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 개요〕
최씨 무신 정권이 계속되는 동안 몽고족의 침입이 있었다. 이에 고려는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면서까지 몽고의 침입에 끈질기게 저항하였다.
그러나, 강화도에서 투쟁하는 동안 최씨 무신 정권이 무너지자, 고려 정부는 개경으로 환도하게 되었다. 이에, 항몽 전쟁에 가장 용감했던 삼별초가 몽고에 반기를 들고 자주 운동을 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이 때부터 고려는 몽고의 압력을 받아 시련을 겪게 되었다. 원 세력이 약해진 공민왕 때에 북진 정책이 국내의 제반 개혁 정책과 함께 수행되었다. 그러나, 이 개혁 정치는 성공하지 못하였고, 또한 밖으로부터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을 받게 되어, 이 때부터 고려는 내외의 어려운 문제들을 안고 더욱 쇠약해졌다.
학습 문제
1. 몽고의 침입에 대한 우리 민족의 항쟁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2. 삼별초의 항몽 투쟁은 민족사에서 어떤 의의를 지닌 것일까?
3. 공민왕의 자주 개혁 운동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4.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은 고려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을까?
몽고의 침입
최씨 무신 정권이 확립되어 갈 무렵, 몽고에서는 테무친이 나타나서 나라를 세워 스스로 칭기즈칸이라 일컫고, 남송과 금에까지 세력을 뻗쳤다. 그리하여, 만주에 있던 거란의 유족들은 몽고의 압력을 받게 되어 고려로 몰려왔으나, 김취려 장군에게 쫓겨났다.
그 다음에 다시 침입한 거란족은 고려의 반격을 받아 강동성에 웅거하였다. 이 때, 고려는 몽고군의 도움을 얻어 강동성의 거란족을 소탕하였는데, 이로써 고려와 몽고는 처음으로 접촉하게 되었다.
그 후, 몽고는 거란족을 토벌한 것을 구실로 고려에 많은 물건을 요구하는 등 큰 압력을 가하였으므로, 두 나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그러던 중, 몽고의 사신이 고려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압록강 근처에서 암살된 사건이 일어났다. 일찍부터 고려에 침입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몽고는, 이 사건을 고려의 소행이라고 트집잡아, 장군 살리타를 보내어 대대적으로 침입하여 왔다(1231). 이리하여 전후 약 30년간에 걸친 몽고군과의 항쟁이 시작된 것이다.
몽고와의 항쟁
몽고군은 의주를 거쳐 개경을 포위하였는데, 미처 전쟁 준비를 하지 못했던 고려는 화평을 내세워 적을 돌려 보냈다. 몽고는 지방의 감시관으로 다루가치를 남겨 두고 물러갔다.
강화 후, 몽고는 무리한 조공을 요구하자 고려는 최후까지 몽고와 싸울 결심을 하고, 이듬해에 도읍을 강화도로 옮기고 철저한 항전 태세를 취하였다.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몽고의 침입을 다시 받게 되자, 고려는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적의 침입에 항전하였다. 부처의 힘을 빌어 이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대장경 간행을 계획, 고려 대장경판을 새기기도 하였다. 최씨 정권도 굳세게 항전하였지만, 민중의 과감한 투쟁은 참으로 놀랄 만하였다. 특히,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노비와 천민들이 용감히 싸워, 충주 등 곳곳에서 빛나는 공을 세운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전쟁이 장기화되자, 몽고는 무력으로 고려를 정복하기가 어려움을 알고, 육지로 나와 강화할 것 등을 고려에 요구하였다. 그러나, 고려는 이를 거부하였으므로 전쟁은 계속되었다.
이러는 사이에 강화도에서 정변이 일어나 김준, 유경 등이 집권자인 최의를 죽이고, 60여 년 간 계속된 최씨 정권을 넘어뜨렸다. 최씨 정권이 무너지자, 몽고와의 화해가 성립되고, 마침내 오랜 전쟁은 끝났다.
몽고와의 전쟁에서 고려는 큰 피해를 입었다. 국토는 황폐해지고 수많은 백성들이 생명을 잃었으며, 또 경주 황룡사의 9층탑과 대구 부인사에 보관된 대장경판 등 귀중한 문화재가 불타 없어졌다.
삼별초의 투쟁
강화가 성립된 후에도, 고려 정부는 강화도에서 버티고 개경으로 나가지 아니하였다.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일부 무신들은 강화에 앞장 섰던 왕과 문신 세력을 억누르면서 육지로 나가는 것을 꺼려하였다. 그러나, 최후의 무신 집권자인 임유무가 살해되자, 정부는 마침내 개경 환도를 단행하였다.
몽고와의 항전에서 가장 용감히 싸운 삼별초는 이 때 정부의 개경 환도를 몽고에 대한 굴욕적 항복이라 하여, 배중손의 지휘하에 강화도에서 반기를 들고 반몽 투쟁을 벌였다(1270). 이들은 그 근거지를 진도와 제주도에 차례로 옮기면서 한때 크게 위세를 떨쳤으나, 4년간에 걸친 완강한 저항은 여⋅몽 연합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삼별초군은 비록 그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으나, 고려 무인들의 몽고에 대한 항쟁 의식을 잘 나타내 주는 것이다.
