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7장 우리 옷을 밀어낸 양장과 양복

1. 두루 막힌 두루마기

[필자] 최은수

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옷, 즉 서양식 옷은 언제부터 입게 되었을까? 아시아의 근대적 변화가 옷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서양 옷은 우리의 차림새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쓰개치마로 얼굴을 가려야만 외출할 수 있었던 여인들이 다리를 드러낸 짧은 치마를 입고, 짚신 대신 고무신과 하이힐을 신고 거리를 누비게 되었다.

개화기는 외국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여 이전의 것과는 다른 문화를 만들어 냈던 시기이다. 이때는 전통 사회에서 근대 사회로 바뀌어 가는 과도기일 뿐만 아니라, 개화사상 등이 민중 세계의 의식 수준으로 향상되는 가운데 외국의 문물이 유입되어 우리의 전통적인 이념과 가치관에 획기적인 변화를 일으킨 시기이기도 하다. 개화파 지식인들과 위정자들의 개국(開國) 의지는 갑신정변(1884)을 통해 적극 반영했으나 결국 실패하였다. 당시에 의복의 개혁도 시도하였으나 충분한 설득력이 없어 많은 유림과 백성들의 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나마 청년들의 개화사상에 동조했던 고종은 흑단령(黑團領) 착용 및 넓은 소매 포(廣袖) 폐지만을 고집하게 되었다.392)

강화도 조약(1876)이 체결되고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전통 한복 문화에서 한복과 양복의 혼용으로 넘어가는 변화를 겪게 되었다. 즉, 사람들은 서양 문물 도입으로 활동성 있는 의복을 찾게 되었고, 전통 한복을 개량한 통치마·양복·파마 등이 혼용되어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신문이나 잡지의 광고를 통하여 양산·하이힐·양장 등이 대중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자연스럽게 유행되었다.

근대에 접어들면서 생활의 변모와 함께 정착한 서양식 옷차림은 편리함과 대량 생산에 힘입어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한복은 점차 일상복의 자리를 양복에게 내주어야 했으며, 집에서 손수 지어 입던 것과 달리 시장에서 옷을 사서 입었다. 옷 모양의 변화에 따른 유행은 어느 시대에나 있어 왔지만 복식의 유행 열풍이 사회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1937년 중일 전쟁 이후, 특히 의복에 있어 그 어느 때보다도 실용성이 강조되어 1939년부터는 ‘몸뻬(もんぺい)’393)와 현재의 간호복과 같은 간단복(簡單服)이 등장하였고, 1941년 태평양 전쟁으로 인하여 1940년대에는 전시복으로 스커트 대신 ‘몸뻬’나 바지를 착용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가 경제 불황을 맞이하였으며, 우리나라는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흰옷보다는 색이 있는 옷을 장려하였다.

현대 사회에서 복식은 더 이상 자연 현상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거나 신분을 표시하고 예(禮)를 갖추기 위한 것뿐 아니라, 생산하고 소비되는 중요한 산업으로 자리 잡았으며, 입고 보여 주고 느끼고 향유하는 하나의 문화적 매개체가 되었다. 청바지·통기타·장발은 1970년대에 젊은이들의 자유와 반항을 상징하고, 배꼽티와 힙합바지는 1990년대 청소년층의 문화를 대표한다고 할 만큼 현대 사회에서 복식은 한 시대와 사회의 문화를 대변하기도 한다.

우리 옷을 밀어낸 서양 옷이 들어온 지 100년, 이미 일상복의 자리를 내준 지는 오래되었지만 우리 옷을 다시 한 번 자리매김해 보자는 취지에 따라 정부에서는 ‘한복 입는 날’을 정하게 되었다. 1996년 12월 4일, 매월 첫째 토요일을 ‘한복 입는 날’로 선포하고, 그동안 예복의 자리마저 서양 옷에게 내주었던 우리 옷의 제자리 찾기가 시작되었다.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생활 한복 업체와 한복이라는 이름을 걸고 국적도 없이 만들어진 우리 옷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올해로 11년째를 맞이하면서 그동안 한복의 고급화·대중화·기성복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지만 앞으로도 갈 길은 먼 것 같다. 1996년에 만든 선언문의 취지대로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인식 속에서 한복의 일상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날을 기대해 본다.

[필자] 최은수
392)유희경 외, 『우리 옷 이천 년』, 미술 문화, 2001, 120쪽.
393)‘몸뻬(もんぺい)’는 일본의 농촌이나 산촌 여성이 작업복·방한복으로 입던 바지 모양의 아랫도리 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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