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2장 조선시대의 배움과 가르침2. 향교향교의 교관

교관의 자격

향교는 지방민의 풍속을 교화하고 인재를 양성하는 지방의 관학이었다. 따라서 국가에서는 향교에 훌륭한 교관을 파견하여 학생을 교육하려고 노력하였다. 국왕의 경연(經筵)에서는 언제나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정치의 근본임을 강조하여 교육 개혁에 관한 논의가 있었고, 그때마다 덕망과 학식을 갖춘 교관을 파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해결책으로 제시되었다. 그러면 향교에는 어떤 자격을 갖춘 교관을 파견하였을까?

조선 건국 초에 교관을 파견할 때에는 단지 ‘유교 경전에 능통하고, 나이가 있는 선비’라는 조건을 달았다. 태종 때에는 문과 합격자를 우선 향교의 교관으로 파견하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문과 합격자 수가 모든 향교에 파견하기에는 부족하였기 때문에 생원과 진사 출신도 교관으로 파견하였다. 이때에는 중앙에서 파견하는 교관으로 6품 이상의 관직에 있는 자를 교수라 하였고, 7품 이하인 자는 훈도, 생원과 진사 출신으로 교관이 된 자는 교도라고 하였다. 중앙에서 교관을 파견하지 않았던 군현에는 지방의 수령이 학장을 임명하여 향교 교육을 맡겼다. 학장은 ‘학술이 정교하고 밝으며, 스승으로 모범이 될 만한 자격을 갖춘 자’를 임명하도록 하였다.109)

향교는 중앙의 학당과 같은 수준의 지방 교육 기관이었다. 관리가 되려는 사람은 지방에서는 향교에, 중앙에서는 학당에 입학하여 공부한 뒤에 생원시나 진사시에 응시할 수 있었다. 따라서 학당과 향교의 교관은 서로 교류할 수 있었다. 1458년(세조 4)에는 남부 학당 훈도관 손차금(孫次錦)이 안동 향교 교수로 옮기기도 하였으며, 1480년(성종 11)에는 서부 학당 교수 이희철(李希哲)이 강릉 향교 교수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세종 때에는 도호부와 500호 이상의 군현에만 교관을 파견하고 나머지 군현에는 그 지방에서 학장을 독자적으로 임용하게 하였다. 이때 학장은 40세 이상 된 생원이나 생도 중에서 뽑았다. 그렇지만 생원이나 진사는 과거를 준비해야 하였기 때문에 교관이 되려는 사람이 적었으므로 대부분 유학(幼學)이 학장을 맡았다. 1418년(세종 즉위년)에 충청도 관찰사 정진(鄭津)이 “생원을 교관으로 임명하였지만 이들은 대부분 성균관 원점을 얻기 위하여 올라가 있기 때문에 실제 교관으로서 직분을 행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실제 교육은 대부분 유학(幼學)이 하기 때문에 배우는 자들이 이를 업신여겨 학업에 종사하지 않는다.”고 한 데에서 이를 잘 알 수 있다.110)

즉, 조선 초기에는 국가에서 과거 합격자를 교관으로 파견하여 교육의 질을 높이려고 하였으나 과거 합격자 가운데에서 교관으로 파견할 수 있는 사람이 적었기 때문에 생원이나 진사 출신으로 충원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중앙에서 교관을 파견하지 않았던 군현에서는 학장을 임용하여 향교 교육을 맡겼으나 이들은 대부분 유학(幼學)이었기 때문에 일부를 제외하고는 교육 효과를 거둘 수 없었던 것이다.

교관의 수준에 대한 비판은 대부분 문과 합격자가 아닌 생원이나 진사 출신으로 교관을 임명할 때 나타났다. 따라서 생원이나 진사를 교관으로 임명할 때에는 중앙은 예조, 지방은 관찰사가 책임을 지고 사서와 이경(二經)을 시험하여 합격한 자를 임용하도록 자격을 제한하였다. 또한, 1422년(세종 4)에는 이조의 건의를 수용하여 향교 교관에 대한 고찰을 강화하는 법을 제정하였다. 그래서 교수나 교도의 직을 받은 후에 부임하지 않거나 부임하더라도 여러 가지 구실을 들어 그 직을 떠나는 자는 처벌하였다. 또한, 교도의 직에 부임하여 임기 3년이 끝나면 즉시 교체하게 하고 이들 가운데에서 교육적 성과가 있는 자는 감사가 보고하여 실직(實職)에 임용할 것을 규정하였다.

