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2장 불교 사상의 확립과 일상의 신앙생활3. 선종의 수용과 신앙의 변화

새로운 신앙의 실천

선종의 대두와 함께 하대 신앙도 여러 가지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중대에 크게 성행하였던 미타 신앙은 하대에도 크게 환영받았다. 특히, 하대 미타 신앙은 다라니 신앙에 결부되어 무구정탑을 세우고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사례가 많이 보인다. 이는 선종을 비롯한 여러 사찰에서 종파와 관계 없이 널리 행해졌다. 하대 미타 신앙이 중대와 다른 특징은 내세적 경향이 중심을 이룬다는 것이다. 이 땅에서 불국정토(佛國淨土)를 실현한다는 이상은 약화되고, 미타 신앙 본래의 지향대로 사후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게 된 것이다.

하대에는 미륵 신앙도 널리 환영받았다. 하대 미륵 신앙의 중심은 구원자적 존재로서의 미륵을 희구하는 미륵 하생 신앙이었다. 태봉의 지도자로서 보통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던 궁예는 미륵불을 자처하며 사람들을 자신의 세력 아래 모이게 하였고, 미륵 신앙의 근거지인 금산사는 견훤 정권과 연결되는 등 미륵 신앙은 후삼국기에 크게 성행하였다. 금산사나 법주사, 동화사와 금강산 등에서 전개된 미륵 신앙은 중대 진표의 영향을 받아 하대에 이르러 유행하였다.

<황복사지 3층 석탑>   
탑을 조성하고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해 탑 안에 사리함, 불상, 작은 탑, 다라니를 넣었던 신앙을 볼 수 있는 황복사지 석탑과 그 속에서 나온 불상과 사리기이다.
<금제 불좌상>   
<사리함>   

신앙의 실천에는 개인적인 것과 집단적인 것이 있다. 불교의 대중화와 밀접한 것으로 결사라는 이름의 집단적인 수행이 사찰에서 행해졌다. 신앙 결사는 신앙심을 굳게 다지고자 경전을 강의하고(講經), 읽고(讀經), 외우고(誦經), 베껴 쓰고(寫經), 모임을 만들어 의식을 거행하고(齋會), 절을 유지 보수하는 데 힘을 보태고, 특히 불상을 조성하고 탑을 만들거나 종을 주조하는 등 의 공덕 신앙을 수행하였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불국사 석가탑을 만들 때 나라와 백성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 탑 안에 넣은 『다라니경』이다. 8세기 전반에 만든 것으로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목판 인쇄물이기도 하다.

탑을 만드는 등의 불사는 먼저 왕실, 귀족, 승려의 주도로 시작되었다. 탑과 불상을 만들어 죽은 사람의 복을 빌거나 종을 만들어 안락과 번영을 바라는 불사가 7세기 말부터 이루어졌다. 황복사 탑의 조성(692)과 그 안에 아미타상의 봉안(706), 무진사 종의 주조(745), 석남사 비로자나불의 조성(766), 성덕대왕신종의 주조(771) 등이 그것이다. 이처럼 중앙의 귀족들을 중심으로 상층부에서 조직 운영된 신앙 결사는 한편으로 죽은 조상의 명복을 빌고 살아 있는 이들의 안녕을 기원하며, 다른 한편으로 종교적인 실천 수행과 내면적인 신앙 활동으로 실행되었다.

<취서사 석탑 사리호>   
경북 봉화에 있는 취서사(鷲棲寺) 3층 석탑 안에서 발견된 석제 사리호(舍利壺)이다. 명문을 통해 867년(경문왕 7)에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 하대에 가장 왕성한 불사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 의거하여 탑을 조성하고 그 안에 사리와 함께 작은 탑과 다라니를 넣어, 죽은 사람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고 국가의 평안과 국토의 안녕을 바라는 것이었다. 법광사(828)나 창림사(853), 동화사 원당(863), 보림사(870), 해인사(895) 등에 왕생을 기원하는 탑이 세워진 것이 그 예이다. 이는 중대에 불상 조성이 비중 있는 불사로 이루어지던 것과는 다른 양상으로, 시기적으로 9세기 후반에 집중되었다.153)

신라 하대의 불교 결사는 조사 추모의 모임이 많다. 9세기 초반에 신라 불교의 첫 문을 열었던 이차돈을 기리는 예불 향도 모임이 이루어졌다. 이 사업은 국통(國統)을 비롯한 승단을 운영하는 고위 승관직이 망라되어 참여한 것으로, 중앙 교단이 주도하고 일반인 예불 향도가 참여하여 이루어졌다.

9세기 말에는 화엄종을 중심으로 결사 운동이 왕성하게 전개되었다. 이는 중대 말 이후 선종의 대두에 따라 교학 체계를 재정비하려는 의도에서 역대 조사의 저술을 강독하고 조사 숭배와 교단의 결속을 다지려는 것으로, 신앙을 실천하는 한 방법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화엄경』을 사경하고 강의하며 독경하는 공덕으로, 돌아간 국왕의 명복을 비는 『화엄경』 결사도 이루어졌다.

<소탑>   
<취서사 석탑 사리호 탁본>   
취서사 석탑 사리호의 표면에 새겨진 명문 탁본이다. 명문은 “함통(咸通) 8년에 승려 언부(彦傅)가 어머니를 위해 탑을 세워 불사리(佛舍利) 10과를 봉안하고, 무구정단(無垢淨壇)을 황룡사 승려 현거(賢炬)로 하여금 만들게 하였다.”는 내용이다. 탑을 만들고 그 안에 사리함과 『다라니경』 및 작은 탑을 넣어 죽은 사람의 정토왕생과 나라의 평안과 국토의 안녕을 비는 신앙이 통일신라 말에 유행하였다.

