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1장 전통 연희의 전반적 성격3. 전통 연희의 역사적 전개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는 나례, 중국 사신 영접 행사, 문희연, 수륙재, 우란분재, 관아 행사, 읍치 제의(邑治祭儀), 동제, 사대부가의 잔치 때 연희를 공연했고, 조선 후기에는 다양한 유랑 예인 집단이 민간에서 연희를 공연하고 다녔다. 이 밖에도 임금이 선왕의 위패를 종묘에 모시는 부묘(祔廟)를 마치고 궁중으로 돌아올 때, 임금이 종묘에서 제사 지낼 때, 공자 등 유학의 성인을 모신 문묘를 참배할 때, 왕의 각종 행차 시, 왕자와 공주의 태를 태봉(胎峰) 에 묻을 때, 정월 대보름에 궁중에서 농사의 풍작을 기원하기 위해 행하는 일종의 모의 농경 의례인 내농작(內農作)을 거행할 때, 지방관을 환영할 때에도 연희를 연행하였다. 그 연희의 명칭은 나희, 나례, 나, 산대나례, 채붕나례, 잡희, 백희, 가무백희, 산대희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되었지만, 대부분 산악·백희에 해당하는 종목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국가적 행사인 나례, 중국 사신 영접 행사, 궁정 중심의 각종 행사가 크게 위축되거나 소멸되었다. 반면에 국가 행사와 궁정 행사에 동원되던 연희자가 민간에 퍼져 공연 활동을 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 후기의 연희 문화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우선 기존의 연희를 바탕으로 혁신적으로 재창조한 본산대놀이 가면극, 판소리, 꼭두각시놀이 등 새로운 연극적 갈래가 성립되었다. 그리고 민간을 떠돌면서 연희를 공연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유랑 예인 집단이 생겨났다.

조선시대에 전통 연희를 담당했던 연희자는 세습무계(世襲巫系)의 무부(巫夫)이면서 재인청에 소속되었던 재인(才人), 북방인 계통의 수척(水尺)과 반인(泮人), 재승(才僧) 계통의 승려, 사장(社長), 사당, 남사당, 조선 후기의 유랑 예인 집단 등이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조선시대의 백정은 그 이전의 재인과 화척을 합해 통칭한 것이고, 이들은 고려시대 양수척의 후예로서 재인, 화척, 달단이라고도 불렸던 것으로 나타난다.26) 성균관의 노비였던 반인은 소를 도살하고 유통하는 일에 종사했을 뿐만 아니라, 나례와 중국 사신 영접 시에 산붕을 설치하고 공연했으며, 본산대놀이 가면극을 전승하였다. 북방인 가운데 노비가 많았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반인들 중에도 양수척, 수척, 화척, 재인, 달단, 백정, 신백정(新白丁), 재백정(才白丁), 화백정(禾白丁), 고리백정, 고리재인 등으로 불렸던 북방인의 후예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반인은 성균관에 소속된 노비로서 문묘를 지키고 유생 부양에 필요한 잡무를 처리하였다. 이들 중 일부는 북방인의 후예였는데, 나례와 중국 사 신을 영접할 때에 연희자로 동원되어 다양한 연희를 펼쳤다. 특히 서울 근교에서 전승되던 가면극인 산대놀이의 연희자가 바로 반인이었다.

백정·수척 등 북방인의 후예와 함께 조선시대의 중요한 연희 집단은 재인청(才人廳)에 소속되어 있던 재인이다. 재인청의 재인은 흔히 광대라고도 불렸는데, 한강 이남의 세습무권(世襲巫圈)에서는 대부분 무계(巫系) 출신의 무부들이었다.

조선시대의 재승은 이미 신라의 원효에서부터 시작하여 고려를 거쳐 조선 전기까지도 전승되었던 무애희의 담당층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세종 때까지도 무애라는 도구를 가지고 연희하는 무애희가 직접 승려들에 의해 전승되었다.27) 또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 나오는 재승 동윤(洞允)은 송아지나 닭 소리를 흉내냄으로써 뭇 소와 닭들이 울게 할 정도로 짐승의 소리를 잘 흉내냈는데, 이러한 동물 소리 흉내내기도 우희에 속한다.

조선 후기에는 남사당패·사당패·대광대패·솟대쟁이패·초라니패·풍각쟁이패·광대패·걸립패·중매구·굿중패 등 다양한 명칭의 유랑 예인 집단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조선시대의 나례에서도 각종 연희가 연행되었다. 성현이 나례에서 연행된 연희를 보고 지은 한시 「관나희」는 나례에서 방울받기·줄타기·인형극·솟대타기 등이 연행되었음을 전해 준다.

