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익측 인사들은 민주주의적 민족국가 이념 위에 통일민족국가 수립이라는 취지를 세우고, 단체를 결성할 준비위원을 정하였다. 그리고 전 문화예술인들을 규합하여 1946년 3월 13일에 종로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전조선문필가협회를 결성하였다. 준비위원 43명 중 음악인은 채동선과 박경호였고, 추천 음악인들은 계정식·김성태·김세형·김원복·金永羲·김재훈·박경호·박영근·박용구·박태준·안기영·안병소·李升學·이영세·李惠求·임동혁·김형철·채동선·함화진·현제명 등으로 해방 직전에 활동한 중진들이었다.
전조선문필가협회 결성 후 1946년 4월 4일 전위대격으로 金東里 등 청년 문인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청년문학가협회가 조직되었다. 조선청년문학가협회는 7개 부서 중 평론부에 임동혁이 선임되었다. 전조선문필가협회와 조선청년문학가협회는 ‘순수’를 표방하고 조선문화단체총연맹에 대응하였다.
전조선문필가협회와 조선청년문학가협회 결성 사이에 계정식(위원장)·高宗益·權元漢·김생려 등 연주가들 중심의 대한연주가협회가 1946년 3월에 조직되었다.
대한연주가협회는 결성 두 달 후 수도극장에서 ‘가극명곡과 실내악’(46. 5. 31∼6. 1)을 개최하고 전 회원이 출연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후 대한연주가협회는 조선음악가협회가 약체화를 면치 못하자 8월에 가서 전국음악문화협회로 흡수되었다.
한편, 조선음악가협회는 1946년 6월 조선음악협의회로 발돋움을 꾀하려 하였지만, 조선음악가동맹측의 ‘우리 작품 발표회’(1946. 6. 29∼30) 이후 가을부터 존폐문제가 대두되었다.591)우리 작품 발표회에 김성태·김순애·나운영·박태준·현제명·김세형·이흥렬·홍난파 등의 작품을 이강렬·김원복 등이 공연했다. 전 음악단체의 협의기관의 필요성에 공감한 악단 모두는 같은 해 12월에 조선음악협의회 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1947년 1월 10일에 ‘조선음악협의회’를 결성시켰다.592)≪예술통신≫, 1947년 1월 10·13일. 전국음악문화협회·전국교육자음악협회·전국취주악협회·국악원·음악가의 집·조선교회음악협회·서울음악단·조선음악동맹·성연회·서울합창단·올포이스 현악4중주단·우리콸텥 등의 대표자들이 참가한 가운데 결성된 이 협의회는 한국 최대의 악단조직으로 태어났다. 의장에 이영세, 상임협의원에 고려교향악단·전국음악문화협회·조선음악동맹 등이 선출되어 새로운 출발을 하였다.
대한연주가협회는 1946년 8월에 기성음악 단체를 총망라하고 조직을 개편·확대하여 전국음악문화협회로 재출발하였다. 전국음악문화협회는 이승만의 도미(1946. 11. 26)를 지원하려고 조직한 ‘민족대표 외교사절 후원회’에 박태준·박태현·채동선·이종태 등이 참가, 우익진영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현제명 지지세력과 채동선 지지세력, 그리고 조선음악가맹을 지지하는 세력 등 크게 세 지류를 이루게 되어 갈등이 깊어갔다.593)채동선의 미발표 글,<조선 악단의 운명은 어디로 가려는고>(1947년 5월 1일).
전국음악문화협회는 1946년 9월총파업과 이어 10월항쟁 이후 노동자·농민운동이 전국으로 확산하는 등 급변하는 해방정국 앞에 대응할 수 없었는 데다, 현제명이 미군정 정책에 편승하여 이탈하자 조직이 와해되어, 1947년 1월에 결성된 조선음악협의회에 흡수되었다. 여기에서 채동선의 고려음악협회가 탄생한다.
그러나 현제명 중심의 고려교향악단은 이미 이곳을 탈퇴하여 조직된 서울관현악단의 도전을 받고 있었고, 8개월간의 미국생활 끝에 귀국(1947. 9. 3)한 직후에는 이 두 악단의 ‘땅뺏기’ 결과에 따른 대립이 치열해졌다. 1948년 1월에 서울관현악단은 롤프 쟈코비(Rolph Jacobi)·김생려(대표)·金俊德·林元植 등의 지휘체제로 서울교향악단으로 발전하였다. 서울관현악단이 1947년 전조선문필가협회의 ‘국제 친선 대음악회’(1947. 2. 14) 등 산발적인 연주활동을 통하여 원무곡과 세레나데 등 대중성 있는 작품을 발표(계정식과 김준덕 지휘)해 온 것에 비한다면, 1948년 2월 28일부터 제1회 정기연주회를 갖는 서울교향악단에 이르러 비로소 본격적인 체제로 발표회를 개최하였다고 하겠다. 정기연주회 제3회(1948. 3)에서 14회(1949. 6)까지 롤프 쟈코비 지휘로 하이든·베토벤·베버·슈베르트·비제·차이코프스키 등 주로 고전주의 시대와 낭만주의 시대의 음악을 연주하는 등 교향악운동의 발판을 다졌다. 서울교향악단이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 때 경축공연에 출연하고, 고려교향악단의 제24회 연주(1948. 10. 23, 金仁洙 지휘)가 있은 지 한 달 후(1948. 11. 27) 시공관에서 ‘서울교향악단 제8회 정기연주회’를 서울대학교 예대 합창단과 金天愛·김혜란·이인범·김형로 등 300명의 출연으로 베토벤의<합창교향곡>을 쟈코비 지휘로 열자 고려교향악단은 약체화를 면할 수 없어 제26회 공연 이후 해체되었다.
한편, 고려음악협회가 채동선이 중심이 되어 1947년 2월 12일에 결성되었다. 결성되던 같은 날에 고려음악협회 등 20여 문화단체와 규합한 전국문화단체총연합도 결성되었다. 전국문화단체총연합에 가입한 음악단체는 전국음악문화협회·전국취주악연맹(1946. 1. 결성)·정악회 그리고 고려음악협회였다. 고려음악협회는 우파 중도의 성격으로 이후 독자노선을 걸어갔다. 전국문화단체총연합의 회장에는 高羲東, 부회장에 고려음악협회 회장인 채동선 그리고 朴鍾和가 선임되었다. 채동선은 전국문화단체총연합의 부회장과 ‘음악 대책위원’, 또 고려음악협회 회장으로 1947년 이후 그 역할이 커졌다. 고려음악협회는 채동선 외에도 尹龍河·박태준·박태현·이흥렬·안병소 등이 중심이 되었다.594)고려음악협회는 조선음악가동맹의 ‘비조선적 유물론’이나 ‘악계의 대표적 無節操 사대주의자인 현제명세력’을 비판하고, ‘민족자결정신하에 정통음악 예술의 연구창작 및 연주활동을 목적함’을 강령으로 출발함으로써 중도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또, 고려음악협회는 반탁을 표방함으로써 우익의 조직체와 맥을 같이하나, 제3기 기간 동안에는 미군정과 당국의 문화정책과 사대주의적 극우파를 신랄히 비판한다는 점에서 이들과 달랐다.
이로써 1947년 봄에는 민족좌파의 조선음악가동맹과 국악원, 민족우파에는 현제명 중심의 전국음악문화협회와 구왕궁아악부, 그리고 고려교향악단와 서울교향악단의 양대 관현악단, 우파 중도의 고려음악협회 등이 형성되어 활발한 음악활동이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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