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3장 불교 사상과 신앙의 사회적 확대2. 불교 개혁의 시도와 좌절결사 불교의 등장과 발전

재조대장경의 제작

무신 집권기인 1231년(고종 18) 몽고의 군대가 고려에 침략해 들어왔다. 최씨 무신 정권은 일단 몽고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하고 강화 조약을 맺은 뒤 이듬해에 곧바로 강화도로 천도를 단행하면서 결사 항전을 선언하였다. 이후 몽고는 1259년(고종 46) 고려 정부가 최종적으로 항복할 때까지 계속 군대를 보내어 전국을 유린하였다. 이 과정에서 고려 사회가 겪은 피해는 막심한 것이었는데, 불교계로서는 특히 부인사에 보관되어 있던 대장경판이 몽고군의 방화로 불타 없어져 현종대 이래 장기간에 걸친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사태를 맞게 되었다. 대장경이 의미하는 국가의 문화적 자존심을 고려할 때 이러한 사태는 간과할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곧바로 대장경을 다시 만드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또한, 이때에는 본래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하여 대장경 제작을 발원하였던 것을 상기하면서 대장경을 다시 만드는 공덕으로 몽고군을 물리칠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하였다. 1237년(고종 24) 대장경을 다시 만드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 이규보(李奎報)가 국왕을 대신하여 지은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에는 대장경을 다시 만드는 고려인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해인사 대장경 경판>   
고려가 대몽 항쟁을 펼친 16년 동안에 걸쳐 제작된 속칭 ‘팔만대장경’ 경판 중 일부이다. 경판이 완성된 뒤 강화도 선원사에 보관하다가 1398년(태조 7) 해인사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런 큰 보배가 없어졌는데 어찌 일이 힘들다고 하여 다시 만드는 것을 꺼리겠습니까. 이제 국왕과 관료들은 함께 큰 서원을 발하여 담당 관청을 두고 일을 시작하도록 합니다. …… 원하옵건대 부처님과 여러 천신들은 이 간곡한 정성을 굽어 살펴 주십시오. 신통한 힘을 빌려 주어 오랑캐들을 멀리 쫓아내어 다시는 우리 국토를 밟는 일이 없게 해 주시고, 전쟁이 그치어 나라가 편안하며 국운이 만세토록 유지되게 해 주십시오.190)

대장경의 재조(再雕) 작업은 담당 관청인 대장도감(大藏都監)의 관리 아래 이뤄졌다. 대장도감은 강화도의 본사(本司)와 함께 남해에 분사(分司)를 두었는데, 본사에서는 대장경 제작을 위한 계획 수립과 경비의 조달 등을 담당하였고 대장경의 실제 판각 작업은 주로 분사에서 이뤄졌다. 남해는 대장경판의 재료가 되는 목재를 조달하기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고, 계속되는 몽고의 침략으로부터도 비교적 안전한 지역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지역은 대장경 제작 비용의 대부분을 담당하였던 무인 집정자 최 우와 그의 처남 정안(鄭晏)의 경제적 기반이 있는 곳으로 필요한 경비의 조달에도 유리하였다. 최씨 정권은 최충헌 이래 진주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 식읍(食邑)을 하사받아 경제적 기반을 삼고 있었고, 하동을 본관으로 하는 정안 역시 남해에 토지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대장경의 재조 작업은 1251년(고종 38)에 최종적으로 완료되었다. 이 재조대장경에는 모두 1,496종 6,568권(639함)의 불경이 포함되었는데, 고려 전기의 대장경에 비하여 500여 권 이상 늘어난 것이었다. 완성된 대장경판은 총 8만 1,137개이며 하나의 경판 양쪽에 경전을 새겼으므로 인쇄된 대장경의 분량은 16만 면을 넘는다. 대장경을 새로 제작할 때에는 단순히 기존 대장경을 그대로 판각하는데 그치지 않고 새로 대장경에 포함될 경전의 목록을 작성하고, 여러 판본을 모아 가장 완전한 내용이 되도록 노력하였다. 이러한 목록 작성과 교감 작업을 주도한 사람은 화엄종 승려인 수기(守其)였다. 승통이던 수기는 불타버린 대장경의 인쇄본을 저본으로 하고 거기에 송나라 및 거란의 대장경, 그리고 그 밖에 구할 수 있는 여러 판본을 대조하여 최선본을 작성하였다. 이와 같은 여러 판본의 교정 내용은 그가 편집한 『고려국신조대장교정별록(高麗國新雕大藏校正別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한편, 대장도감에서는 대장경에 포함되는 불경 이외에 선과 화엄에 관련된 몇 종류의 책을 추가로 판각하였다. 그것은 『종경록(宗鏡錄)』, 『조당집(祖堂集)』, 『증도가(證道歌)』,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선문염송(禪門拈頌)』, 『수현기(搜玄記)』, 『탐현기(探玄記)』, 『법계도원통기(法界圖圓通記)』, 『십구장원통초(十句章圓通鈔)』, 『지귀장원통초(旨歸章圓通鈔)』, 『삼보장원통기(三寶章圓通記)』, 『교분기원통초(敎分記圓通鈔)』, 『대장일람집(大藏一覽集)』 등이다. 이 책들은 당시 대장경 제작을 주도한 화엄종 승려와 무인 집정자의 후원을 받던 수선사 승려의 필요에 따라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균여의 저술인 『법계도원통기』, 『십구장원통초』, 『지귀장원통초』, 『삼보장원통기』, 『교분기원통초』 등은 그동안 필사로 전해지던 것으 로, 이를 통해 의천에게 비판받은 균여의 사상이 다시 전면에 드러나게 되었다. 이 책들은 개태사 주지 천기(天其)가 화엄종 사찰의 문헌 속에서 발굴한 것으로 그 제자들이 간행하였다. 천기는 대장경 간행을 주관한 수기와 가까운 사이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완성된 대장경판은 추가로 판각된 것과 함께 강화도로 운반되어 대장경판당에 보관되었다. 고려가 몽고에 항복하여 개경으로 환도한 이후에도 계속 강화도에 보관되어 있던 대장경판은 1398년(태조 7)에 해인사로 옮겨 봉안되었다.

<해인사 장경각 내부>   
불교의 힘으로 몽고의 침략을 이겨내려는 염원을 담아 제작된 고려의 재조대장경, 즉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는 합천 해인사 장경각의 내부 모습이다.

고려의 재조대장경은 근대 이전에 동아시아에서 제작한 대장경 중 유일하게 판본이 온전하게 남아 있으며, 또한 다양한 판본을 대조한 꼼꼼한 교정으로 가장 완전한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다른 곳에는 전해지지 않는 불경도 여러 종 수록하고 있다. 고려 전기와 후기에 각기 제작된 대장경은 당시 사회에서 불교가 담당한 역할과 위상을 상징하는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고려 대장경의 인쇄본은 고려 말부터 일본에 활발하게 전래되었다. 불교를 숭상한 일본의 영주들은 왜구를 단속하는 대가로 대장경 인쇄본을 요구하였고 조선 초에는 억불 정책을 기회로 하여 경판 자체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전해진 고려 대장경은 일본 불교 문화의 발전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다. 17세기 일본에서는 고려 대장경을 번각하여 대장경을 제작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으며, 근대 이후에 편찬된 일본의 대장경도 대부분 고려 대장경을 저본으로 하였다.

[필자] 최연식
190)이규보,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권25,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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