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상장례, 삶과 죽음의 방정식을 내면서

어쩌면 사람은 죽기 위해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죽음을 향해 달려가지만 단지 그 시기를 인지하지 못할 뿐이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죽음을 인식하는 동물이다. 죽음에 대한 인식은 곧 삶에 대한 인식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생각하게 한다. 이 같은 죽음과 삶에 대한 인식은 사생관(死生觀)이나 영혼관(靈魂觀)으로 나타난다.

죽음은 단순히 한 개인이 삶을 마감하는 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존재로서의 개인이 죽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한 개인의 죽음은 그가 속해 있는 집단의 사회 구조에 여러 가지 변화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서 사회적인 의미를 가진다. 죽은 자가 남긴 틈을 상징적으로 메우고 죽음으로 변화되는 질서를 다시 바로 세우기 위한 것이 바로 상례이다.

한마디로 죽음을 다루는 의례가 상례(喪禮)이다. 상례는 사람이 일생에서 마지막 통과하는 관문으로 죽음이라는 불가피한 현상에 따라 나타나는 습속이다. 여기에는 죽은 자에 대한 비애와 슬픔, 납관(納棺)의 유무, 집에서 시체를 반출하는 방식, 시신의 처리 및 매장법, 부장품의 매장, 상복 제도 등 제반 사항이 포함된다.

이러한 상례는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어느 시대나 보이는 민속 현상으로 그 민족의 사생관과 조령관(祖靈觀)을 나타내는 의례이다. 동시에 장기간 지속되는 관습으로 시대 민족 지역 문화에 따라 그 방법이 다양하며, 거기에는 복잡한 문화 요소가 섞여 당시 사람들의 정신생활과 사회상을 살피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따라서 본 책에서는 이러한 사생관을 통해 우리나라 사람들이 삶과 죽음을 어떻게 보았는가에 초점을 맞추었다.

제1장 ‘죽음이란 무엇인가?’와 제5장 ‘무속과 죽음’에서는 육신과 넋, 이승과 저승의 문제를 무속 신앙에서 살펴보았다. 사람이 죽으면 ‘돌아가셨다’, ‘저세상으로 가셨다’, ‘저승에 가셨다’고 한다. 돌아간 곳은 어디이며, 저세상은 어디인가? 우리는 죽으면 누구나 저승으로 가야 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승에 대해 많은 궁금증을 품어 왔다. 저승에 대한 궁금증은 인간의 최대 관심사 중 하나이며 앞으로도 영원히 풀리지 않을 일로 남을 것이다.

우리의 삶은 이승(현세), 저승(내세), 전승(태어나기 전의 전 세상)의 삼생(三生)으로 나뉜다. 특히 무속(굿)에서는 저승의 삶이 이승의 삶과 연계되고, 이승의 삶은 전승의 삶으로부터 이어져 온 것으로 여긴다. 따라서 흔히 쓰는 “전생에서 무슨 죄를 지어 이승에서 그토록 고생을 하는가?”, “저승에 가 무슨 죄를 받으려고 그리 나쁜 짓을 하는가?” 등등의 말은 우리의 생이 전생과 이승, 저승과 관계가 있음을 말해 준다.

제2장 ‘상장례의 역사와 죽음관’에서는 혼백 문제, 상장례의 어원과 역사, 시대별 사생관을 다루었다. 옛날부터 사람은 혼(魂)과 백(魄)으로 이루어졌다고 여겼다. 혼은 넋(영혼)이요, 백은 육신이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혼과 백이 분리되어,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들어간다고 믿었다. 그러나 생전의 원한이 남거나 한이 많아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이승을 떠도는 영혼은 악령 즉 귀신이 되어 산 자에게 해를 끼치는 것으로 여겼다. 또 죽은 자들을 잘 대접하고 모시지 않으면 해를 입는다고 믿었다.

이러한 경우는 무속 신앙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죽은 자를 좋은 곳으로 인도하기 위해 행하는 진오귀굿이나 씻김굿이 좋은 예이다. 굿을 통해 죽은 영혼의 원한이나 한을 풀어 주어야만 좋은 곳으로 갈 수 있고, 또 산 사람에게도 탈이 끼치지 않는다고 믿었다.

