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4장 일제강점기의 배움과 가르침5. 여성 교육

제1차 조선 교육령기 여성 교육

일제강점기의 여성 교육은 1908년 ‘고등 여학교령’에 따라 한성 고등 여학교가 설립되면서 공식적으로 등장하였고, 1911년 조선 교육령의 ‘여자 고등 보통 학교 규칙’에 따라서 조선에 일본식 교육 체제가 법적 제도로 확립되면서 본격화되었다. 일제 여성 교육의 기본 목표는 현모양처주의(賢母良妻主義)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는 ‘조선 교육령 시행에 관한 훈령’에서 잘 나타난다.

여자 고등 보통학교는 여자에게 고등 보통 교육을 행하여 ‘부덕(婦德)을 함양’하고 생활상 유용한 지식 기능을 가르쳐 …… 교육은 여자의 천분(天分)과 생활의 실제에 비추어 수신제가(修身齊家)에 적절하도록 하고 경조부 화(輕佻浮華)의 풍(風)을 따르지 않게 한다.

<재봉 수업 모습>   
1939년 목도 공립 심상 소학교의 재봉 수업 모습이다. 일제는 여성 교육의 목표를 현모양처 육성에 두고 재봉, 가사, 수예 등의 교과목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가르친 교과목은 다양하다. 수신, 국어(일본어), 조선어와 한문, 역사, 지리, 기술, 이과(理科), 가사(家事), 습자(習字), 도화(圖畵), 재봉과 수예, 음악, 체조 등 14과목이나 된다. 전통적인 현모양처의 조건에 맞는 가사, 재봉, 수예 등을 제외하면 남성 교육과 거의 같다. 이는 일제강점기 현모양처 중심의 여성 교육이 전통적인 가치가 아닌 특정한 정치적 의도가 있었음을 말해 준다. 일제가 식민지 여성을 교육한 목적은 일본 국민 만들기였다. 여성이 동화되면 아이 또한 처음부터 일본인으로 양육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조선인 전체가 동화될 것이라는 논리였다. 이는 총독부 관리의 다음과 같은 글에서 잘 나타난다.

조선인 여자 교육은 남자 교육에 비해 뒤지지 않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경제적 융합과 사회적 융합은 식민 정책의 기본 토대가 되지만 그 가운데 에도 뒤의 것, 곧 사회 감정의 융합이 한층 더 곤란하다. 그러나 일단 성공하면 경제적 융합보다도 더 힘 있는, 사회의 근본 토대를 굳게 하는 시멘트가 된다. 이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부녀자들을 감화시키는 데서부터 들어가는 것이 지름길이다. 유럽의 선진국들이 식민지 정책 또는 종교 정책에 부녀자의 감화를 중요시하는 이유가 깊다. …… 여자가 감화하면 남자는 저절로 감화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밑의 밑에서부터 두드려 가지 않으면 통치의 근저가 진정하게 되지 않는다. 조선인의 가정을 풍화(風化)하는 것은 곧 전 사회를 풍화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하여야 비로소 우리와 저들의 감정적 융합이란 것이 영구히 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선생들도 될 수 있는 대로 일본 부녀자를 써서 학생이 학교를 나갈지라도 자유로이 가정에 출입하면서 영원히 풍화의 근원이 되도록 힘쓰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니 여자 교육의 의미도 또한 심히 중대하고 심원(深遠)한 것이다.

이러한 교육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일제는 여성이 교육에 나설 수 있게 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야만 하였다. 즉, 일제는 여성 교육이 필요 없으며, 심지어는 해가 된다는 조선의 전통 인식과 일제에 대한 적대감을 고려해야만 하였다. 이를 위해 일제는 언론을 통해 ‘가문의 영광, 여성의 덕목, 결혼의 조건’ 등을 내세우며 여성 교육, 특히 현모양처 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여성을 교육 현장에 끌어들이려 하였다.

[필자] 김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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