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2장 조선시대의 배움과 가르침2. 향교향교 교생

교생의 자격과 신분

향교는 향촌 교화와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국가에서 군현마다 설립한 학교였다. 그러므로 국가에서는 될 수 있는 한 향교에 학생이 많이 입학하여 공부하도록 지원하였다. 향교에는 8∼10세의 어린 학생들도 입학이 가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394년(태조 3) 도평의사사에서 제주도에 교수관을 파견하도록 건의하는 글을 보면 “지방 사족(士族)의 자제 중에서 10세 이상인 자를 모두 향교에 입학시켜 공부하게 한 후에 과거를 볼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지방의 향교와 같은 수준의 교육 기관이던 중앙의 학 당에도 8∼10세 이상이면 입학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향교도 비슷한 나이의 학생이 입학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성종 때 완성된 『경국대전』에는 향교의 학생 정원을 규정하면서 16세 이하는 정원에 포함시키지 않게 하였다. 따라서 향교에 입학할 수 있는 나이는 8∼10세 정도였지만 이들은 ‘동몽(童蒙)’이라 하여 정원에 포함하지 않았으며, 실제로 향교의 정원에 포함되어 공부하는 학생들은 16세 이상이었다.112)

<유생시과(儒生試科)>   
유생들이 소과(小科)를 치르는 모습을 그린 풍속화의 밑그림이다. 학생이 공부하는 중요한 목적은 향시에 합격하여 생원이나 진사가 되는 것이었다.

학생이 향교에서 공부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향시에 응시하여 생원이나 진사가 되는 것이었고, 궁극적으로는 문과에 합격하여 관료로 진출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향교에서 공부를 마치는 구체적인 나이는 정해져 있지 않았다. 단지 40세 이상이 되면 학문을 이루거나 관료로 진출할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국가에서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향교에 서 공부하는 학생에게는 군역의 의무를 면제하여 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학문에 뜻이 없으면서도 군역을 피하기 위하여 향교에 출입하는 학생이 많아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40세 이상이 되면 향교의 학적에서 제외하고 군역에 보충하게 한 것이다.

유학(儒學)을 배우려는 자는 향교에 모두 입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향교에 입학하려면 어느 정도 글을 읽고 쓸 수 있어야 하였다. 1582년(선조 15)에 이이(李珥)가 쓴 『학교모범(學校模範)』에는 경전을 시험하여 글을 배울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향교에 입학시킨다고 하였다. 특히, 향교에서는 『소학』 교육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소학』을 어느 정도 읽을 줄 알아야 입학을 허가하였다.

향교에서 공부하는 학생은 교생, 유생(儒生), 재생(齋生), 생도(生徒) 등으로 불렀다. 향교는 국가에서 세운 관학이기 때문에 학생이 공부하는 데 필요한 경비는 국가에서 보조하여 주었다. 따라서 향교에서 공부할 수 있는 인원은 군현의 크기에 따라서 일정하게 정해져 있었다. 향교 교생의 정원은 1406년(태종 6)에 처음 정해졌는데, 유수관(留守官)은 50명, 대도호부(大都護府)와 목(牧)은 40명, 군은 30명, 현은 15명으로 책정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향교 교육의 확대를 통해 지방민의 교화를 강화하려 했기 때문에 향교의 정원을 꾸준히 늘려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다. 따라서 1471년(성종 2)에는 예조의 건의에 따라 유수관·대도호부·목에는 90명, 도호부에는 70명, 군에는 50명, 현에는 30명을 정원으로 정하였다. 태종 때에 비하여 거의 두 배 가까이 늘어난 숫자이다. 그리고 이때 정한 향교 교생의 정원은 『경국대전』에도 등재하였으며, 향교의 교육적 기능이 약화되는 조선 후기까지도 그대로 이어졌다.

[필자] 이승준
112)『증보문헌비고』 권209, 학교고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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