조선시대의 나례에서는 우희가 매우 중요한 공연 종목이었다. 조선시대 우희의 공연은 궁중의 진풍정(進豊呈), 세시의 나례, 중국 사신 영접 행사, 문희연(聞喜宴) 등에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나타난다.

우희의 내용은 실제로 있었던 일을 소재로 하였는데, 부패한 관원을 비판한 탐관오리 풍자, 민간의 시사 풍자, 임금에게 정치의 득실이나 풍속의 미악을 깨우치게 하는 풍간(諷諫) 등을 주로 다루었다.

유득공(柳得恭, 1749∼1807)의 『경도잡지(京都雜志)』에서는 나례도감에 속한 연희로 산희(山戲)와 야희(野戲)를 소개하고 있다.28) 산희는 가설 무대 위에서 공연하는 인형극이거나, 산대를 만들고 그 위에서 잡상(雜像)을 놀리는 산대잡상 놀이이거나, 소형 산대인 산붕 앞에서 공연하는 사자춤·호랑이춤·만석중춤일 것이다.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의 낙성연도에는 채붕 앞에서 가짜 사자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춤을 추고 있다. 바로 이러한 형태의 연희를 산희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야희의 소매와 당녀는 현존 가면극에도 등장하는 배역이다.

결국 한국·중국·일본 모두 전문 연희자가 놀던 가면극은 산악·백희 계통의 연희를 담당했던 연희자가 성립시킨 것이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사실은 한국·중국·일본 모두 산악·백희라는 공통된 연희 문화를 기반으로 연희자가 각각 본산대놀이·나희(儺戲)·노(能)라는 가면극을 성립시켰지만, 이 가면극을 만들어 낼 때 기존의 산악·백희 계통 연희를 발전시켜 각국의 문화적 정서에 맞게 환골탈태하고, 각국의 사회상과 시대상을 반영하여 완전히 새로운 공연물로 재창조했다는 점이다.

『문종실록』에는 중국의 사신을 영접할 때 채붕을 설치하는 것에 대한 논란이 보인다.29) 이 기록에 따르면, 광대와 서인은 주질(줄질, 줄타기), 농령(방울받기), 근두(땅재주) 등 규식이 있는 연희를 담당하였다. 수척과 승광대는 웃고 희학하는 연희, 즉 우희를 담당하였다.

성현의 「관괴뢰잡희」는 중국 사신 영접 행사에서 땅재주(또는 솟대타기), 줄타기, 방울받기, 인형극 등의 연희가 연행되었음을 전해 준다. 1488년 3월 조선에 사신으로 왔던 명나라의 동월이 지은 『조선부』에 따르면, 중국 사신을 영접할 때 평양·황주와 서울의 광화문에서 산대를 가설하고 백희를 공연하였다. 백희의 내용은 만연어룡지희, 무동, 땅재주, 솟대타기, 각종 동물춤 등이었다.

산대에는 대산대(大山臺)·예산대(曳山臺)·다정산대(茶亭山臺) 등 여러 종류가 있었다. 『조선부』에서 “광화문 밖에 동서로 오산(鰲山)의 두 자리가 벌어져 있는데, 높이가 광화문과 같고 극히 교묘하다.”는 내용은 광화문 밖의 좌우에 각각 커다란 대산대를 설치한 것을 가리킨다. 산대의 형태가 오산, 즉 봉래산처럼 생겼기 때문에 산대를 오산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고려 말에 이색이 한시 「동대문에서 대궐 문 앞까지의 산대잡극은 전에 보지 못하던 바라」에서 “산대를 얽어맨 것이 봉래산 같고”라고30) 표현한 것처럼 산대는 실제로 봉래산 모양으로 만들었다. 『중종실록』에서는 동일한 무대 구조물을 지칭하면서 산대와 오산이라는 용어를 함께 사용하고 있다.31) 산대는 신선의 거처인 오산(봉래산)으로 선산(仙山)의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산봉우리·나무·꽃·신선 등 많은 잡상을 설치하였다.

<봉사도 제7폭>   
청나라 사신 아극돈(阿克敦)이 조선의 사신 영접 행사 장면을 담아 1725년에 그린 봉사도(奉使圖) 20폭 가운데 제7폭이다. 모화관 마당에서 사신을 위해 공연한 연희를 묘사하고 있는데, 대접돌리기, 물구나무서기, 탈춤, 줄타기 등이 보이고, 오른쪽에는 소규모 산대가 보인다.

