,≪조선해방연보≫, 문우인서관, 1946), 376쪽. 나아가 민족 음악문화를 건설하기 위한 방향으로 조직을 정비·확대하고, 민중·민족을 위한 민족주의 음악 창출과 소통 및 비평작업을 구도화시켜 실천했다.585)이 분야의 구체적 내용은 노동은, 앞의 글(1989a), 59쪽 이후를 참고할 것. 제2기 후기 기간에는 음악의 사회로의 환원을 시도한 각종 음악 예술제 개최, 순수 실내악 운동, 문화 공작대를 통한 음악의 대중화 운동 등을 펼쳤다.
조선음악가동맹의 전 기간에 걸친 민족주의 음악 건설은 먼저 ‘노래운동’의 확대로 전개되었다. 노래가 민족의 동질성뿐 아니라 민족다움을 공동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순남의<해방의 노래>는 애국가 혁신운동의 하나였다.586)박영근,<음악계>(≪1947년판 예술연감≫, 예술문화사, 1947), 33∼34쪽.
―――,<음악개관>(같은 책), 375쪽.
박용구,<해방후의 음악계 3년>(≪민성≫4-7·8호, 고려 문화사, 1948), 48쪽.
―――,<애국가 혁신론>(≪중앙신문≫, 1946년 2월).
박은용,<애국가고>(≪동아일보≫, 1948년 10월 6일∼8일). 또,<예맹의 노래>(임화),<서반아혁명 국제의용군의 노래>(임화 역),<남조선 형제여 잊지 말아라>,<인민 항쟁가>,<반전가>(이건우),<민전 행진곡>(임화·김관균·吳章煥·金起林 합작)과 조선프롤레타리아음악동맹 기간 동안 만들어진<해방의 노래>·<건국 행진곡>·<농민가>등을 각종 대회나 집회(전국문학자대회, 전국인민위원회대표대회 등) 그리고 여러 공장·농촌·거리 등지에서 소통시켰다. 이 노래들은 1946년 5월 4일∼5일에 ‘해방가요 신작 발표회’를 통하여 소개되기도 하였는데, 해방 이후 1946년 10월까지 창작된 김순남의 50곡과 이건우의 25곡과 함께 많은 노래가 불려졌다.587)≪1947 조선연감≫(조선통신사, 1946. 12), 302쪽. 특히, 김순남의<남조선 형제여 잊지 말아라>와<인민항쟁가>가 제2기 후기 동안 전국적으로 불려졌다. 조선음악가동맹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전통음악의 장점을 계승하고 창작의 미학적 범주를 확대하기 위하여 국악원과 제휴하는 한편 아악부에서 고전악기를 연구하기도 하였다.588)박영근,<음악개관>(앞의 책), 376쪽. 한편 조선음악가동맹은 국악원 주최의 전국농악경연대회 제1회(1946. 5. 10)∼제3회까지의 농악채보에 관한 좌담회(1946. 5. 20) 등을 ‘민족음악 수립에의 결정적인 행사’로 주목하여 평가하였다(박영근,<음악계>, 앞의 책, 35쪽).