『화엄경』을 중심으로 뭉쳐 모든 선행을 실천하자는 화엄 교단의 주장은 화엄종에 대한 비판을 의식하며 내적인 결속과 실천적인 신앙 활동을 강조하려는 것이었다. 신라 화엄의 시조인 의상을 추모하는 열기가 일어난 것도 이와 같은 배경에서였다. 이들은 의상의 전기를 짓고, 그 은혜에 보답하는 결사를 만들며, 지엄이나 법장 등 역대 화엄 조사의 저술을 강론하며 화엄 교학의 강화를 다짐하였다.154)

하대의 결사 운동은 중앙에서는 교학 운동과 조사 추모 경향의 결사가 중심이 되었던 반면, 지방 사회에서는 향리나 촌주 등 지방 토착 세력을 중심으로 불사를 운영하고 신앙을 도모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규흥사 종은 승려와 지방 세력이 힘을 합쳐 종을 주조하여 사찰에 기부한 예이다. 이는 촌주 등의 재지 세력이 예하 촌락민을 포괄하는 향도와 같은 조직을 이루어, 족적 유대와는 다른 신앙 결사를 이용하여 지도적 위치를 강화하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에 비해 좀 더 많은 사례를 보인 결사의 다른 모습은 향도이다. 주로 지방민이 중심이 되어 신라 하대 신앙 운동의 주축을 이루었던 향도는 종교적 성격이 강하며 경제적 보시와 외형적인 불사 중심으로 한시적으로 시행된 경향이 많다. 865년(경문왕 5)에 철원 지방 사람들이 도피안사에 철제 비로자나불상을 조성하며 남긴 기록이 이런 모습을 잘 말해 준다.

<도피안사 철조 비로자나불 좌상>   
통일신라 말에 많이 만들었던 철조 비로자나불 중의 하나이다. 865년에 만들었다는 내용의 글이 불상 뒷면에 남아 있어서 만든 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 1,500여 명이 힘을 모아 불상을 만들고 미망에서 깨어나기를 기원하였다.
<도피안사 철조 비로자나불 좌상 조상기 탁본>   

오직 바라건대 비천한 사람들이 마침내 창과 방망이를 스스로 쳐 긴 어둠에서 깨쳐날 것이며, 게으르고 추한 뜻을 바꾸어 진리의 근원에 부합하며, 바라건대…… 이때에 거사를 찾아 1,500여 명이 인연을 맺으니 금석과 같은 굳은 마음으로 부지런히 힘써 힘든 줄을 몰랐습니다.155)

이처럼 사원의 불사·재회·추선 등의 의례를 위해 조직된 향도도 많았지만, 마을 주민 대다수가 참여하여 소규모의 경제적 협동으로 향나무를 바닷가에 묻어 먼 후일의 보응을 기대하는, 문자 그대로의 향도 조직도 적지 않았다. 9세기에 들어 실천적 불교 사상의 유포와 더불어 정토 사상에 바탕을 둔 신앙 결사가 형성됨에 따라 그 성격이 대중성을 띠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는 달리 오대산 신앙 결사에서 볼 수 있듯이 하대에는 복합적인 체계로 구성되어 다양한 경전 강독과 예참 신앙을 실행하는 신앙 사례도 나타난다. 한편, 중대의 약사 신앙은 치병 활동을 중심으로 현세의 고난 구제와 생명 연장의 신앙으로 아미타 신앙의 보완적 역할을 하였는데, 하대에는 정치 사회적 혼란과 기근·도적·질병 등의 현실 재난 속에서 더욱 유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선종 사찰에서도 주문 기원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져 성행하였다.

<해인사 희랑 대사상>   
해인사는 통일신라 말에 화엄 종단의 중심 사찰이 되어 화엄신중 신앙을 성립시켰다. 신라 말 고려 초에 활동한 대표적인 화엄 승려 희랑이 930년경 입적한 뒤 그를 기려 만든 조각상이다. 나무에 조각한 뒤에 채색을 하였는데,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한편, 『화엄경』의 강경·송경·사경 등 『화엄경』 자체에 대한 화엄 신앙과 함께 『화엄경』에 근거한 화엄신중(華嚴神衆) 신앙도 하대에 강조되었다.156)

신라 말 해인사의 희랑은 화엄신중의 위신력을 빌어 왕건의 군사를 도와 후백제군을 물리쳤다고 전한다. 신라 말 화엄 종단의 중심 사찰로 부상한 해인사는 막대한 토지와 독자의 승군 조직을 바탕으로 강력한 사원 공동체를 구축하면서, 교단 내의 상층부 승려들이 『신중경(神衆經)』을 성립시켜 화엄신중 신앙을 뒷받침하였다.

[필자] 정병삼
153)정병삼, 「9세기 신라 불교 결사(結社)」, 『한국학보』 85, 일지사, 1996, 216∼219쪽.
154)정병삼, 앞의 글, 1996, 205∼214쪽.
155)「도피안사 비로자나불좌상명문(到彼岸寺毘盧遮那佛坐像銘文)」, 『한국 고대 금석문』 Ⅲ, 1992, 314∼315쪽.
156)남동신, 「나말여초(羅末麗初) 화엄 종단(華嚴宗團)의 대응과 ‘(화엄)신중경(華嚴神衆經)’의 성립」, 『외대사학』 5, 한국외국어대학교 사학회, 1993, 150∼1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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