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7장 우리 옷을 밀어낸 양장과 양복

4. 한복과 양복 교복

[필자] 최은수

여성의 전통 옷도 조금씩 변화하였다. 여성복은 남성복과 달리 의제 개혁 당시 법으로 규제하지는 않았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어서 개정의 필요성이 절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통 여성복으로는 치마저고리가 기본이고, 겉옷으로는 배자·마고자·갖저고리, 속옷으로는 속적삼·속곳을 입었다. 개선과 변화를 먼저 요구한 것은 여성들이었다.

여성 계몽 단체인 여자 교육회에서는 여성 교육을 실시하였다. 또한, 신문화 운동의 물결을 타고 “여자 교육을 하는 일 중 급선무는 여자의 의관을 개량하여 행동을 자유롭게 함이라.”는 구절을 담은 건의서를 정부에 냈다. 저고리 길이를 길게 하고 치마는 통치마로 하되 길이는 짧게 한 개량복을 선보였다. 1907년 정부에서 마침내 이를 허락하자 여성 개량복은 신여성과 학생을 중심으로 차츰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여성복 개량 운동은 1920년대 들어 세차게 일어났다. 어느 인사는 치마말기가 젖가슴을 조여 건강에 나쁘고 자꾸 흘러내려 활동에 불편하며 길이가 길어 옷감이 많이 든다고 폐단을 지적하였다. 신여성은 더욱 적극적으로 개량 운동에 나섰다. 시인 김일엽은 옷의 3대 조건으로 위생, 예의, 자 태를 지적하면서 자신이 고안한 개량복을 제시하였다. 치마는 끈을 달아서 입을 것, 고름 대신 단추를 달 것 등이었다.

전통 여성복은 저고리가 허리춤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었으며 소매도 헐렁하였다. 그런데 개화 바람을 타고 저고리가 갑자기 앞가슴을 여밀 정도로 짧아지고 소매도 좁아졌다. 그리하여 단속을 하지 않으면 앞가슴과 허리가 드러나기 일쑤였다. 그래서 치마에 끈을 달아 치마말기 대신 어깨에 메게 했는데 이것이 개량 한복의 전범이 되었다.

저고리는 민감하게 유행을 탔다. 솜을 두거나 겹으로 짓는 저고리의 고름이 유행을 타서 길어지거나 짧아졌다. 여름 적삼에는 고름을 달지 않고 천도 모양의 매듭과 고리로 여미었는데 이를 ‘고단추’라 불렀다. 팔을 들면 겨드랑이가 보이는 짧은 저고리는 기생들이 즐겨 입었는데 여염집 여성들이 이를 뒤쫓아 비난을 받았다.

<약 광고의 모델>   
일제강점기에 나온 건위고장환 광고 포스터이다. 서양식 퐁파두르 머리를 하고 저고리 고름 대신 단추를 단 개량 저고리에 통치마를 입은 여인이 모델로 등장하고 있다.

전통 치마는 옆이 트이고 치마말기를 달아 허리나 가슴에 둘러 입었으며 길이는 발목까지 내려왔다. 이를 자락치마 또는 긴치마라 불렀다. 자락치마는 길기도 하거니와 옷감이 많이 들어 개량복으로 등장한 것이 통치마였다. 길이를 짧게 하고 트인 옆을 막고 치마말기를 없애 재킷처럼 어깨에 걸칠 수 있는 모양이었다. 통치마를 입으면 젖가슴을 조여 매지 않아도 되었다. 이로써 여성의 건강뿐만 아니라 여성의 본래 미를 살리는 길이 열린 것이다. 통치마는 편리하고 깡동하여 ‘깡동치마’라고도 불렀다.

