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1장 개방적인 성, 혼인의 폐쇄성2. 혼인 관계의 사회화

혼인의 기능

『삼국지』 「동이전」 부여조에는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다.”라고 하여 부여 사회에 취수혼(娶嫂婚, levirate)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취수혼은 수계혼(收繼婚)·역연혼(逆緣婚)·연대혼(連帶婚) 등으로 불린다.36)

『양서(梁書)』 「고구려조」에도 취수혼에 대해 기록되어 있는데, 고국천왕의 사후 왕비인 우씨와 왕의 동생인 산상왕의 결합에서 고구려 사회에서 행해진 취수혼의 구체적인 실례를 찾을 수 있다.37) 산상왕은 고국천왕을 이어 즉위하였는데, 여기에는 형수 우씨와의 결합이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이 일은 두 사람의 결합만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고국천왕의 동생인 발기(發岐)와 연우(延優) 사이의 왕위 계승 분쟁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당시 왕위 계승 순서와 관련한 내분만 있을 뿐 형의 아내와 결혼한 사실에 대한 반발은 전혀 없었다. 이를 통해 고구려에서는 형이 죽은 후 형수와 혼인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개로왕이 아우인 곤지에게 임신한 자신의 부인을 주었다고 하여,38) 백제에도 취수혼의 풍습이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 주고 있다. 물론 형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의 취수혼과는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취수혼 사회에서는 형제들이 각각 그들의 처에 대해 이른바 성적으로 접근할 권리가 있으며, 이러한 전제가 있기 때문에 예비 배우자로서 형수와 시동생은 평소에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퉁구스 족이나 만주족은 형이 살아 있어도 동생과 형수가 성관계를 맺는 것을 암묵적으로 허용하였다.39) 백제의 곤지 사례 역시 형수를 아내로 삼을 수 있는 취수혼 사회에서 가능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취수혼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고대 유목민 사회에서는 흔히 행해지던 혼인 풍습이다. 형의 사후 그 가족과 재산에 관한 모든 권리를 동생이 이어받는 것으로, 형이 죽은 뒤 형수를 취하는 것이 권리인 동시에, 생활 능력이 부족한 과부와 그 어린 자식들을 부양해야 한다는 측면에서는 의무라고 할 수 있다.40) 다른 사회 조직과 정치 조직이 상대적으로 갖추어지지 않았던 당시 사회에서 혼인 관계는 혈연과 더불어 집단 간의 결속과 인간관계의 형성 및 유지에 가장 중요한 맥을 이룬다. 취수혼 역시 종족의 분산과 인적 자원의 상실을 방지하고 죽은 부형(父兄)의 재산 상속을 원만히 함으로써 가계를 유지하고 가족 제도를 옹호하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41)

혼인은 개인끼리의 결합이 아니라 양편의 씨족 또는 가족이 주체가 된 집단 간의 계약이다. 그러므로 혼인 당사자가 죽어도 해소되지 않으며, 과부는 망부(亡夫)의 씨족원이나 가족원과 재혼해야 하는 취수혼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취수혼제의 사회적 기반이던 친족 집단의 집단성이 점차 약화·변질되면서 부여나 고구려 사회에서 널리 행해지던 취수혼도 점차 사라져 갔다.42) 또한 소가족별로 부자 상속 제도가 정착되고 그에 결부된 윤리관을 지니고 있던 한족(漢族)이 대규모로 내주(來住)하여 중국과 접촉이 잦아지면서 그들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43)

