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4장 일제 강점기의 화폐1. 식민지 중앙은행 설립과 은행권 발행 제도

조선은행권은 불환 지폐, 식민지 통화의 전형

1909년 11월에 설립된 한국은행은 일제 강점 이듬해에 조선은행으로 개칭되어 1945년 9월 연합군에 의해 폐쇄될 때까지 식민지 조선의 중앙은행으로서 은행권을 발행하였다. 표 ‘조선은행권 발행 제도의 변천’을 보면 발행 제도의 틀이 제일은행권의 그것에서 기원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제일은행권에서 한국은행권으로 바뀌면서 달라진 점은 태환 규정과 보증 준비 발행 한도 정도였다.

<1909년에 발행된 제일은행의 10원권(앞면)>   
식민지 중앙은행의 설립으로 법화는 제일은행권에서 조선은행권으로 바뀌었다. 태환 규정도 ‘일본 통화’에서 ‘금화, 일본은행 태환권’으로 변경되었으며, 1942년 일본은행권 자체가 불환 지폐가 됨에 따라 다시 ‘일본은행권’으로 바뀌었다.
<1909년에 발행된 제일은행의 10원권(뒷면)>   
<1915년에 발행된 조선은행의 10원권(앞면)>   
<1915년에 발행된 조선은행의 10원권(뒷면)>   
<1944년에 발행된 조선은행의 갑10원권(앞면)>   
<1944년에 발행된 조선은행의 갑10원권(뒷면)>   

태환 규정의 경우 제일은행권의 권면에는 “此券面金額(차권면금액)은 在韓國各支店(재한국각지점)에서 日本通貨(일본통화)와 태환함”이라고 쓰여 있었는데, 한국은행권의 권면에는 “此券(차권)과 相換(상환)함에 金貨(금화) 혹은 일본은행 태환권으로써 金◯圓(금◯원)을 출급함”, 조선은행권에는 일본어로 “此券(차권) 引換(인환)에는 金貨(금화) 또는 일본은행 태환권 ◯圓(◯ 원)으로 교환해 드린다.”고 되어 있다. 제일은행권과 달리 한국은행권·조선은행권은 태환 대상에 금화가 포함되어 있어 금본위제 지폐인 듯하다. 그러나 이 태환 규정에는 조선은행권을 일본은행권과 교환해 주면 금화와 태환해 주지 않는 것에 대해 항의할 근거가 없었다.

금본위제를 표방한 일본은행권과 교환이 이루어지므로 금환본위제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은행권 자체가 1917년부터 1929년까지, 그리고 1932년 이후 사실상 금과 태환되지 않는 불환 지폐였으며, 1942년 관리 통화제로 전환되면서 법적으로도 불환 지폐가 되었다. 따라서 조선은행권은 1909년∼1917년간과 1930∼1931년간은 금환본위제 화폐였지만 나머지 기간은 사실상 불환 지폐였다.

일제 강점기에 한국인이 금화나 일본은행권과 태환을 요구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주로 일본인이 조선에서 취득한 조선은행권을 일본에서 사용하려할 때 일본은행권과 등가 교환이 이루어졌다.142) 태환 여부와 함께 중요한 점은 바로 등가 교환이었다. 조선은행권 5원이 곧 일본은행권 5엔으로 두 지역 사이에 환율 장벽이 없는 셈이다. 개항 이후 일본과 일본 상인은 경제 침략의 한 방침으로 줄곧 화폐의 등가 연계를 추진하였는데, 이로써 한국 경제를 일본 경제에 아무런 장벽 없이 편입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조선은행권이 사실상 불환 지폐였다는 점은 식민지 경영에 필요한 자금을 금 준비 없이, 일본은행권의 유출 없이 은행권 발행을 통해 손쉽게 조달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한국에 앞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대만에 1899년 설립된 대만은행의 은행권은 은태환권, 1904년부터는 금태환권이었다. 1937년에 가서야 비로소 태환 대상에 일본은행권이 포함되었다.143) 일본은 제일은행권, 조선은행권의 예를 따라 이후 확보한 식민지 지역에서 유사한 제도를 실시한다. 만주중앙은행이나 중국연합준비은행은 조선은행권을 발행 준비로 하는 은행권을 발행하였다. ‘일본은행권-조선은행권-중국 지역 식민지 통화’라는 연쇄 고리가 형성된 것이다.144)

[필자] 정병욱
142) 오두환, 『한국 근대 화폐사』, 한국연구원, 1991, pp.311∼326.
143) 後藤新一, 『日本の金融統計』, 동양경제신보사, 1970, pp.241∼249.
144) 島崎久彌, 『元の侵略史』, 日本經濟評論社, 1989, pp.ⅰ∼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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