본래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상장 의례(喪葬儀禮)는 오늘날과 같은 유교식이 아닌 무속과 불교적 요소가 가미된 무불식(巫佛式) 의례였다. 하지만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 교체와 함께 유불 교체를 수반한 종교 사상적 교체는 사생관이나 영혼관을 담고 있는 상장 의례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유교식 상례는 사회 질서의 유지 명분과 교화의 수단으로 작용되어 정치·사회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절차가 너무나 복잡하고 실행하기 어려워 일상 행동에 많은 제약을 가져왔다. 하지만 조선 중·후기 『주자가례』의 이해가 심화되면서, 유교식 상례는 우리의 실정에 맞게 수정되어 오늘에 이르러 하나의 전통으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제3장 ‘유교식 상례’에서는 오늘날 일반적으로 행하고 있는 유교식 상례의 절차와 거기에 담겨 있는 의미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당사자가 아닌 남은 사람이 진행하는 상례는 다른 예에 비하여 가장 엄숙하고 정중하게 진행될 뿐만 아니라 그 변화의 폭이 적었다. 수백 년 동안 전승된 유교적 상례는 초종례(初終禮)로부터 소·대상(小·大祥)을 거쳐 담제(禫祭)에 이르기까지 19절목 60여 항목으로 나누어 실천하도록 하였다. 비록 상례의 절차가 복잡하고 행하기가 어렵지만 절차 하나하나에는 부모에 대한 효심과 생명의 존엄성이 깃들어 있다.

유교식 상례는 상주의 심정 변화에 따라 크게 초종(初終) 의식, 장송(葬送) 의식, 상제(喪祭) 의식으로 나뉜다. 첫 단계인 초종례는 숨이 끊어지면 먼저 손발을 바로 펴고 혼을 부르고 그래도 소생하지 않으면 시신을 깨끗이 씻겨 수의를 입히고 이불로 싸서 입관을 행하는 의식이다. 초종례는 갑작스러운 부모의 죽음으로 슬픔 속에서 상사(喪事)를 행하지만 다시 소생하기 를 바라는 염원이 깃들어 있다. 두 번째 단계인 장송 의식은 성복에서 안장에 이르는 단계로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잘못으로 부모가 돌아가셨다는 죄의식으로 장례에 최대한 정성을 쏟는다. 장송 의식은 입관을 마치면 상복으로 갈아입고 제물을 넉넉하게 차린 후 성복례를 치르고 다음 날 상여에 신을 싣고 장지에 안장을 한다. 세 번째 단계인 상제 의식은 시신을 묻고 혼령을 위안하기 위해 처음 지내는 우제(虞祭)부터 졸곡제, 소상, 대상, 길제(吉祭)까지를 이른다. 이는 내재화의 단계로 제사를 통해 돌아가신 부모와 서로 통교하며, 슬픔과 애통을 차차 잊고 평상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처럼 예의 대상인 사자와 예의 주체인 생자의 심정 간에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상례는 돌아가신 부모에게 충분한 애도를 표하고 지극한 정성과 공경을 드림으로써 슬픔을 차차 정화시켜 나가는 것이다. 상례 의식도 상주의 심정 정화에 따라 진행되며 완성되는 것이다.

이어서 유교식 상례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삼년상에 대해 다루었다. 공자는 삼년상은 천하의 공통된 법이기 때문에 바꿀 수 없는 것이라며 상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지켜야 할 도리라고 하였다. 삼년상이란 혼자 먹고 활동할 수 없는 젖먹이 3년 동안 온갖 정성과 사랑으로 길러 준 부모의 은혜에 대한 보답이다. 따라서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탈상 때까지 만 2년 동안 상복을 입고 술과 고기를 멀리하고, 거적을 깔고 짚 베개를 베며 부모의 은공을 생각하도록 한 것이다.

한편, 조선시대 왕실의 장례는 일반인의 장례와 크게 달랐다. 하여 왕실의 장례는 어떻게 진행되고 왕릉은 어떻게 조성하는지를 살펴보았다. 임금이나 왕비가 죽으면 국상(國喪)을 치른다. 국상은 왕과 왕후의 죽음에서 시작하여 졸곡을 마치고 삼년상을 마칠 때까지의 상례에 관한 절차를 이른다. 이는 오례의 하나인 흉례(凶禮)에서도 중심이 되는 의례로, 왕권의 계승과 왕실의 권위, 명분을 나타내기 위해 일반 사대부의 상제와 구별된다.

