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2장 금속 화폐 시대의 돈3. 화폐와 경제 생활

돈의 가치

동전의 귀천(貴賤)은 대체로 숙종대 말기까지 주로 은화를 기준으로 평가되었으나, 영조대부터는 주로 쌀을 기준으로 평가되었다. 은화는 17세기 후반에 기축적인 통화였지만, 영조대 이후에는 화폐로서의 기능이 약화되고 마침내 정지하였기 때문이다. 은화는 오늘날 달러와 마찬가지로 국제 통화이므로, 은화로 측정된 동전의 가치는 환율로 볼 수 있다. 물가는 최대의 상품이면서 일상생활에 가장 긴요한 쌀을 동전으로 측정한 가치로 대표할 수 있다. 물가와 환율은 서로 영향을 준다.

1678년 윤3월에 정부는 『대명률(大明律)』과 개성에서 유통되는 동전의 가치를 참작하여 공정 교환율을 쌀 1말=은화 1전=상평통보 4전으로 잡았다. 동전 통용책이 성공하여 동전은 공정 교환율 이상의 가치를 가지게 되자, 정부는 동전의 부족을 보충하고 주전 이익을 늘리기 위하여 1679년 2월에는 은화 1냥을 동전 2냥과 교환하도록 개정하였다. 그로 인해 동전에 대한 시장의 불신이 커져 가치가 폭락함에 따라, 1680년 5월에 정부는 은화와 동전의 교환 비율을 시장에 맡기기로 하였다. 정부가 동전의 가치를 은화 에 결부시킨 정책을 폐지하고 그것을 방임하자, 동전에 대한 시장의 신뢰와 더불어 가치가 회복하였다.79) 정부는 공정 교환율의 지정과 좌절을 통해 물가가 기본적으로 시장의 힘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배웠다.

17세기 말까지는 동전에 대한 시장의 신인이 확고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동전 가치가 가변적인 편이었다. 대체로 은화 1냥은 동전 4냥에, 연말 서울에서 쌀 1석은 동전 5냥에 미달하였던 것 같다. 1695∼1697년간의 대대적인 주전으로 동전량이 크게 증가한 직후에는 동전가치가 낮은 전천(錢賤) 문제가 조정의 중요한 관심사였다. 1700∼1701년에는 은화 1냥이 동전 5냥에 상당하였다. 숙종 20년대(1694∼1703) 후반에 동전의 구매력이 안정되는 가운데 전천 문제가 더욱 심각해진 것은 일본으로부터 은 유입이 순조롭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숙종 30년대(1704∼1713)에는 은의 유입이 순조로워져서 전천 문제가 사라졌다.

1698년 이후 주전이 중단된 반면, 동전의 통용 범위가 확대되었을 뿐만 아니라 거래 수단과 자산으로서 동전을 보유하려는 동기가 성장하여, 동전의 수요는 꾸준히 증가하였다. 그 결과 동전 수요의 증대에 공급이 따라가지 못하여 전황(錢荒) 현상이 1710년대부터 나타났다. 황(荒)이란 흉년이 든다는 뜻으로, 전황이란 흉년의 작물처럼 동전이 귀하고 가치가 높아진 현상을 말한다. 전천은 인플레이션에, 전황은 디플레이션에 기인한다. 1716년 조정에서는 “동전이 이미 오래 행용하여 점차 널리 유포되는 데에도 오랫동안 추가로 주전하지 않으므로” 전황은 필연의 형세라는 견해가 제기되었다.80) 여기서 돈의 가치가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된다는 인식이 도출된 점은 주목된다. 18세기 일본 은의 유입이 감소하고 두절되어 가면서 은화의 유통이 위축되었는데, 박지원(朴趾源)은 그것이 전황의 원인이라는 예리한 인식을 하였다. 화폐 경제의 경험은 경제 교육의 장을 제공하고 경제 인식을 심화시켰던 것이다. 1710년대부터 1740년대까지 은화 1냥은 동전 2냥 내외였고, 쌀 1석은 동전 3∼4냥 정도였다.

1698년경부터 동전은 편익보다 폐단이 많으니 폐지해야 된다는 주장이 대두하여 주전은 오랫동안 중단되었다. 그로 인해 심화된 전황은 정착되어 가던 화폐 유통 질서에 타격을 가하였다. 소수의 부유한 상인이 전황으로 희소해진 동전을 집적하여 여전히 고리대 활동을 수행한 반면, 일반 농민과 영세한 상인은 유동성이 높은 동전을 구하지 못하여 곤경에 처하였다. 정부로서도 동전보다 편리한 징세·거래 수단을 구할 수 없었으므로, 결국 1731년(영조 7) 이후 동전은 다시 주조되었다.