최근에 중국 사신 영접 행사의 연희 장면을 전해 주는 아극돈(阿克敦, 1685∼1756)의 봉사도(奉使圖, 1725)가 발견되었다. 이 중 제7폭은 모화관(慕華館) 마당에서 사신을 위해 공연한 대접돌리기, 물구나무서기, 줄타기, 탈춤을 묘사하고 있다. 마당의 오른쪽에는 산거(山車)·윤거(輪車)·예산대·예산붕(曳山棚)·헌가산대(軒架山臺) 등으로도 불리던 소규모의 산대가 보인다. 그리고 제11폭에는 솟대타기를 하는 연희자도 묘사되어 있다.

조선 전기에는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영접 행사가 매우 성대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여러 사정으로 중국 사신 영접 행사가 간소해졌다. 나례도감은 좌변과 우변의 둘로 나뉘어 있었다. 좌변나례도감인 의금부와 우변나례도감인 군기시(軍器寺)는 많은 수군을 동원해 광화문 밖에 각각 좌산대(左山臺)와 우산대(右山臺)를 만들고, 잡상도 좌변나례도감(좌변 나례청)과 우변나례도감(우변 나례청)을 별도로 만들었으며, 장인과 재인도 각각 좌변나례도감(좌변 산대)과 우변나례도감(우변 산대)에 나뉘어 소속되었다.

그런데 이 인형 잡상은 단순한 진열물이 아니라 기계 장치에 의해 움직 이는 잡상놀이일 가능성이 크다. 기계 장치에 의해 움직이는 잡상놀이는 일본의 산거와 중국 오산에서도 발견된다.

문희연은 사대부가의 과거 급제 축하 잔치를 말한다. 조선시대의 과거 제도와 관련된 행사로는 은영연(恩榮宴), 유가(遊街), 영친의(榮親儀), 홍패고사(紅牌告祀), 소분(掃墳), 문희연 등이 있었다.

<알성시은영연도(謁聖試恩榮宴圖)>   
1580년(선조 13)에 알성시에 급제한 사람에게 베푼 은영연을 묘사한 그림이다. 문무과 급제자가 앉아 있는 사이의 공간에서 연희자들이 접시돌리기, 방울받기, 땅재주 등을 펼치고 있다.

중앙에서 과거 급제자의 명단을 공표하는 방방 의식(放榜儀式)이 행해지면, 의정부에서는 급제자를 위해 은영연이라는 잔치를 베풀었다. 1580년(선조 13)에 행해진 은영연을 묘사한 그림에서 접시돌리기, 방울받기, 땅재주 등의 연희를 공연하는 연희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현재 이 그림은 일본의 요메이(陽明) 문고에 소장되어 있는데, 당시 임금이 성균관을 방문하여 별시의 하나인 알성시(謁聖試)를 행한 후 의정부에서 급제자들에게 베풀어 준 은영연을 그린 것이다.

과거 급제자는 세악수(細樂手, 삼현육각)·광대·재인을 대동하고 서울 시가를 사흘 동안 돌아다녔는데, 이를 삼일유가라고 한다. 삼일유가 후에는 홍패고사, 조상의 묘에 참배하는 소분, 부모에게 알리는 문희연 등을 행하였다.

<삼일유가>   
김홍도가 그린 모당(慕堂) 홍이상(洪履祥)의 평생도(平生圖) 중 삼일유가 부분이다. 삼현육각과 부채를 든 무동, 광대 등이 과거 급제자를 앞서 가고 있다.

송만재(宋晩載, 1788∼1851)의 「관우희」는 문희연에서의 여러 연희를 가장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시에 따르면 문희연에서는 재인이 산붕(山棚)도 설치하고 영산회상(靈山會相), 가곡, 십이가사, 어룡만연지희, 불 토해 내기, 포구락, 사자무, 처용무, 요요기, 판소리 단가, 판소리, 땅재주, 검무, 줄타기, 솟대타기, 홍패고사 등을 연행하였다.

<동도문희연도(東都聞喜宴圖)>   
1526년(중종 21)에 동도에서 벼슬하고 있던 김양진(金楊震, 1467∼1535)에게 맏아들 김의정(金義貞)이 별시 문과에 급제한 다음 휴가를 얻어 인사드리러 오자 김양진이 베푼 과거 급제 잔치를 묘사한 그림이다. 건물 안에 김양진을 비롯한 하객들이 앉아 있고, 그 아래에 어사화(御賜花)를 꽂은 김의정이 허리 굽혀 인사하고 있다.

