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3장 불교 사상과 신앙의 사회적 확대1. 숭불 정책과 종단 체제의 확립대장경 제작과 천태종 개창

천태종의 개창과 선종의 대응

고려 전기에 확립된 종파 체제가 발전하는 가운데 숙종대에 새로 개창된 천태종은 기존의 종파 체제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다른 종파가 신라 이래 오랜 기간에 걸쳐 종파 체제를 형성해 온 것과 달리 천태종은 짧은 기간에 왕실의 후원을 얻어 종파의 틀을 갖추었다. 1097년(숙종 2)에 천태종의 근본 사찰인 국청사가 완공되고, 1101년(숙종 6)에 천태종 승려를 대상으로 하는 승과가 실시되었다. 이로써 천태종은 명실 공히 고려 불교의 주요한 종파로서 그 위상을 공고히 하였다. 천태종의 수용은 본래 광종대에 시도된 적이 있었다. 광종은 중국 오월 왕의 요구에 따라 고려에 전하는 천태종의 전적을 보내 주면서 제관(諦觀)과 의통(義通)을 파견하여 천태학을 배워오게 하였다. 이들은 오월에 들어가서 천태학을 수학한 후 그 교리를 더욱 발전시켜 천태종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제관은 천태종의 교판론을 설명한 『천태사교의(天台四敎義)』를 저술하였고, 의통은 중국 천태종의 16대 조사로 존숭되었다. 하지만 두 승려는 모두 중국에서 활동하다가 입적하였기 때문에 이들의 사상이 고려에 전해지지 못하였고, 천태종이 종파로서 등장할 수도 없었다.

천태종의 개창을 주도한 사람은 의천이었다. 의천은 송나라에 유학하던 중에 천태종의 종장 자변 종간(慈辯從諫)에게 천태학의 요체를 배우고, 귀국하는 길에는 천태종의 출발지인 천태산에 올라 천태 지자 대사(智者大 師)의 탑을 참배하면서 고려에 천태종의 가르침을 널리 펴겠다고 맹세하였다.173) 귀국한 이후에는 맹세한대로 천태학을 강의하고 승려를 모아 천태종을 독자적인 종파로 성립시켰다. 국청사의 개창을 주도하고, 처음 실시된 천태종 승과를 주재한 사람도 의천이었다.

그런데 천태종이 종파로 독립할 수 있기까지는 의천의 노력 못지않게 왕실의 후원이 절대적이었다. 의천의 어머니(문종의 왕비)인 인예 태후는 국청사의 개창을 발원하고 시주하였으며, 국청사가 완공되기 전인 1092년(선종 9)에는 견불사(見佛寺)에서 천태예참법(天台禮懺法)을 거행하였다. 또한, 의천의 바로 위 형인 숙종은 천태종의 승과를 거행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고, 자신의 원찰인 천수사를 창건하면서 이를 천태종 사찰로 하였다. 이와 같은 왕실의 후원이 없었더라면 천태종은 독립된 종파로 성립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실제로 천태종에서 만든 의천의 비문을 보면 의천이 유학하기 이전부터 인예 태후는 천태종의 개창을 발원하고 있었으며 의천의 천태종 개창은 이러한 어머니의 뜻을 따른 것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의천의 천태종 개창은 단순히 어머니의 뜻을 따르는 것 이상으로 당시 불교계의 경향을 개혁하려는 의지의 소산이었다.

