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4장 전쟁의 기억과 국가 제사3. 전몰처와 여제

군인의 죽음과 국가의 대응

[필자] 이욱

다음은 모윤숙 시인이 경기도 광주 산곡을 헤매다 마주친 죽은 국군을 보고 지었다는 시, 「군인은 죽어서 말한다」의 일부분이다.

내 청춘은 봉우리 지어 가까운 내 사람들과 함께

이 땅에 피어 살고 싶었었나니

아름다운 저 하늘에 무수히 나르는

내 나라의 새들과 함께

나는 자라고 노래하고 싶었노라.

나는 그래서 더 용감히 싸웠노라. 그러다가 죽었노라.

아무도 나의 주검을 아는 이는 없으리라.

그러나 나의 조국, 나의 사랑이여!

숨지어 넘어진 내 얼굴의 땀방울을

지나가는 미풍이 이처럼 다정하게 씻어 주고

저 하늘의 푸른 별들이 밤새 내 외롬을 위안해 주지 않는가?

남모를 사연을 가슴에 안고 총을 잡았을 젊은 군인은 이미 죽어 말이 없지만 시인의 입을 통해서 그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 사랑하는 가족 그리고 연인과 함께 살고 싶었던 청년은 그 사랑과 희망을 위해서 싸우다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는 풀 속에 나뒹굴어졌지만 사랑하는 조국이 있기에 외롭지 않다고 부르짖고 있다.

전쟁은 많은 사람의 죽음을 요구한다. 다른 사람의 죽음이 아니라 가장 활력이 넘치는 젊은 군인의 죽음을 원한다. 가장 화려하게 피어야 할 젊은 날에 전쟁터의 이슬로 사라진다는 것은 당사자나 이를 바라보는 사람 모두에게 비극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것은 조국이라 불리는 국가의 안위가 내 생존과 직결되는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이 사라진 자리에서 군인의 죽음을 바라보면 어떠할까? 모윤숙 시인이 군인을 대상으로 지은 시는 앞의 것이 처음이 아니다. “고운 피에 고운 뼈에 / 한번 새겨진 나라의 언약 / 아름다운 이김에 빛나리니 / 적의 숨을 끊을 때까지 / 사막이나 열대나 / 솟아솟아 날아가라”라는 「어린 날개」의 시는 애절하다 못해 처절한 느낌을 준다.

그런데 이 시는 일제강점기에 15세에서 18세의 소년병으로 구성된 히로오카(廣岡) 항공병에게 바친 것이다. 아직 소년티가 남아 있을 것 같은 젊은 병사들이 비행기를 타고 적진을 향해 날아드는 그 모습, 그 죽음을 ‘나라의 언약’이란 이름으로 미화시킨 시이다. 이 시를 읽으면 나라를 잃은 젊은 청년이 대동아의 신질서 건설이란 명분 속에 헛되이 사라져간 죽음을 떠올린다.

한 시인이 지은 군인에 대한 두 개의 시를 동시에 보면 전쟁터에서 죽은 군인의 영혼을 충혼(忠魂)이라 불러야할지 원혼(寃魂)이라 불러야할지 망설여진다. 물론 이념을 위해서, 자유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과감히 바쳤을 용감한 군인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공포와 두려움에 떨다가 죽은 사람도 있을 것이며, 원하지 않은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명분에 끌려서, 징집의 의무로 끌려와 살기 위해 싸우다 죽은 평범한 군인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군인의 죽음에 쉽게 충혼이란 거창한 수식어를 붙인다. 물론 이 말은 그래서 충혼이란 말을 버려야 된다는 말도 아니고 그들의 죽음에 모욕을 주기 위한 것도 아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한’이란 거창한 수식어에서 해방되어 한 인간의 죽음을 바라볼 수는 없을까라는 문제 제기일 뿐이다.

조선시대에도 전쟁이 있었으며 그에 따라 수많은 군인들이 죽었다. 나라에서는 이들 군인의 주검을 거두고, 그 영혼과 유족들을 위로하는 것을 주요한 의무로 여겼다. 그리고 죽은 군인의 공로를 찾아내어 현창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들 군인의 죽음이 새로운 재앙을 일으키지 않을까 두려워하였다.

생각건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바람을 맞으며 끼니를 때우고 이슬을 맞으며 잠들어 기한(飢寒)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고, 죽어서는 넓은 땅과 높은 하늘에서 돌아갈 길을 알지 못하여, 뼈만 남은 시신은 오랫동안 덩굴과 풀밭에 뒹굴고 있다. 충성스럽고 꿋꿋한 혼백이 황야에서 울부짖으며 부모를 생각하나 영원히 격리되어 어느 곳에서 고향과 집을 바라보겠는가. 비오는 음습한 날이나 달빛이 청명하고 싸늘하게 추운 밤에는 배회하며 서성거리고 번뇌와 원망이 뭉치어 올라와 슬피 운다. 이것은 진실로 통한이 오래 맺힌 것 때문이니 누군들 답답하면 그렇지 않겠는가. 그러나 저승과 이승의 경계가 다르고 사람과 귀신의 길이 다르니 만약 형체와 소리에 의탁하여 사람을 놀라게 하면 실로 귀신의 올바른 행위가 아니다. 어찌 사람의 놀랄 일로만 그치겠는가. 상제(上帝)가 미워할 것이다. ······ 지금 내가 근신(近臣)을 보내어 제사를 드려 너희 혼의 원한을 위로하니 밝히 들어 정(靜)함으로 돌아가라.251)

인용문은 병자호란 때 청군에게 아군이 크게 패하였던 경기도 마희천(동막천), 쌍령 전투 등에서 죽은 병사들을 제사 지낼 때 지었던 제문이다. 이러한 제문에 가끔씩 ‘충혼’이란 용어가 등장하지만, 전반적으로 의도하는 바는 억울하게 죽었더라도 그 원혼을 풀고 삶과 죽음의 이치를 생각하여 이승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저승에서 편히 쉴 것을 당부하는 것이다. 왜 이런 제문을 지었을까?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전쟁에 죽었던 원혼들이 죽음의 세계에 침잠하지 못하고 이 세상에 떠돌며 전염병이나 가뭄 등 재앙을 일으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사의 목적과 방식을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다. 그러나 충혼으로 다 감싸 안을 수 없는 아픔과 원망의 소리는 이러한 형식을 통해서 표출되었다. 그리고 실제 나라에 재앙이 닥치면 이들이 숨진 전장터를 찾아가 제사를 지내 주었다. 이제 현재의 재난이 과거의 전쟁을 기억하게 만드는 조선 후기 전몰처 제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필자] 이욱
251)이경석(李景奭), 『백헌집(白軒集)』, 「마희천쌍령등처정축전망인사제문(麻戲川雙嶺等處丁丑戰亡人賜祭文)」: 민족문화추진회, 『한국 문집 총간』 96,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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