통치마는 주로 신여성과 여학생이 입었다. 통치마의 주름 너비의 간격이 약간씩 달랐고, 처음에는 아랫자락이 발목쯤 내려와 땅에 끌리지 않을 정도였는데 어느새 조금씩 짧아져 무릎 아래까지 올라와 종아리가 드러나기도 하였다. 근엄한 유학자들은 이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통치마를 입 으면 예전의 단속곳을 입을 수가 없어서 이보다 짧은 속치마를 대신 입었다. 1920년대 메리야스가 들어오자 속적삼은 셔츠로, 속바지는 사루마타(猿股, 남자용 팬티)로 바뀌었다. 배자는 소매 없이 저고리 위에 입었고, 갖저고리와 마고자는 남성용 포와 같이 방한용 외출복이 되었다. 이것도 간편한 두루마기로 차츰 대치되었다.

여성복에서 무엇보다 획기적인 변화는 장옷과 쓰개치마를 벗은 것이다. 장옷은 사대부집 여성이, 쓰개치마는 서민 여성이 주로 외출할 때 사용하였다. 이를 통틀어 쓰개라고 하였다. 행동이 불편함은 물론 여성에 대한 굴레나 마찬가지였으니 여성의 인권과도 관련이 깊었다. 쓰개를 벗자는 운동은 개화기부터 시작되었으나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심지어 신식 여학교 학생도 장옷을 입고 다녔다.432)

<쓰개치마 두른 여인과 박쥐우산을 쓴 여인>   
쓰개치마를 두른 여인과 박쥐우산을 쓴 여인이 뒤섞여 걸어가는 장면이다. 쓰개치마는 서민 여성이 내외법 관습에 따라 외출할 때 머리와 몸 윗부분을 가리기 위하여 두르던 것이다. 여성 인권을 제약하는 것이라서 쓰개를 벗자는 운동이 개화기부터 시작되었으나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타협책으로 얼굴을 가릴 수 있는 검정 우산이나 양산이 유행하기도 하였다.

1900년경부터 개화한 일부 고관 부인이나 사회 활동에 참여하는 여성들을 필두로 점차 쓰개치마를 벗어 버리게 되었으며 각 여학교에서 쓰개치마 사용을 금하였다. 그러나 수백 년을 지켜 온 내외법 관습을 하루아침에 철폐하기는 어려워 과도기적인 타협책으로 얼굴을 가릴 수 있는 검정 우산이나 양산이 유행하기도 했으며 1920년대까지도 보수적인 일반인들은 쓰개치마를 입었다.433)

1911년 배화학당에서 교복을 여러 차례 바꾼 뒤 쓰개를 폐지하는 조치를 내렸다. 대신 검정 우산을 쓰고 다니게 하였다. 여성의 얼굴 가리개는 차츰 양산으로 대체되었으며, 목도리나 숄도 이용되었다. 여성들의 쓰개 벗기에는 여성 해방을 상징하는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다. 고려 때부터 시작된 오랜 굴레가 근대 여성 인권의 관점에서 철폐되었던 것이다.

<처네>   
부녀자가 외출을 할 때 사람들의 시선을 가리고 추위도 막기 위하여 쓰던 쓰개이다.

여성복의 색깔은 남성복보다 다양했으나 흑색이 주조를 이루었다. 특히, 기본 옷인 치마와 저고리는 흰색 저고리에 흑색 치마를 입는 풍조로 바뀌었다. 간혹 분홍색이나 자주색 여학생복이 있었으나 1930년대 들어와서는 거의 백색 저고리와 흑색 치마로 통일되었다.

숙명여학교에서 원피스를 교복으로 채택했다가 3년 만에 다시 개량 치마와 개량 저고리로 바꾸었다. 조선 복식으로 교복을 입는 것을 일종의 민족의식의 발로로 여겼기 때문이다. 지금도 원불교의 여성 교무와 일본 조총련 계통의 여학생은 이와 같은 차림을 하고 있다.434)

[필자] 최은수
432)전완길 외 8인, 『한국 생활 문화 100년』, 장원, 1995, 87쪽.
433)전완길 외 8인, 앞의 책, 86쪽.
434)이이화, 앞의 책, 1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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