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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절 강화(講和) 및 결론

제7절 강화(講和) 및 결론

일본(日本)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田秀吉]가 죽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대신하여 막부(幕府)가 되자 소 요토시[宗義智]로 하여금 화친을 맺기를 청하였다. 이에 선조(宣祖) 37년(1604) 갑진(甲辰)에 승려 유정(惟政)을 보내어 일본의 내부 정세를 살펴보게 하였는데, 유정이 사로잡혀 간 남녀 3천여 명을 되찾아 왔으나 화의는 오히려 맺지를 못하였다. 그 후 일본이 왕릉(王陵)을 침범한 적【임진년(壬辰年)에 성종(成宗)과 중종(中宗)의 능을 파헤쳤다.】을 잡아 보내왔으므로 이에 화의(和議)가 성사되어 여우길(呂祐吉)을 회답사(回答使)로 임명하여 일본에 보내었고, 통상 조약(通商條約)은 광해군(光海君) 원년(1609) 기유(己酉)에 정하였다.

미숙한 자가 무모하여 이이(李珥)의 양병론(養兵論)을 배척하였고, 간신(奸臣)이 당파(黨派)에 붙어서 황윤길(黃允吉)의 입구설(入寇說)을 반대하여 사직(社稷)의 보존과 멸망을 마음에 두지 않고 오직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의 당쟁(黨爭)만을 일삼다가 하루아침에 세차게 밀려드는 파도와 같은 적군의 기세가 3천리 영토를 유린하게 되었다. 이에 다급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파천(播遷)을 하고, 3경(京)이 잇따라 함락되었는데도 평소에 거침없이 큰 소리를 하던 장수와 재상들은 소문을 듣고 목숨을 건지고자 달아나 적과 싸우려는 마음이 조금도 없이 오직 이웃 나라의 구원만을 의지하다가 8년 풍진에 민생이 짓밟히고 산천이 혼란해졌으니, 만일 이순신(李舜臣)과 같은 큰 영웅과 곽재우(郭再祐)⋅조헌(趙憲) 무리와 같은 충신(忠臣)⋅의사(義士)가 초야(草野)에서 함께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국가가 다시 회복되기를 어찌 도모할 수 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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