1731∼1798년간 관에서 주조한 동전은 500만 냥 이상이고, 1800년경의 동전량은 900만 냥 내외이며, 그것으로 미곡 생산량의 11%에 상당하는 180만 석을 구입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1731년 이후 동전이 꾸준히 주조됨에 따라, 전황은 완화되는 추세였다. 1770년대 이후 은화 1냥은 대개 동전 3냥을 넘었다. 쌀값은 18세기 중엽부터 완만히 상승하여 1770년대부터 5냥을 넘는 수준에서 안정되었다. 그런데 1820년대까지는 전황 국면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전황의 국면이 1710년대부터 1820년대까지 지속한 기본 요인은 화폐의 수급(需給) 사정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시기 인구와 시장의 지속적 성장은 화폐 수요의 성장을 낳았다. 17세기 말까지 동전의 유통은 조세의 동전 납부와 더불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또한 동전에 대한 신인도가 높아지고 동전의 가치가 안정됨에 따라, 거래적·예비적·투기적 수요를 위한 목적으로 보유하는 동전이 증가하였다. 이러한 수요는 증대하는 추세여서 정조대에 전국 관청은 동전 총량의 과반을 보유하였다. 이렇게 화폐 수요가 지속적으로 성장한 반면 그에 상응하게 화폐 공급이 증대하지는 못하였다. 주전이 한동안 중단되다가 1731년부터 재개되었지만, 18세기에는 마모되거나 파손되는 동전이 많았다. 18세기에는 통화로서 기능하는 은화가 격감하였다.

1730년대부터 주전이 재개되고 신전(新錢)이 꾸준히 공급되었으므로, 전황의 양상은 약화되는 추세였던 것으로 보인다. 1781∼1784년간에 전황이 심각한 문제로서 논의되었지만, 그 이후에는 논의의 빈도도 줄어들고 심각성도 완화되었던 것이다. 1830년대에 전황 국면으로부터 탈피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 주요한 요인으로는 18세기 중엽부터 동전이 지속적으로 공급되어 전황이 완화된 데다가 1829∼1832년간에 신전이 152만 냥 공급되었던 것을 들 수 있다. 1809∼1857년간 동전 600만 냥 이상의 주조는 전황 국면을 종식시키고 물가를 상승 국면으로 인도하였다. 1860년경의 동전량은 1,400만 냥 내외이고, 그것으로 미곡 생산량의 13%에 해당하는 200만 섬을 구입할 수 있었을 것이고, 국내 총생산의 3% 정도에 상당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8세기 쌀 1섬의 평균 시세를 5냥으로 본다면, 1냥의 구매력은 오늘날의 화폐 단위로 얼마나 될까? 조선시대의 1섬은 지금 1섬의 60% 내외이고, 지금 현미 1섬은 155㎏이다. 2006년 6월 현재 보통 품질의 쌀 20㎏의 소매가격은 5만 원 정도이다. 그렇다면 18세기 1섬은 지금의 시세로 23만 원 남짓하고, 1냥의 구매력은 지금의 화폐로 5만 원 정도가 되는 셈이다. 물론 그동안 쌀값이 상대적으로 얼마나 비싸졌는지를 알아야 정확한 구매력을 측정할 수 있다.

은화로 측량된 동전의 가치도 일반 재화의 물가 동향과 유사하다. 17세기 후반에 은화와 동전의 교환 비율은 불안정한 가운데 1 대 4를 중심으로 변동하다가, 18세기 전반에 동전 공급의 중단으로 전황을 맞이함에 따라 1710년대에 동전의 가치가 은화의 가치와 대등한 적도 있었다. 18세기 중엽에는 은화 1냥은 동전 2∼3냥 수준이었는데, 그후 완만히 상승하는 추세여서 18세기 말에는 3냥을, 1840년대에는 4냥을, 1850년대에는 5냥을 상회하였다.81)

[필자] 이헌창
79) 송찬식, 앞의 글, pp.795∼806.
80) 『비변사등록』 69책, 숙종 42년 12월 25일.
81) 이헌창, 「1678∼1865년간 화폐량과 화폐 가치의 추이」, 『경제사학』 27, 1999.
창닫기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