국상은 나라의 대사이며 왕실의 권위와도 관련되기 때문에 매우 장엄 하고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또 일시에 많은 인력과 물자의 동원을 수반하기 때문에 사회·경제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국상은 단순히 예의 범위를 넘어 유교적 정부의 표방과 통치 능력의 과시, 윤리의 강조, 긴장 조성을 통한 항거 방지 등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제4장 ‘한국의 묘제와 변천’에서는 우리나라의 각 시대 사람들의 문화적 특성과 내세관을 잘 보여 주는 무덤과 부장품에 대해 살펴보았다. 우리나라의 무덤은 기원전 6000년 전 신석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신석기인들은 구덩이를 판 다음 시신을 묻고 그 위에 잔돌과 큰 돌을 차례로 덮거나 혹은 세골장을 행하였다. 신석기인의 무덤 속에서는 사냥 도구인 화살촉을 비롯하여 낚시 도구, 토기, 송곳, 꾸미개 등이 출토되었다.

기원전 1000년경을 전후한 청동기시대에는 고인돌, 돌널무덤(石棺墓), 독무덤(甕棺墓), 움무덤(土壙墓) 등을 만들었다. 고인돌에서는 주로 민무늬토기, 붉은간토기를 비롯해 돌칼, 돌화살촉 등이 나왔다. 돌널무덤에서는 세형동검, 청동 방울, 토기류, 대롱옥을 비롯한 장신구류 등이 출토되었다.

고분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는 시기는 삼국시대이다. 고구려의 무덤은 도읍지인 퉁구 지방을 중심으로 한 압록강 유역과 평양 지방을 중심으로 한 대동강 유역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었다. 고구려인들은 외형상으로 돌만으로 무덤을 만든 돌무지무덤(積石塚)과 안은 돌로 축조하고 외부는 흙으로 쌓은 돌방무덤(封土石室墳)을 만들었다. 특히 돌방무덤 내부에는 벽화를 그려 고구려인들의 삶과 내세관을 나타냈다.

백제의 무덤은 구조 형태에 따라 가장 보편적인 움무덤을 비롯하여 독무덤, 돌무지무덤, 돌방무덤, 벽돌무덤, 화장묘 등으로 나뉜다. 돌무지무덤은 한강 유역 석촌동 일대에 분포하고 있으며 고구려로부터 전래되었다. 특히 벽돌무덤은 공주 지역에서만 발견되는데, 무령왕릉이 대표적이다.

신라인들은 국가의 성장 과정에 따라 땅을 파고 묻는 움무덤과 지상 혹은 지하에 목곽을 설치하고 그 주위와 상부를 돌로 쌓은 후 점토 등으로 봉 분을 만든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墓) 등을 만들었다. 경주 시내 곳곳에 산처럼 솟아 있는 무덤들은 돌무지덧널무덤으로 화려한 금관이나 장신구 등을 부장하였다. 이 무덤들은 5세기경에 만들어졌으며, 규모도 엄청나 황남 대총은 높이가 50m이고 직경이 120m나 된다. 통일 신라 이후에는 돌무지덧널무덤 대신 돌방무덤을 축조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의 무덤은 왕릉, 귀족 및 상류층의 분묘, 일반인의 무덤으로 나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왕실과 상류층은 돌방무덤을 썼고, 하급 관리는 작은 돌널이나 돌덧널무덤을 만들었으며, 일반인은 지하에 구덩이를 파고 목관을 묻는 움무덤이나 간단한 돌덧널무덤을 사용하였다. 한편 불교가 크게 성행하면서 상류층에서는 화장을 한 후 뼈만 묻는 석관묘를 많이 썼다.

조선시대의 무덤은 능(陵), 원(園), 묘(墓)로 나뉘는 왕실의 무덤과 일반인의 무덤인 묘(墓) 등이 있다. 왕릉은 왕과 왕비의 무덤이고, 원은 왕세자와 그의 비의 무덤이며, 대군, 군, 공주, 옹주, 후궁, 귀인 등의 무덤은 묘라 하여 위계에 따라 명칭을 구분하였다. 사대부를 비롯한 일반인은 구덩이를 파고 관 채 혹은 관을 빼고 시신만을 안치하는 토광묘를 썼다.

조선의 왕릉은 처음에 고려의 묘제를 따라 무덤 내부를 석실로 하였으나 세조의 유언으로 광릉 이후부터는 석실 대신 광중의 네 면과 위를 석회와 흙, 모래를 섞어 다진 회격묘(灰隔墓)로 축조하기 시작하였다. 석실묘에서 회격묘로의 변천은 광중에 묻는 부장품의 수를 줄이고 무덤 조영에 드는 비용과 노동력을 절감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무덤의 모양도 고려의 사각분에서 원분(圓墳)으로 형태가 바뀐다.

2005년 8월

국립 춘천 박물관 관장

[필자] 정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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