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불 정책의 확립
후삼국의 혼란을 극복하고 새로운 통일 왕조 고려를 개창한 왕건은 건국 초부터 적극적인 숭불(崇佛) 정책을 시행하였다. 건국 이후 수도 개경에 많은 사찰을 창건하였을 뿐 아니라 만년에 자손들에게 남긴 훈요 10조(訓要十條)에서도 불법을 숭상하고 사찰을 보호할 것과 불교 행사인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를 준수할 것을 강조하였다.157)
그가 불교를 존중하는 정책을 취한 것은 오랜 전란을 겪어 피폐해진 민심을 수습하는 데 불교가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였기 때문이다. 후삼국을 통일한 직후에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논산에 개태사(開泰寺)를 창건하면서 왕건은 부처와 신령의 은덕으로 통일 전쟁에 승리하였으며, 앞으로도 불교의 도움을 받아 국가의 안정과 발전을 기원한다는 내용의 발원문을 지었다.158)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의미에 앞서서 왕건은 개인적으로도 불교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선종과 교종의 여러 승려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고 왕위에 오른 이후에도 고승들의 비문을 직접 짓거나 비문의 제액을 써 주는 등 승려들에 대해 호의적이었다.159)
왕건에게서 시작된 숭불 정책은 역대 국왕에게 그대로 계승되어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불교는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발전할 수 있었다.
역대 국왕의 원찰(願刹)과 진전 사원(眞殿寺院)은 고려 왕실의 불교에 대한 귀의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태조 이후 역대 국왕은 자신의 원찰로서 대규모 사찰을 창건하였다. 고려 전기만 하여도 광종대의 불일사(佛日寺)와 귀법사(歸法寺), 현종대의 현화사(玄化寺), 문종대의 흥왕사(興王寺), 선종대의 홍원사(弘圓寺), 숙종대의 국청사(國淸寺)와 천수사(天壽寺) 등 1,000명에서 2,000여 명을 넘는 승려가 머무는 대규모의 원찰이 건립되었다. 이들 사찰에는 안정된 재정 운영을 위하여 막대한 양의 토지와 노비가 지급되었고 때로는 사찰 건립을 위하여 하나의 군현을 옮기는 경우도 있었다.160)
또한, 고려에서는 역대 국왕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진전 사원이 있었다. 공식적으로 국왕의 제사를 지내는 종묘와 경령전(景靈殿·影靈殿)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왕의 진전 사원을 따로 설치한 것은 종묘 등에서 거행하는 유교 의례와는 별도로 생전에 신앙하였던 불교 제사가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진전 사원은 각 국왕의 원찰에 설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원찰을 건립하지 않은 국왕의 경우에는 일정한 규모의 사찰을 진전 사원으로 지정하였다.161)
왕실에서는 또한 승려를 초청하여 재(齋)를 여는 반승(飯僧) 행사도 자주 거행하였는데, 이때에 초청된 승려의 수는 만 명 단위가 일반적이었다.
때로 왕실의 지나친 숭불을 관료가 비판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때에도 불교의 정당성 자체를 문제 삼지는 않았다. 백성을 다스리는 국왕은 현실의 민생 문제를 좀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입장에서 지나친 사찰 건립과 과도한 불교 행사에서 초래되는 재정 문제를 지적하는 데 그치고 있 다. 실제로 그러한 비판을 하는 관료도 개인적으로는 독실한 불교 신앙을 가진 경우가 적지 않았다. 관료의 경우 장례식을 사찰에서 거행하는 것은 널리 퍼진 관행이었고, 은퇴한 관료가 사찰에서 여생을 보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또한, 관료의 자제 중 일부는 승려로 출가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었다. 지방 사회의 일반민들에게서도 불교 신앙은 절대적이었다. 전국의 각 지역마다 사찰이 건립되어 신앙의 구심점이 되었고, 지역 단위로 불교 신앙 공동체인 향도(香徒)를 만들어 사찰의 건립과 보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처럼 고려 사회의 구성원 전체가 불교 신앙에 입각하고 있었음은 사회의 가장 중요한 연례행사가 불교 의례인 연등회와 팔관회로 구성되었다는 것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매년 봄과 겨울에 치른 이 행사는 본래 각 지역 공동체마다 거행하던 농경의례와 추수 감사 의식을 불교식으로 재편한 것이었다. 이처럼 불교식으로 체계화된 연례행사를 중앙에서 지방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체가 동질적으로 거행함으로써 고려는 불교 신앙과 문화에 기반한 사회 통합을 추진해 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