문희연에서 반드시 연행되던 유희는 우희의 일종이다. 선비를 풍자하고 유가(儒家)를 희롱하는 내용의 유희는 유학의 경전을 자주 인용하였다. 『성호사설』에 언급된 유희를 보면, 과거 급제자의 집에서 벌이는 축하 잔치인 문희연에서 창우가 유자(儒者)를 조롱거리로 삼아 연행하는 유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32)

이이명(李頤命, 1658∼1722)의 『소재집(疎齋集)』과 조선 영조 때의 무신 구수훈(具樹勳)의 『이순록(二旬錄)』에는 박남이라는 판소리 광대가 문희연에서 유희도 연행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새 감사가 부임할 때의 연희 공연은 이미 세종 이전부터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33) 허균(許筠, 1569∼1618)은 1601년 큰형 허성(許筬)이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을 때 전주의 연희패가 펼친 천오(天吳, 바다귀신춤), 상학(翔鶴, 학춤), 쌍간(雙竿, 쌍줄타기 또는 솟대타기), 희환(戲丸, 방울받기), 대면(大面, 가면희), 귀검(鬼臉, 귀신 가면) 등을 기록하였다.34) 또한 이보다 24일 앞서 전주에 갔었던 허균은 그때 관찰사와 함께 솟대타기, 줄타기, 높이뛰기 등의 연희를 보았다.

<부벽루연회도>   
김홍도가 그린 평안감사향연도 중 부벽루연회도다. 평안 감사가 부벽루 안에 앉아 마당에서 평양 감영의 관기들이 삼현육각 반주로 오방처용무, 포구락, 헌선도, 쌍검무, 무고를 추는 것을 감상하고 있다. 비록 규모는 작으나 궁중 연회와 거의 다름없는 화려한 공연이 벌어지고 있다. 함께 그린 춤들은 연회의 순서에 따라 하나씩 공연된 것을 기록을 위하여 한꺼번에 그린 것이다.

임진왜란 이전부터 지방의 관기들이 궁중 행사에 참여하였다가 귀향했는데, 그들의 귀향이 궁중 정재가 지방으로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다. 허봉이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1574년(선조 7)에 명나라에 다녀와 기록한 『조천기(朝天記)』에는 평양에서 본 포구락·향발·무동·무고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단원 김홍도의 평안감사향연도 가운데 부벽루연회도에 묘사된 무고·포구락·검무·오방처용무, 연광정연회도에 묘사된 학무·연화대·선유락 등도 궁중 정재가 지방에서 연행된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한편 1796년(정조 20) 10월 16일에 화성(華城) 성역의 완성을 축하하는 잔치인 낙성연이 화성 행궁(行宮)의 낙남헌(洛南軒)에서 벌어졌는데, 『화성 성역의궤』의 낙성연도에 이때의 연희와 채붕이 묘사되어 있다.

낙남헌은 각종 행사를 진행할 수 있도록 공간을 알맞게 배치한 행사용 건물이다. 이 건물은 낙성연에서 전통 연희의 연행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낙성연도에는 상단의 낙남헌 대청으로부터 임시로 가설된 보계(補階, 마루 따위를 넓게 쓰기 위하여 대청마루 앞에 임시로 좌판을 잇대어 깐 덧마루), 그리고 마당으로 이어지는 구도 속에 보계 위와 마당에서의 전통 연희 공연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보계 위에서는 무고(舞鼓) 공연이 벌어지고 있고, 상단 좌우에 포구락에 쓰이는 포구문(抛毬門)이 자리하고 있다. 중앙에는 악기 연주자가 자리 잡고 있는데, 그 앞으로 연화대에 쓰이는 지당판(池塘板)이 있다. 이러한 무고·포구락·연화대는 궁중 정재에 해당하는 연희다.

<낙성연도의 채붕>   
『원행을묘정리의궤』의 낙성연도에 보이는 채붕을 옮겨 그린 것이다. 사자춤과 호랑이춤이 연행되고 있는 뒤에 같은 크기와 형태로 설치된 구조물 두 개가 채붕이다. 가설 누각의 형태로 솔가지 장식을 하였고, 비단 천을 두르고 있다. 주위의 사람들이 채붕 안쪽을 가리키거나 들여다보고 있어 채붕의 안에도 여러 가지 장식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낙남헌 앞마당에서는 사자춤과 호랑이춤이 연행되고 있으며, 그 뒤로 두 개의 구조물이 있다. 『화성성역의궤』의 낙성연도와 관련된 기사에 “약간 떨어지고 널찍한 곳에 채붕을 설치하고 다양한 놀이를 베풀어 상하가 모두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하기 바랍니다.”라는35)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이 두 구조물이 채붕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붕(棚)의 구조로 이루어진 장식된 가설 누각의 형태’, ‘같은 크기와 형태로 두 개가 설치되어 있다는 점’, ‘솔가지 장식’, ‘채붕 주변에 두른 비단 천’, ‘솔가지와 꽃 모양의 장식물로 얽힌 기둥’ 등의 특징을 종합해 보았을 때도 이 구조물은 채붕이다.

