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 한국사Ⅴ 양반 중심의 조선 사회④ 조선의 대외 정책

다. 왜구 소굴 쓰시마를 토벌하다

고려 말, 조선 초 계속되는 왜구의 활동으로 조선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세종이 즉위한 후, 곧 이종무로 하여금 왜구의 근거지인 쓰시마 섬을 토벌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왜구가 더 이상 조선의 땅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제압하였다. 그러나 쓰시마 섬에서 자급자족이 어려운 그들은 조선과의 교류를 허락해 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정부는 왜에 대해 일정한 범위의 제한적 교류를 허용하였다. 이를 위해 부산 일대의 3개 포구에서만 교류하도록 허용하였다. 식량·의복·서적과 같은 생활 용품을 일본에 수출하는 대신, 구리·황·향료와 같은 원료품이나 상류층의 생활에 필요한 물품이 일본에서 들어왔다.

일본 상인이 조선과 교역을 하기 위해서는 쓰시마 도주의 승인이 필요하였으며, 1 년에 왕래할 수 있는 배의 수도 제한하고, 교역의 양도 제한하였다. 조선 정부는 일년에 쌀과 콩 200석을 왜에 제공하는 선심도 썼다. 그러나 일본 사신은 서울에 들어오지 못하고, 동래의 왜관에서 머물러야 했다. 이러한 제한 정책에 불만을 품은 일본인은 3포 일대에서 종종 폭동을 일으켰다. 폭동이 일어나면 조선 정부는 교역의 범위를 더욱 제한하거나, 3포에서의 교역을 폐쇄하기도 하였다. 얼마간의 기간이 지나 조용해지면 다시 3포의 교류를 허용하여, 조선 전기에 일본과의 교류는 지속될 수 있었다.

당시의 세계는

정화의 남해 원정

현재 동남 아시아 각국에는 중국계 주민인 화교들이 많이 살고 있다. 싱가포르는 인구의 75% 이상이 중국계이며, 말레이시아는 25%, 인도네시아 사람들 중 상당수도 화교이다. 이들은 각국에서 상당한 수준의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다. 이처럼 화교가 동남 아시아 일대로 적극적으로 퍼져 나가게 된 계기는 명나라 때 있었던 정화의 남해 원정이다.
정화는 1403년부터 1433년까지 모두 7차례에 걸쳐 대규모의 선단을 조직하여 동남아시아와 인도에 진출하였고, 일부 함대는 아프리카 동해안까지 나아가는 등 총 30여 개 국을 원정하였다. 이를 ‘정화의 남해 원정’이라 한다.정화의 원정은 명나라의 국위를 크게 높였을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많은 이익을 가져왔다. 원정대에는 상인도 참여하여 무역의 실리를얻었으며, 이를 계기로 중국 사람들은 동남 아시아와 남쪽 바다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다. 이에 따라 중국인들의 동남 아시아 일대 진출이 활발해졌다. 이렇게 해외로 진출하여 살고 있는 중국 사람들을 화교라고 한다.
정화의 남해 원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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