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2장 혼인의 다원성과 국제성3. 국제혼과 문화 교류

원나라와의 통혼 및 혼인 풍속의 변화

[필자] 권순형

국제혼은 원 간섭기에 들어와 한층 빈번해진다. 30년에 걸쳐 몽고와 전쟁하면서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포로로 끌려갔다. 또 경제적인 곤궁을 이기지 못해 유민으로 떠돌다 국경을 넘는 사람도 많았다. 이들은 주로 랴오양(遼陽)이나 선양(瀋陽) 지역에 모여 살기도 했지만,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몽고인의 노비로 생활하는 자도 적지 않았다. 이들 유민이나 귀화인, 포로들과 몽고인의 국제혼도 많았을 것이다. 원나라와 강화를 맺은 뒤 왕은 원나라 공주를 제1비로 맞이해야 했으며, 원나라에 공녀도 바쳐야 했다. 아울러 고려에 거주하는 원나라의 관리, 원나라 공주가 데려온 사속인(私屬人), 원나라에 숙위(宿衛)하러 간 독로화(禿魯花), 관료·승려·환관 등 양국의 인적 교류가 확대되면서 국제혼도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또 이 시기에는 원나라가 세계 대제국을 건설함에 따라 국제 무역이 한층 발달하고, 고려에 드나드는 외국 상인 수도 더욱 많아져 이들과의 혼인도 있었을 것이다. 국제 교류와 국제혼의 증가는 고려의 전통적인 혼인 풍속과 제도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필자] 권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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