의천이 천태종을 개창한 가장 큰 이유는 교학과 관행을 아울러 닦도록 한 천태종의 가르침에 공감하였기 때문이다. 의천이 당시의 불교계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사상적 불만은 교학 불교는 이론적인 탐구만을 주로 하고 관행을 등한시하며, 반대로 선종은 참선만을 중시하고 이론적 탐구를 게을리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속한 화엄종의 승려가 교학만을 위주로 하면서 관행을 닦지 않는 것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당시의 선종 승려가 이심전심(以心傳心)의 교외별전(敎外別傳)을 내세워 경전의 내용을 무시하는 태도에 대해서도 비판하였다.174)

이런 점에서 그가 징관의 사상을 받아들여 교관겸수를 주장한 것과 천태종을 유포하고자 노력한 것은 사상적으로 통한다. 다만 개혁하고자 하는 구체적 대상에는 차이가 있었다. 교관겸수의 주장이 교학만을 위주로 하는 화엄종 내부의 개혁을 위한 것이었던 데 반해 천태종의 가르침은 교학을 등한시하는 선종의 개혁을 위한 것이었다. 이는 의천이 개창한 천태종에 소속된 승려가 모두 선종 출신이라는 점에 잘 나타나 있다. 천태종이 처음 개창될 때 참여한 승려는 기존의 거돈사(居頓寺), 신□사(神□寺), 영암사(靈巖寺), 고달사(高達寺), 지곡사(智谷寺) 등 다섯 개 사찰의 1,000여 명과 직접 의천의 문하로 들어온 300여 명 등 모두 1,300여 명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본래 선종에 속해 있었다.175)

<거돈사 원공 국사 승묘탑>   
원래 강원도 원주 거돈사에 있던 승탑으로 현재 국립 중앙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광종 때 오월 지방에 유학하여 영명 연수 문하에서 천태종을 배운 원공 국사 지종(930∼1018)의 부도이다.

반면 의천이 속한 화엄종을 비롯한 교학 불교에 몸담고 있다가 천태종에 참여한 승려는 한 사람도 없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고려의 천태종은 이후 선종의 한 부류로 인식되었다. 천태종의 승과는 선종의 승과 중 하나로 인식되었고, 승계도 선종의 승계와 동일하였다.

이처럼 의천은 당시 고려의 화엄종과 선종이 갖는 사상적 한계를 각기 교관겸수와 천태종의 가르침으로 개혁하려고 하면서 두 종파를 모두 주관하였다. 천태종을 개창한 이후 천태종 최고 지도자의 위치에 오른 의천은 동시에 여전히 화엄종의 최고위 승려로서 화엄종을 이끌었다. 이러한 두 종파의 양립이 본래 그가 의도한 것인지 아니면 최종적으로는 두 종파를 통합하기 위한 과도기적인 모습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의천이 주도한 두 종파가 교학과 관행을 함께 수행하는 비슷한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궁극적 목적이 교종과 선종을 아우르는 새로운 종파를 만들려고 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의천은 천태종이 공식적으로 개창된 1101년(숙종 6)에 입적하였고 이후 화엄종과 천태종은 각기 별개의 길을 가게 되었다.

한편, 의천이 개창한 천태종에 참여한 선종 승려의 다수는 광종대에 법 안종을 받아들인 승려의 후계자로 나타나고 있다. 거돈사, 영암사, 지곡사는 각기 광종대에 중국에 유학하여 법안종을 배워온 지종, 영준, 석초(釋超)가 주석한 사찰이었고, 고달사는 광종대 불교 정책을 지원하면서 이들의 중국 유학을 권유한 찬유가 머물던 곳이었다. 법안종은 교학 불교와 선종을 종합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고 사상적으로도 천태의 교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었으므로 법안종을 수학하던 승려는 쉽게 천태종으로 전향할 수 있었던 듯하다. 법안종을 수용하여 불교계를 변화시키려던 광종의 개혁은 당대에는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지만 의천이 개창한 천태종에 이들이 대거 참여함으로써 다른 모습으로 불교계의 변화에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의천의 천태종 개창은 당시 선종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천태종 개창이 선종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하였을 뿐 아니라 의천의 적극적인 권유에 따라서 선종 승려 다수가 천태종으로 전향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에 선종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적극적으로 대응한 선종 승려도 많았다. 가지산문 출신의 학일(學一, 1052∼1144)은 의천이 여러 차례 천태종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지만 응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의천이 『원각경』 강의를 위한 법회를 개최하고 강사로 초청하였을 때에는 선종과 교종이 섞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거절하였다.176)

