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2장 조선시대의 배움과 가르침2. 향교향교의 건립과 발전

향교 건립의 목적

조선은 농상(農桑)과 흥학(興學) 두 가지를 가장 중요한 국가 정책으로 삼고 있었다. 이는 경제적으로 농업을 중심 산업으로 육성하려 하였으며, 정치·사회적으로 학교 교육을 진흥하여 유교 중심의 사회를 만들려고 한 것이다. 조선 건국 직후 태조는 즉위 교서에서 중앙에는 성균관, 지방에는 향교를 설치하여 백성을 교화하고 인재를 양성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에 따라 향교는 정책적인 지원을 받으며 수가 급증하였고,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에는 당시 전국 329개 고을에 향교가 설립되었다고 기록하여 세종 때에 이르면 전국 대부분의 군현(郡縣)에 향교가 설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의 지배층이 건국 직후부터 향교 교육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적극 지원한 것은 지배 이념인 유학을 향촌 사회에 보급하여 백성의 생활 윤리로 만들려는 목적 때문이었을 것이다.

향교는 향학(鄕學), 교궁(校宮) 등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향교는 중앙의 성균관과 마찬가지로 성현을 배향하는 문묘와 학생을 모아 교육하 는 교육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즉, 향교의 기능은 백성의 풍속을 교화하는 것과 인재를 양성하는 것 두 가지였다. 향교에서의 교육 활동은 직접적으로는 유생들이 과거에 응시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고, 간접적으로는 유교 이념을 교생(校生)들에게 가르침으로써 그것을 주변으로 확산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중앙의 성균관이 통치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관리를 양성하는 기능이 강하였다고 하면, 군현에 있던 향교는 향촌의 백성에게 유교 이념을 보급함으로써 그들을 지배 체제에 순응하도록 교화하는 기능이 강하였다고 할 수 있다.

<나주 향교 명륜당>   
향교는 성현을 배향하는 문묘와 학생들이 공부하는 강학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명륜당은 교생들이 강학하는 곳이다.

조선의 향교는 고려와는 달리 반드시 문묘를 교육 공간과 분리하여 설치함으로써 공자를 비롯한 유교의 성현에 대한 배향을 중요하게 여겼다. 또한, 향교를 중심으로 향사례(鄕射禮)를 비롯한 여러 가지 유교 행사를 실시함으로써 직·간접적으로 유교 이념을 보급하였다. 향교의 교육과 운영의 책임은 군현의 수령이 맡고 있었다. 따라서 향교는 대부분 수령이 통치하는 관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향교는 성균관이나 사학(四學)과는 달리 향촌 백성의 생활공간과 가까이 있으면서 그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영향을 주고받았다. 이러한 사실에서 향교의 기능이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 기능과 더불어 향촌의 백성을 교화하는 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조선 중기 이후에는 여러 가지 정치·사회적 요인 때문에 향교의 교육 기능은 더욱 약해지고 문묘를 지키고 제향하는 일이 향교의 중심 기능이 되어 갔다.

<이천부(利川府) 지도>   
『해동지도』 가운데 이천부를 그린 지도이다. 향교가 동헌 근처에 있는 모습을 찾을 수 있다.
[필자] 이승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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