이 규정이 제정되자 생원과 진사들의 교관 진출이 크게 늘었다. 이것은 어려운 관문을 뚫고 과거에 합격한다 하여도 몇 년 동안 삼관 권지(三館權知)를 지난 후에야 비로소 행정 관료로 진출할 수 있었던 당시의 정치 상황 으로 볼 때, 교관으로 3년 동안 종사한 후 행정 관료로 진출하는 것이 훨씬 지름길이었으며, 또한 이것은 보장된 직종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교관직에 대한 생원·진사들의 진출이 크게 증가하였고, 심지어 나이 어린 생원들까지도 성균관에 입학하지 않고 다투어 교도직을 구하려는 풍조가 나타났다.

이와 같은 풍조에 따라 오히려 나이가 많고 학문이 뛰어난 선비들은 교관이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기피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따라서 1423년(세종 5)에는 생원과 진사로서 교관을 파견할 때 반드시 40세 이상으로만 임용하였고, 1425년에는 생원과 진사를 교관으로 파견할 때 3년 동안 학장의 직을 지낸 후에 교도로 임명하고, 다시 3년이 지난 뒤에야 그들의 교육 성과에 따라 행정 관료로 진출하게 하였다. 이러한 제한 규정이 생겨나자 생원과 진사들은 또다시 교관으로 진출하기를 꺼려 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 규정에 따라 생원과 진사로서 교관에 임용되어 행정 관료로 진출하려면 최소 46세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생원·진사 출신들이 교관을 기피하자 교관 임용 자격을 다시 완화하게 된다. 1451년(문종 원년)에는 문과 회시에 합격한 자로서 전시에 불합격한 자는 연령에 관계없이 교관으로 임명할 수 있게 하였다. 이들은 교관으로 3년 임기를 채우면 나이가 어려도 행정 관료로 진출할 수 있었다. 따라서 나이 어린 문과 회시 합격자들의 교관 진출이 늘어나자 향교 교육에 여러 가지 문제점이 나타났다. 즉, 교관으로 부임한 뒤 교육에는 전념하지 않고 임기만 채우려 한 것이다. 결국 1452년(단종 즉위년) 집현전에서 올린 글에는 “교도가 된 자들이 모두 나이가 어려서 일을 게을리 하고 놀기만 한다.”고 하여 문과 회시 합격자도 40세 이상일 때에만 교관으로 임명하도록 건의하였다.111)

이와 같은 조치로 문과 회시 합격자들이 대부분 교관직을 기피하게 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교관의 질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더구나 1458년(세조 4)에는 소과에도 합격하지 않은 유학(幼學)들도 교관으로 임명 할 수 있게 함으로써 교관의 질은 더욱 낮아졌다. 자격이 부족한 교관이 향교에 임명되자 학식과 덕망이 있는 사람들은 교관이 되기를 기피하거나 교관으로 임명되어도 부임하지 않게 되었다. 또한, 향교의 교생들도 향교에서 공부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이에 1461년(세조 7)에는 교관으로 임명되어 3개월 이내에 부임하지 않거나 이유 없이 교관직을 거부하면 처벌하였다. 그러나 그 뒤에도 여전히 교관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처우는 열악하였기 때문에 교관의 질은 나아지지 않았다.

명종 때에는 어느 정도 글을 아는 사람이면 천민·서얼을 가리지 않고 학장으로 삼아서 교육하게 할 정도가 되었다. 선조 이후로는 대도호부 이상의 지역을 제외하고는 중앙에서 교관을 파견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군현에는 교관 파견이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교관을 파견하는 대신 제독관을 도마다 한 명씩 보내어 군현의 향교를 순회하면서 교육을 권장하게 하였다. 군현의 향교에는 수령이 그 지역에서 학식을 갖춘 자를 학장으로 임명하여 향교 교육을 담당하게 하였으므로, 수령의 관심과 지역에 따라 학장의 자격은 차이가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필자] 이승준
109)『세종실록』 권20, 세종 5년 4월 신미.
110)『세종실록』 권2, 세종 즉위년 12월 임진.
111)『단종실록』 권1, 단종 즉위년 6월 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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