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2장 조선시대의 배움과 가르침서당

서당의 종류

당시 다른 대표적인 교육 기관이던 향교나 서원이 법적 또는 사회적 규범의 제약을 받았던 것과 달리, 서당은 있는 장소나 시기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그 유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훈장 자신이 설립한 서당이다. 훈장 자신이 생계를 위하여 서당을 열거나 집안이 넉넉한 선비가 교육을 목적으로 설립한 서당이 이러한 유형이다. 서당은 주로 훈장 집에서 운영하며, 가까운 마을을 묶어 양반촌에 하나씩 서당을 설치해 놓고 1년마다 장소를 변경하며 순회 지도를 하는 순회 서당의 형태를 띠기도 하였다.

둘째는 마을에서 살림이 넉넉한 사람이 자기 자식을 교육하기 위하여 훈장을 초청하여 일체의 경비를 혼자서 부담하는 서당이다. 대개 가까운 일가나 이웃집 아이들을 약간 모아서 가르쳤으며, 자신의 자식만 가르치는 것을 ‘독선생(獨先生)을 앉힌다.’고 하였다. 훈장을 다른 곳에서 초빙하므로 훈장이 먹고 자는 것은 서당 주인이, 그 이외의 경비는 다른 학생의 집에서 부담하는 경우도 있었다. 경비를 부담하지 않고 공부하는 것을 가리켜 ‘동냥 공부’라고 하였다.

셋째는 마을의 유지나 한 문중의 일가친척끼리 조합(組合)을 만들어 서당을 여는 형태이다. 이 경우는 조합원이나 문중 자제들만 교육하는 배타적인 성격을 띠었다. 서당의 경비를 안정적으로 마련하기 위하여 서당에 따라 계를 조직하여 자산을 모으거나, 학전(學田)이라는 명목의 토지를 구 입하여 서당 재단에 넣기도 하였다. 문중 서당의 확대형으로 여러 문중이 연립하여 세우는 서당도 있었는데, 주로 각 마을의 재능 있는 아이들을 모아서 교육하는 고급 서당의 형태가 되었다. 이 서당은 통혼권(通婚圈)이 같은 집안끼리 유대를 강화하고 학통(學統)을 계승·발전시키려는 목적도 함께 있었다.

<양동 강학당(良洞講學堂)>   
경북 경주 양동 민속 마을에 있는 서당이다. 여강 이씨(驪江李氏) 문중에서 1870년(고종 7)에 세운 공용 서당이다.

넷째는 한 마을 사람들이 합심하여 서당 경비를 공동으로 분담하고 마을 아이들은 누구나 들어가 공부할 수 있게 만든 향촌 서당이다. 주로 동계(洞契)에서 설립하였으며, 훈장은 직업적인 유랑 지식인이나 마을의 유식한 촌로 가운데서 초빙 또는 선택하였다. 이러한 향촌 조합 서당이 마을마다 많이 설립되면서 교육 혜택을 받는 사람들의 범위는 훨씬 넓어졌다.

[필자] 임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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