자주성의 시련
몽고족이 세운 원 제국은, 삼별초의 항쟁이 끝난 후부터 고려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압력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원은 그들의 일본 원정에 고려가 협력하도록 강요하였다. 두 차례에 걸친 원의 일본 원정은 태풍으로 모두 실패하였지만, 이 때문에 고려가 입은 경제적, 군사적 손실은 막대한 것이었다.
원은 정동행성이라는 관청을 두어 고려의 내정에 간섭하였다. 고려의 관제도 또한 많이 개편되었는데, 중앙의 최고 정치 기관인 도병마사를 도평의사사라 고쳤고,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을 합쳐서 첨의부라 하였으며, 6부도 폐합하여 이름을 고쳤다. 또, 공식 용어도 많이 바뀌어졌고, 고려 국왕은 원의 부마가 되었으며, 영토의 일부도 잃었다.
한편, 여⋅원 문물의 교류로 고려의 궁정이나 상류 사회에서는 몽고식 의복과 몽고말이 유행하게 되어, 고려의 전통에 변화를 주기도 하였다. 반대로, 몽고에서는 고려양이라는 고려식 생활 풍속이 유행하였다.
원은 고종 때 화주(지금의 영흥)에 쌍성총관부를 두어 철령 이북의 땅을 다스렸고, 원종 때에는 서경에도 동녕부를 두어 한때 자비령 이북 지역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삼별초의 항쟁을 진압한 후에는 제주도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원 세력의 배척과 개혁 운동
원의 압력하에서 자주권을 찾으려는 노력은 충선왕 때 이미 있었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 14세기 중엽에 이르러 원이 새로 일어난 명 나라에 쫓겨 북방으로 옮기게 되자, 공민왕은 이 틈을 타서 원의 압력을 제거하고 독립 국가의 체통을 도로 찾기 위하여 과감한 개혁 운동을 벌였다. 이 운동은 밖으로는 배원 정책, 안으로는 사회의 개혁이 목적이었다.
공민왕은 먼저 원의 감독 기관인 정동행성을 없애고 친원파를 쫓아 내는 한편,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되찾고, 고려의 옛 관제를 복구하였다. 또, 몽고식 의복과 변발 등의 몽고 풍속을 금하고, 역대의 숙원인 북진 정책을 실현하기 위하여 압록강을 건너 요동에 있는 동녕부를 공격하였다. 공민왕은 또 새로 일어난 명과 가까이하려는 정책을 썼다.
한편, 공민왕은 사회의 각종 폐단을 개혁하였다. 우선, 친원 세력인 권문 세가를 누르고 정방을 폐지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또, 신돈을 등용하고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권력자들이 불법으로 차지한 많은 토지와 노비를 원주인에게 되돌려 주거나 혹은 해방시키도록 하였다.
공민왕의 이러한 개혁 정치는 민중에게서 큰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신돈의 부패와 권문 세가들의 반대로 이 개혁 운동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홍건적과 왜구
고려가 개혁 운동을 벌이고 있을 무렵, 북쪽의 홍건적과 남쪽의 왜구가 고려에 침입하여 개혁 운동에 막대한 지장을 주었다.
홍건적은 원의 지배에 반대하여 일어난 한족의 무리로, 주로 중국 북쪽 지방에서 저항 운동을 벌여 오다가 원에 쫓겨서 두 차례나 고려를 침입하였다. 홍건적의 침입으로 한때 개경이 함락되어 공민왕이 복주(안동)까지 피난하였으나, 정세운, 이방실, 이성계 등이 이들을 물리쳤다.
한편, 고종 때부터 삼남 지방의 해안을 노략질하던 왜구는 일본의 해적으로서, 공민왕 이후에는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육지에까지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소란을 피웠다.
왜구의 침입으로 해안 지대의 농토는 황폐해지고, 조세의 해상 운반이 어렵게 되어 국가 재정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에 정부는, 일본 정부와 교섭하여 왜구의 철저한 단속을 요구하는 한편, 무력으로 다스리는 방법도 취하였다. 최영, 이성계 등은 육지에서 여러 차례 왜구를 격파하였고, 최무선은 화통도감에서 만든 화포로 바다의 왜구를 크게 무찔렀다. 창왕 때 박위가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 섬을 정벌하자, 이로부터 왜구의 세력은 차차 꺾였다.
이렇게, 안으로는 공민왕의 개혁이 실패로 돌아가고, 밖으로는 홍건적과 왜구의 잦은 침입을 받게 되자, 고려는 급속도로 쇠약하게 되었다.
학습 정리
1. 유우라시아 대륙에 그 세력을 뻗치고 있던 몽고의 침입을 받아, 고려는 약 30년간에 걸쳐 줄기차게 항전을 폈다.
2. 삼별초의 대몽 항전은 고려 무인들이 자주 정신을 발휘한 것이었다.
3. 고려는 원의 압력으로 자주성의 시련을 겪게 되었으나, 기회 있을 때마다 배원 자주 운동을 폈다.
4. 안으로 공민왕 때의 개혁 운동의 실패와, 밖으로 홍건적과 왜구의 거듭된 외적의 침입으로 고려는 급속도로 쇠약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