부여·고구려·백제에는 취수혼이 있었지만 신라에서는 사료에 취수혼의 흔적이 나타나지 않는다. 단지 경문왕의 사례에서 자매가 한 남자와 혼인한 자매 연혼제(姉妹聯婚制)를 볼 수 있을 뿐이다. 구체적인 사료가 나 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신라에서 취수혼이 전혀 행해지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취수혼이 유목 사회에서 주로 행해지다가 농업 사회가 되면서 점차 사라져 갔다고 할 때, 신라의 사회 경제적 배경과 관련하여 살펴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오히려 신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근친혼(近親婚)이다. 진흥왕의 부모인 입종 갈문왕과 지소는 법흥왕의 동생과 딸이었다.44) 또한 진흥왕의 여동생인 만호부인은 진흥왕의 아들인 동륜 태자와 혼인하여 진평왕을 낳았는데, 이것은 부계로는 3촌 사이의 혼인이다.45) 진평왕의 딸인 천명부인은 진평왕의 사촌인 용춘과 혼인하여 김춘추를 낳았는데, 부계로는 5촌 사이의 혼인에 해당한다.46) 또한 태종무열왕의 딸 지소 부인은 외삼촌인 김유신과 혼인하였다.47) 이러한 근친혼은 통일 이후에도 계속 있었다. 합장을 유언했던 흥덕왕은 소성왕의 동생인데 왕비인 장화왕후는 소성왕의 딸이었다. 이로써 3촌 간의 혼인이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48)

이 밖에도 신라 왕실에서 근친혼의 사례는 흔하게 찾을 수 있다. 이에 김부식(金富軾)은 미추왕의 딸과 6촌이면서 근친 혼인을 한 내물이사금에 대해 “신라는 같은 성과 혼인할 뿐만 아니라 형제의 소생과 고종·이종 사촌 누이들까지 데려다가 아내로 삼는다. 비록 외국의 풍속이 저마다 다르다 하더라도 중국 예속으로 이를 따진다면 아주 잘못된 일이다. 흉노 풍속에 어미와 붙고 자식과 관계하는 것은 또 이보다도 심한 일이다.”라고 사론(史論)을 붙였다.49)

근친혼은 골품 체제에서 신분내혼을 유지하기 위해서 나타난 혼인 풍속이었다. 신라는 동성혼과 근친혼으로 왕권을 공고히 하고, 지배 세력으로서 지위를 지켜 나갔다. 『구당서』 「신라전」에서 “족명(族名)은 제1골과 제2골로 자연히 구별된다. 형제의 딸이나 고모·이모·종자매를 모두 아내로 맞아들일 수 있다. 왕족을 제1골이라 하는데, 아내도 그 가운데서 고르고 아들을 낳으면 모두 제1골이 된다. 또 제1골은 제2골의 딸에게 장가가지 않 는데, 간다 하더라도 언제나 잉첩(媵妾)을 삼는다.”고 하였는데, 역시 신분내혼으로써 근친혼을 보여 준다.

성골이나 진골은 김씨끼리 결혼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골품제 내에서 동성 근친혼을 탈피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왕실에 비해 6두품을 비롯한 기타 두품에 속할 경우 다른 성씨의 범위가 좀 더 넓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신분내혼의 규칙을 따른다고 해도 진골에 비해서는 이성혼(異姓婚, 족외혼)을 할 수 있었다.50) 실제 강수 부부나 소지 부부, 설씨녀와 가실 등 대부분의 사례는 근친혼이 아니었다. 근친혼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근친혼을 했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사회에서 근친혼이 가능했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근친혼이 가능하다고 해서 모두 근친혼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근친혼이 행해진 신라 왕실에서도 근친혼이 아닌 사례도 많이 있었다.

『삼국지』 「동이전」에 보면 동예에서는 같은 성씨끼리 혼인하지 않았다고 한다.51) 당시 이 지역에 오늘날과 같은 성이 있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우므로 이는 다른 혈족과 혼인하였음을 보여 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고구려 전반기에 계루부 왕실이 연나부에서 왕비를 맞아들인 일이나, 백제의 부여씨 왕실이 진씨나 해씨 왕비를 맞아들인 것 역시 다른 혈족과 혼인하였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52) 이는 어느 한 부(部)가 초월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없고, 부 체제의 운영 원리 속에서 왕족과 왕비족이 연합하던 정치적 상황과도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다.53)

고구려나 백제에서는 동성혼을 하지 않았다고 보기도 한다.54) 그러나 고구려에서는 평강공주의 아버지가 딸을 고씨 성인 귀족에게 시집보내려 했다는 사실55)에서 왕실 안에서 동성혼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동성혼과는 다르지만 의붓어머니나 형수와 혼인할 수 있는 취수혼 역시 가까운 친척끼리 혼인하였다는 점에서 근친혼의 범주에 해당할 것이다. 실제 중국에서 온 이주민이나 중국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일부에는 혹 ‘동성불혼(同姓不婚)’이 있었을 수도 있다.56)

