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2장 조선시대의 배움과 가르침1. 성균관스승과의 관계

교관 천시 풍조

성균관 교관을 학식과 덕망을 갖춘 사람으로 임명하여 유생들을 교육하려 하였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였다. 유능한 교관이 임명되어도 곧 다른 자리로 옮겨 가는 경우가 많았으며, 유능한 교관을 다시 임용하여 줄 것을 요청하는 유생들의 상소가 거부되기도 하였다. 즉, 성균관 교관은 형식적으로만 중시되고 있었을 뿐 실제로 지배층은 교관의 학문적 자질을 의심하는 등 교관을 천시하고 있었다. 1439년(세종 21)에 의정부에서 경학에 밝은 사람을 교관으로 임명할 것을 건의하는 상소 마지막 부분에 있는 사관의 논평을 보면 당시 지배층이 교관을 어떻게 생각하였는지 잘 알 수 있다.

국가의 스승이 되는 임무를 맡은 자가 대개 가난하고 어리석은 선비이고, 학문이 얕고 고루하므로 사람들이 다 경멸하고 천하게 여겼다. 귀한 집 자제들과 권력 있는 자를 잘 섬기는 자는 비록 경학에는 정밀하고 밝다 하지만 모두 대각(臺閣)에 뛰어오르고, 오부(五部)의 교수관(敎授官) 보기를 깔보는 듯하였으므로 광대가 지목하여 교수는 관가의 놀음이라고 하니, 학식 있는 사람이나 선비들이 모두 교수관 하기를 부끄러워하였다.103)

특히, 세조는 성균관 교관을 믿지 못하고 직접 유생들을 불러 시험하여 인재를 선발하기도 하였다. 1464년(세조 10)에는 왕이 성균관 주부(主簿)였던 조간(曹幹)을 들어 말하기를 “조간은 영예(英銳)한 선비인데 그를 성균관에 두어서는 안 된다. 성균관은 썩어 빠진 유생의 숲 더미인데, 하루 동안 그곳에 두면 하루 동안 썩게 될 것이요, 열흘을 두면 열흘 동안 썩게 될 것이니 속히 교체하라.”고 할 정도였다.

이와 같이 지배층 내에서 교수관을 한직(閑職)으로 여기고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경향은 유생들이 스승을 경시하는 풍조를 낳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1473년(성종 4)에는 교관이 유생들을 회초리로 때렸는데, 몇몇 유생들이 스승에게 대들고 다른 유생들과 함께 성균관을 나가버린 일까지 있었다. 이들 유생은 스승을 능멸하였다 하여 사헌부에서 처벌하고 영원히 과거를 볼 수 없게 하였다. 스승을 업신여기거나 조롱하는 일이 자주 있었기 때문에 연산군 때에는 스승을 업신여기고 수업을 거부하는 유생은 장(杖) 100대를 때리고, 먼 지방으로 충군(充軍)한다는 내용의 글을 판에 새겨 성균관에 걸어 놓기까지 하였다.

유생들이 스승을 비방하는 시를 써서 성균관 벽에 붙여 놓아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1482년(성종 13)에는 유생들이 교관의 학문적 자질과 인간 됨됨이를 희롱하는 시를 써서 벽에 붙여 놓았던 것이다.

누가 성균관을 현관(賢關)이라고 말하였던가?

썩고 용렬한 무리가 그 벼슬을 차지하였도다.

술을 들어 입술에 대어 두 볼만 벌름거리고,

입을 벌려 유생들을 꾸짖으며 흉악한 성질만 부리네 …….104)

이 시 때문에 대사성을 비롯한 교관들이 사직을 하고, 왕은 성균관의 상재생·하재생을 모두 추국(推鞠)하여 조사하게 하였다. 한 달 이상 조사하였지만 끝내 범인을 찾아내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성균관 교관은 더욱 한직으로 여겨져 관리들이 직책을 맡기 꺼려 하였고, 성균관 교관으로 임명되면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사직하는 경우도 많았다.

[필자] 이승준
103)『세종실록』 권84, 세종 21년 2월 신해.
104)『성종실록』 권145, 세종 13년 윤 8월 병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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