좌우로 두 개를 설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산대와 채붕은 이 그림에서도 채붕이 두 개가 있다. 채붕 주위의 사람들이 채붕의 안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거나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으로 보아 짐작하건대 이 채붕의 안에도 여러 가지 장식을 했을 것이다. 『고려사』 「최충헌전」에서 묘사하고 있듯이 이미 고려시대부터 채붕 안에는 비단과 채색 비단 꽃으로 장식된 그네를 매거나, 은과 자개로 장식한 큰 분(盆) 네 개를 놓고 거기에다가 얼음산을 만들거나, 또 큰 통 네 개에다가 십여 종의 이름난 생화를 꽂아 놓는 등 여러 장식을 하여 보는 사람의 눈을 황홀하게 만들었다.36)

우리의 전통 연희는 주변 여러 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독자성과 우수성을 갖추어 왔다. 우리는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외래 연희를 수용하여 연희 문화를 풍부하게 영위하면서 우리의 취향에 맞게 개작하여 한국화하고, 나아가 새로운 연희 문화를 창출해 왔다. 새로운 연희 문화를 성립시킬 수 있었던 뿌리는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예의 무천과 같은 제천 의식이나 마한의 농경 의식 같은 상고 사회의 가무 전통으로부터 이어지는 자생적·토착적 연희 문화였다. 삼국시대에 서역과 중국으로부터 외래 연희가 유입되었을 때, 이러한 연희를 담당할 수 있는 자생적 연희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악·신라악·백제악은 수준 높은 연희로 발전할 수 있었다.

동아시아 공동의 연희 문화 유산인 산악·백희가 삼국시대에 중국과 서역으로부터 유입되었는데,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백희, 가무백희, 잡희, 산대잡극, 산대희, 나례, 나희 등으로 불리던 연희의 종목은 대부분 산악·백희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 이르면 이러한 연희가 변화, 발전하여 연극적 양식의 본산대놀이 가면극, 판소리, 꼭두각시놀이 등을 성립시켰다.

산악·백희는 한국·중국·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가 공동으로 보유했던 동아시아 공동의 연희 문화 유산이기 때문에, 산악·백희에 주목함으로써 우리나라 전통 연희의 동아시아적 보편성을 밝힐 수 있었다. 나아가 고구려의 고분 벽화나 각종 문헌에 정착된 연희 자료를 면밀히 검토하여 해명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전통 연희의 갈래, 분포, 담당층, 후대 연희와의 관련성에 대한 논의 또한 가능하였다.

앞으로 전통 연희의 각 종목에 대하여 그 기원과 발전 과정, 교류 양상, 연희 방식, 연희 내용 등을 고찰하고 중국·일본의 연희와 비교 연구하는 일이 과제로 남아 있다. 이러한 작업은 우리 전통 연희의 실상을 밝혀 올바른 계승에 이바지할 수 있고, 나아가 전통 연희의 현대적 재창조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 전경욱
26)『세종실록』 권22, 세종 5년 10월 8일 을묘.
27)『세종실록』 권64, 세종 16년 4월 10일 정사.
28)유득공, 『경도잡지(京都雜志)』 권1, 성기(聲伎).
29)『문종실록』 권2, 문종 즉위년 6월 10일 임오.
30)이색, 『목은집』 권33, 자동대문지궐문전산대잡극전소미견야(自東大門至闕門前山臺雜劇前所未見也).
31)『중종실록』 권90, 중종 34년 4월 5일 임인과 4월 10일 정미.
32)이익, 『성호사설』 권12, 인사문, 이유위희.
33)『세종실록』 권52, 세종 13년 5월 26일 기축.
34)허균,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권18, 문부(文部) 조관기행(漕官紀行) 9월 7일.
35)『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부편(附編)2, 감결(甘結) 병진년(丙辰年) 10월 초7일.
36)『고려사』 권129, 열전42, 최충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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