그러나 실제 우리 고대 사료에는 ‘동성불혼’이나 ‘근친금혼(近親禁婚)’에 대한 인식이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근친혼을 금기로 여기는 사회라면 근친혼은 나타나기 어려우며, 이에 대한 강력한 규제가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삼국 사회에 근친혼에 대한 금기가 없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단지 통일신라시대에는 소성왕이 당나라에 어머니와 왕비의 책봉을 요구하면서 어머니는 신씨(申氏), 왕비는 숙씨(叔氏)로 칭하였다.57) 이들은 김신술(金神述), 김숙명(金叔明)58)의 딸로 본래 김씨이지만 동성혼을 피하기 위해 아버지의 이름자 가운데 한 글자를 따서 신(神) 자와 같은 음인 신(申)과 숙(叔)을 각기 성씨로 정한 것으로 보인다.

예전에는 왕비가 동성이어도 성을 바꾸어 당에 책봉을 요구한 사례가 없는데, 소성왕 때에 이러한 변화가 나타난 것은 신라에서도 중국의 동성금혼에 대해 의식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과의 관계에서만 신씨와 숙씨로 성을 바꾸어 칭했을 뿐, 나라 안에서는 그대로 동성인 채로 왕비 책봉을 받았다.59) 즉, 동성혼에 대한 금기까지는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일반인은 이때 성씨를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동성(同姓)이라는 개념이 형성되지 않았고, 따라서 근친혼을 피해야 한다는 관념도 없었다. 왕실에서 근친혼이 행해졌고, 귀족이나 일반인에게 근친혼에 대해 규제하지 않았다면 당시 신라 사회에서 근친혼에 대한 금기는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고대 사회에서는 다른 혈족이나 집안과 혼인을 많이 하였지만, 근친혼을 금기시하여 규제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때는 유교적 예속과는 거리가 있는 전통적인 규범이나 금기를 지켰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에는 골품제 사회에서 신분내혼의 규칙에 따라 왕실에서 근친혼이 특징으로 나타날 정도이다. 고대의 혼인은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친족 집단의 집단성이나 골품제 같은 신분제의 운영 원리가 더 크게 작용한 것이다.

[필자] 김선주
36)노태돈, 「취수혼과 친족 집단」,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1999, 169쪽.
37)『삼국사기』 권16, 고구려본기, 산상왕 즉위조.
38)『일본서기(日本書紀)』 권14, 웅략천황(雄略天皇) 5년.
39)노태돈, 앞의 책, 193쪽.
40)노태돈, 앞의 책, 169쪽.
41)이현희, 「한국 고대 여성의 사회적 특수성고(特殊性攷)-한국 여성사 체계 확립을 위한 시도-」, 『서울여대』 창간호, 1966, 58쪽.
42)노태돈, 앞의 책, 205쪽.
43)노태돈, 앞의 책, 211쪽.
44)『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진흥왕 즉위조.
45)『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진평왕 즉위조.
46)『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즉위조.
47)『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2년.
48)『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 흥덕왕 즉위조.
49)『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 내물이사금 즉위조.
50)이인철, 「신라 골품제 사회의 친족 구조」, 『정신문화연구』 제36호, 1989, 169쪽.
51)『삼국지』 권30, 위서 동이전, 예조.
52)김기흥, 「삼국시대의 족외혼과 데릴사위제」, 『역사비평』 25, 1994, 74쪽.
53)김영심, 「혼인 습속과 가족 구성 원리를 통해 본 한국 고대 사회의 여성」, 『한국고대사』 10, 2003, 326쪽.
54)이광규, 『한국 가족의 사적(史的) 연구』, 일지사, 1977.
55)『삼국사기』 권45, 열전, 온달(溫達).
56)최재석, 「한국 가족 제도사」, 『한국 문화사 대계』 Ⅳ, 고려대 출판부, 1970, 425쪽.
57)『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 애장왕 9년.
58)『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 소성왕 즉위조.
59)『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 소성왕 즉위조 및 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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