의천이 교학과 관행의 겸수를 주장한 것과 달리 그는 선종의 독자성을 지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였다. 의천과 그를 후원한 숙종이 죽은 이후 천태종은 활발하게 전개되지 못하였으며, 선종은 다시 세력을 만회하게 되었다. 예종대에는 선종 승려인 담진(曇眞)이 왕사와 국사로 임명되었으며, 인종대에는 학일이 왕사로 임명되었다. 예종의 원찰로 건립된 안화사(安和寺) 역시 선종 사찰이었다.

담진은 사굴산문 출신으로 의천과 비슷한 시기에 송나라에 유학하여 선승들과 교류하면서 새로운 문자선(文字禪)의 경향을 수학하고 돌아왔다. 당시 송나라에서는 사대부 사이에 선종이 유행하면서 참선 수행과 함께 선 사들의 공안(公案)에 대하여 이론적으로 탐구하는 경향이 있었다. 송고(頌古)라고 부르는 이러한 경향은 임제종의 분양 선소(汾陽善昭, 947∼1024)와 황룡 혜남(黃龍慧南, 1002∼1069) 그리고 운문종의 설두 중현(雪竇重顯, 980∼1052) 등에게서 시작되어 선승과 사대부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였다. 이들은 또한 경전을 중시하지 않던 경향에서 벗어나 심성(心性)에 대하여 해명하는 『능엄경(楞嚴經)』을 중시하였다. 담진이 이러한 송나라의 선풍을 배우고 귀국한 이후 고려에서도 비슷한 경향이 전개되었다. 사대부와 선사의 교류가 활발해졌으며 선 수행에서 송고와 『능엄경』을 중시하는 경향이 생겨났다.

<문수원 중수비 탁본>   
김부식의 동생 김부철(金富轍, 1079∼1136)이 글을 짓고 탄연이 글씨를 쓴 문수원 중수비를 탁본한 것이다. 문수원은 오늘날의 춘천 청평사인데, 원래 이름은 보현원이었다. 인종 때 이자현이 이곳에 은거하면서 이름을 문수원이라 바꾸고 불법을 공부하였다. 1130년(인종 8)에 세웠다.

벼슬을 버리고 청평산에 은거하며 거사로서의 생활을 추구하였던 이자현(李資玄)은 이러한 경향의 대표적인 사람이다. 외척인 인주 이씨 출신인 그는 산에 암자를 짓고 『능엄경』의 사상에 근거한 선 수행을 하면서 담진을 비롯한 선승들과 긴밀하게 교유하였다.177) 윤관의 아들인 윤언이(尹彦頤)도 금강 거사(金剛居士)로 자처하면서 선종 승려와 평생 참선을 함께할 것을 맹세하였다.178) 담진의 제자 탄연(坦然, 1070∼1159)은 스승의 사상을 계승하는 한편 중국 강남 지방의 임제종 승려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스스로 임제의 9대손이라고 자처하였다.179)

[필자] 최연식
173)의천, 『대각국사문집』 권14, 「대송천태탑하친참발원소(大宋天台塔下親參發願疏)」.
174)김부식(金富軾) 찬, 「영통사대각국사비(靈通寺大覺國師碑)」.
175)「선봉사대각국사비음기(僊鳳寺大覺國師碑陰記)」.
176)윤언이(尹彦頤) 찬, 「운문사원응국사비(雲門寺圓應國師碑)」.
177)『동문선(東文選)』 권64, 「청평산문수원기(淸平山文殊院記)」.
178)최자(崔滋), 『보한집(補閑集)』 권상, 윤문강공언이(尹文康公彦頤).
179)이지무(李之茂) 찬, 「단속사대감국사비(斷俗寺大鑑國師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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