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2장 조선시대의 배움과 가르침2. 향교향교의 교육 활동

낙강 교생의 군역 충원

조선 후기에 교생들을 평가한 목적은 학업 장려보다는 군역을 피하기 위하여 향교에 입학한 사람들을 가려내서 군역에 충원(充員)하기 위해서였다. 조선 후기 교생 고강에 대한 규정은 1626년(인조 4)에 제정된 『군정사목(軍政事目)』에 포함되어 있었다. 서울에 있는 사학의 학생과 지방 향교의 모든 교생 그리고 학교에 들어가지 않았으면서 유생이라 칭하며 군역을 부담하지 않은 양반 자제들까지 모두 고강을 실시하여 합격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바로 군역에 충원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여러 차례의 논란 끝에 사족들까지 일반 양인과 똑같이 취급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사학의 학생과 양반 유생들은 고강에서 제외하였다. 결국 지방의 향교 교생들만 고강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교생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고강에 떨어지면 신분에 관계없이 모두 군역에 충원하려 하였으나 반대가 심하여 제대로 시행하지 못하였다. 1626년(인조 4)에 쓴 글을 보면 당시 지배층이 교생을 신분에 따라 구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사가 고강할 때 도의 풍속에 따라 스스로 등급을 나누게 하여 신분이 낮은 교생은 낙강(落講)하면 군역(軍役)에 정하고, 높은 벼슬을 한 집안의 교생은 낙강하면 단지 벌포(罰布)를 내게 하고 군역에는 정하지 말았으면 합니다.123)

고강에서 떨어진 교생 가운데에서 양인은 바로 군역에 충원하고, 사족은 군포를 내는 것으로 군역을 면제해 주자는 것이었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논의가 지속되어 1644년(인조 22)에는 고강에서 떨어지면 곧바로 군역에 충원하지 말고 우선 무학(武學)을 배우게 하고 3년이 지난 뒤에 다시 무학을 시험하여 떨어지면 군역에 충원하게 하였다. 교생들의 고강 제도는 숙종 때에 수령의 고강과 관찰사의 재심으로 실시하여 낙강하는 교생은 모두 곧바로 군역에 충원하는 것으로 결정하여 법전에 수록하고 그대로 시행하였다.

교생에 대한 고강은 관찰사가 매년 봄과 가을에 군현을 순회하면서 문관 수령 한 사람과 함께 4∼5개 군현의 향교 교생을 모아 실시하였다. 고강 과목은 사서와 『소학』 가운데 한 책과 역사서 가운데 한 책을 원하는 대로 선택하게 하였다. 시험 방법은 경서를 소리 내어 읽은 뒤에 글의 뜻을 묻고 답하는 것이었는데, 이때 두 책 가운데 하나라도 통하지 못하면 합격하지 못하였다. 숙종 때에 이르면 시험을 1년에 한 번만 시행하게 하였고, 경서와 역사서 가운데 원하는 것을 제비 뽑아 소리 내어 읽기와 해석을 보고 글의 뜻을 묻고 답하는 시험 방식으로 완화하였다. 또한, 관찰사가 순회하며 시행하던 시험을 수령이 주관하여 고강한 뒤에 관찰사에게 보고하는 방법으로 바꾸었다.

군역을 회피하기 위하여 향교에 입학한 교생들을 고강을 통해서 찾아내어 군역에 보충하려는 ‘낙강충군(落講充軍)’ 제도는 그다지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고강이 형식적으로 시행되거나 고강을 받아야 할 교생이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고강을 회피하였기 때문이다. 고강을 피하기 위하여 다른 지역으로 이사하거나, 뇌물을 주고 고강에서 빠지기도 하였으며, 다른 사람을 시켜 대신 고강을 받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더구나 관찰사가 고강을 너무 엄격하게 하여 떨어지는 사람이 많이 나오면 집단으로 몰려와 소란을 피우거나 행패를 부리기도 하였다. 1748년(영조 24)에 개성 유수였던 조재호(趙載浩)는 고강에서 떨어진 자들에게 조상의 묘를 훼손당하는 일까지 겪었다.

신이 정원 외 유생 가운데 조상의 음덕이 없는 자들을 시험하여 낙강한 자는 군역에 충원하였고, 정원 내 유생 중에서 낙강하면 교생안(校生案)에서 쫓아냈습니다. …… 저의 조상들의 묘를 지키는 노비가 묘가 손상을 입었다는 산변(山變)을 알려 왔습니다. 이는 낙강하여 교생안에서 쫓겨난 자들의 소행이었습니다.124)

조선 후기에 향교에 있는 문묘의 현판이나 위패가 부서지고 도난당하는 사건이 자주 발생한 것도 고강에서 떨어져 군역에 충원된 교생들의 소행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교생 고강이 효과를 거두지 못한 이유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면강첩(免講帖)’을 발행하였기 때문이다. 면강첩은 일정한 대가를 받고 교생이 고강을 면제 받을 수 있도록 발급하는 증명서였다. 처음에 면강첩은 향교를 수리하거나 문묘에 제향하는 데 필요한 물품을 지원하는 등의 재정적 도움을 준 교생에게 발급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에 국가의 재정이 부족해지자 그것을 보충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면강첩은 예조에서 발급한 것만을 인정하였지만, 감영이나 군현에서도 재정을 보충하기 위하여 발급하였다. 숙종 때에는 교생 고강을 강화하면서 면강첩을 단속하였는데, 이때 불법 발급받은 것으로 조사된 자가 5,238명이었다고 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면강첩을 발행하여 얻은 수입이 향교나 군현의 관청에 중요한 재정 보충 수단이었기 때문에 면강첩의 발행은 그 후에도 줄어들지 않았다. 면강첩은 1년, 10년, 종신(終身) 세 종류가 있었는데,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가격을 결정하기도 하였다. 결국 ‘낙강충군’ 제도는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향교의 교육적 기능은 더욱 약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필자] 이승준
123)『인조실록』 권14, 인조 4년 11월 경인.
124)『영조실록』 권68, 영조 24년 10월 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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