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2장 조선시대의 배움과 가르침2. 향교향교의 건립과 발전

향교의 구조

향교는 중앙의 성균관보다 규모만 작았을 뿐 시설과 구조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향교는 크게 문묘와 학교 두 공간으로 나누어지며, 두 공간 사이에 담을 쌓아 구분하였다. 문묘는 공자를 비롯한 성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하는 곳이며, 학교는 학생이 공부하고 기숙하는 곳이었다.

문묘에는 중앙에 대성전이 있고 양쪽에 동무와 서무가 있었다. 대성전에는 공자의 위패를 중앙에 두고, 4성(四聖)인 안자·증자·자사·맹자, 공자의 수제자인 10철(十哲), 송나라 6현(六賢)의 위패를 양쪽으로 봉안하였다. 그리고 동무와 서무에는 공자의 문하 72현, 한나라·당나라·송나라의 22현,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를 모셨다. 하지만 군현의 크기에 따라 향교의 규모가 달랐기 때문에 배향하는 성현의 수도 달랐다. 구체적인 내용은 표 ‘향교의 규모에 따른 성현 배향’과 같다.107)

<표> 향교의 규모에 따른 성현 배향
구 분  행정 구역 봉안처 배향하는 성현
대설위
(大設位)
대도호부 대 성 전 공자, 4성, 10철, 송조 6현
동·서무 공문 72현, 한당 22현, 우리나라 18현
중설위
(中設位)
부 · 목 · 도호부 대 성 전 공자, 4성, 10철, 송조 6현
동·서무 우리나라 18현
소설위
(小設位)
군 · 현 대 성 전 공자, 4성, 10철, 송조 4현
동·서무 우리나라 18현

학교 공간에는 강의실인 명륜당과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있었다. 교생들은 명륜당에서 교관에게 강의를 듣고 토론하기도 하였으며, 명륜당을 교관의 거처로 쓰기도 하였다. 동재와 서재는 명륜당의 양쪽에 위치하며 학생들이 숙소로 사용하였다. 조선 후기에 양민의 입학이 늘면서 동재는 양반의 자제, 서재는 양민의 자제가 사용하여 교생들의 신분을 구별하기도 하였다.

그 밖에 향교에 들어서는 정문인 외삼문(外三門), 문묘와 학교 공간 사이에 위치한 내삼문(內三門), 향교의 관리인이 거처하는 교직사(校直舍), 자료를 보관하는 경판고(經板庫), 제례 용품을 보관하는 제기고(祭器庫) 등이 있었다. 그리고 향교 정면에는 홍살문(紅箭門)이 있었으며, 향교는 문묘가 있는 신성한 곳이기 때문에 향교를 지날 때는 누구나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하마비(下馬碑)가 있었다.

<영주 향교 하마비>   
향교는 성현을 배향하는 신성한 곳이기 때문에 그 앞을 지날 때는 누구든지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하마비가 있었다.

향교의 건물 배치는 향교가 위치한 지역의 지형적 특성에 따라 달랐다. 향교를 경사지에 세웠으면 문묘가 뒤쪽에 있고, 평지에 세웠으면 문묘가 앞쪽에 있었다. 문묘가 앞에 위치한 경우를 전묘후학(前廟後學)이라 하고, 문묘가 뒤에 위치 한 경우를 전학후묘(前學後廟)라 한다. 조선의 향교는 대부분 외삼문을 들어서면 강의실인 명륜당이 보이고 명륜당 양쪽에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있으며, 명륜당 뒤를 돌아 내삼문을 지나면 문묘 공간이 나타나는 형태로 만들었다. 건물을 이렇게 배치한 것은 향교에서 교육 공간보다 문묘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필자] 이승준
107)김호일, 『한국의 향교』, 대원사, 2000, 42∼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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