제2기 후기(1946. 8. 15∼1947. 8. 15)에 이르러 조선음악가동맹은 이론과 실천 역량을 가장 집중적으로 드러내면서 다음 세 가지 측면을 실천했다. 첫째는 예술의 밤이나 종합예술제를 개최하고 전재 동포를 구제하기 위한 음악회와 근로자를 위한 예술제라는 점에서 ‘누구를 위하여 음악을 할 것인가’라는 물음을 구체화시켰다. 두 번째는 조선음악가동맹의 일부 음악인이 ‘음악가의 집’에 참가하여 순수 실내악 음악활동을 펼쳤다. ‘음악가의 집’은 김순남·김원복·문학준·朴敏鍾 등 13명의 일본 학습 세대로 조직되어 있었다. 제1회 실내악 연주회(1946. 9. 26 배재중학교 강당), 11월의 제2회 공연을 끝으로 활동이 정지되어 있었는데 이러한 순수 실내악 운동은 1947년 1월의<연악회>의 발표회와 정부수립 이후 조직된 ‘문화의 집’에서 부활하여 실내악 운동으로 발전하였다.589)1948년의 경우 ‘문화의 집’은 음악애호구락부가 운영하고 있었다. 문화의 집은 서대문과 청정로의 자연장, 그리고 종로 2가 파고다공원 앞 백조음악감상실 등에 있었다. 제1회는 실내악의 밤(10월 24일부터 3일간 서대문 문화의 집)을 개최하고 바이올린의 文學俊·崔泳祐, 비올라의 李在玉, 첼로의 金俊德 등이 출연 연주하였다. 문화의 집 제4회의 주명곡의 밤(12월 11∼12일)에서는 바이올린 全熙奉과 피아노 李慶熙가 출연하였으며, 제7회는 신정실내악의 밤을 1949년 1월 2일부터 2일간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5중주(클라리넷 洪光銀과 文學俊 4중주단)와 베토벤의 현악4중주 작품 18번의 1을 文學俊 4중주단이 공연하였으며, 베토벤 122주기 기념연주회를 서대문 문화의 집에서 공연하였다(≪경향신문≫, 1948년 10월 22일, 11월 18일, 12월 7일, 12월 10일, 12월 31일, 1949년 3월 25일, 4월 19일). 세 번째로 조선음악가동맹은 조선문화단체총연맹과 함께 ‘문화공작대’를 조직해 활동하였다. 1947년 7월 한 달간 강장일·한평숙 등 조선음악가동맹 소속원들이 문화공작대로서 경남·강원도·충남북·경북·부산 등으로 파견되어 대부분 테러 속에서 활동하였다.
한편, 이 기간 동안 조선음악가동맹은 뚜렷한 역사관과 미학관에 의한 비평활동을 전개하였다. 김순남과 박은용이 이를 대표한다. 30대 초반의 정종길·신막·박영근도 이 분야에 큰 몫을 했다. 또한 전천후 평론가 박용구가 해방공간 전 시기에 비평활동을 하였다. 193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 비평활동을 한 金管은 해방공간에서 붓을 꺾었다가 1948년에 삶을 마감하였다. 이들과 달리 우파중도를 주도한 40대 채동선은 1947년 이후의 해방 공간 제3기와 분리 공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여 민족음악 창출에 공헌을 한 비평가였다.590)김순남은 조선프롤레타리아음악동맹이 근로대중 음악만을 계급이론화하고 정치에 가담함으로써 ‘음악의 독자성과 전문성’을 무시하였기 때문에 입지가 ‘국한’되었다고 비판하고, 동시에 ‘반성을 과제’로 삼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또한 이를 역선전하는 우익의 음악인 역시 ‘매우 깊이 반성’하여야 함을 촉구하기도 한다. 박영근은 제2기 기간 동안 대표적인 10여 편의 글에서 해방 전후의 악단상황과 조선프롤레타리아음악동맹과 조선음악가동맹의 연원, 애국가 혁신운동, 음악에서 일제 잔재와 봉건적 잔재 청산의 문제, 음악의 대중화 운동, 민족음악 수립, 연주와 교향악단, 그리고 창작 분야의 문제점 등 전 분야의 음악운동을 민중·민족주의 시각에서 역사적·미적으로 접근하여 체계화시키는 공헌 하였다(박영근,<악단의 제문제=민족음악 건설을 중심으로>, 앞의 신문, 같은 일자). 그리고 신막의<인민과 음악예술>(≪인민평론≫, 1946년 7월호)과 정종길의<교향악의 존재의의>(≪예술신문≫, 1946년 9월) 등을 제외하면 이 기간동안 이들의 비평활동은 뜸했다. 박은용은 제3기에 가서 두드러진 활동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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