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3장 불교 사상과 신앙의 사회적 확대3. 불교 사상과 신앙의 사회화불교 신앙의 실제 모습

사경

사경은 공덕 신앙의 대표적인 형태로 글자를 그대로 베껴 쓴 경전을 말한다. 사경은 본래 불교의 가르침을 널리 펼치기 위하여 경전을 서사(書寫)하는 일이었지만 서사하는 행위 자체가 공덕을 쌓는 일이 되기도 하였다.269) 그러다 목판본 등 인쇄 경전이 출현하면서 불교 사상의 유포라는 일차적인 의미가 상실되고 공덕이라는 이차적 의미가 중시되어 정성을 들인 아름답고 섬세한 장식경(裝飾經)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즉, 공이 많이 든 종이에다가 금이나 은으로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등 온갖 정성을 다하여 공덕이라는 의미를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변화한 것이다.

<감지은니 법화경의 표지>   
1330년(충혜왕 1)에 이신기가 아버지의 장수와 돌아가신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사경한 것이다. 표지에는 제목이 금색 글씨로 쓰여 있고 주위에 네 개의 화려한 꽃무늬가 금색과 은색으로 그려져 있다. 사경 공덕을 강조한 『법화경』은 고려시대에 가장 즐겨 사경되는 경전이다.

우리나라의 사경은 신라시대부터 있어 왔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경은 통일신라 경덕왕대의 『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권43이다. 현존하는 고려 사경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006년(목종 9)에 감지(紺紙)에 금자(金字)로 쓴 『대보적경』이다. 이후 1047년(정종 12) 『대반야바라밀다경』, 1055년(문종 9), 1081년(현종 9) 『법화경』 사경 등이 현재 남아 있다. 이 밖에도 기록에 의하면 고종대까지도 사경이 성행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경이 대대적으로 유행한 것은 원 간섭기 이후의 일이다. 이전부터 있던 사경 및 대장경 간행의 전통에 더하여 원나라와 교섭한 영향으로 사경이 유행하였다. 이 시기 사경의 특징은 국왕 발원 사경이 많다는 점과 밀교와 관련된 경전을 사경한 예가 많다는 점이다. 밀교 경전은 아니지만 사경 공덕을 강조한 『법화경』은 가장 즐겨 사경되는 경전이었다. 『법화경』은 듣기만 해도 공덕이 있고 자신이 필사하거나 남을 시켜서 필사해도 공덕이 있다고 하였으며, 게송(偈頌)만 외워도 지옥이 비고, 반 글자의 경전을 베껴도 천당으로 화한다고 하는 등 사경 공덕을 강조하였다.

<감지금니 화엄경 보현행원품 변상도(紺紙金泥華嚴經普賢行願品變相圖)>   
1341∼1367년 사이에 제작된 『화엄경』 보현행원품에 대한 변상도이다. 뒷면에 사성기가 있어 제작된 배경을 알 수 있다. 당시 행원품 외에도 『장수경』, 『미타경』, 『부모은중경』 보문품에 대한 사경도 함께 이루어졌다.

고려의 사경은 크게 국왕이 발원하여 제작된 것과 일반 관료의 발원으로 조성된 것이 있다. 국왕 발원 사경은 국가와 왕실의 안녕을 위한 공덕의 의미를 사경에서 찾고자 한 것으로, 고려 전기에는 사찰에서 부분적으로 사성(寫成)되었지만, 충렬왕 이후에는 사경 전담 기구인 금자원(金字院)과 은자원(銀字院)을 설립하여 대량으로 이루어졌다. 사경은 왕실뿐만 아니라 일반 관료 사이에서도 공덕 신앙으로서 크게 유행하였다. 원나라 황제 인종(仁宗)의 만년(萬年) 및 심왕(瀋王, 충선왕)의 복수무강(福壽無疆), 당금주(當今主, 충숙왕)와 문무 백료(文武百僚)의 강녕(康寧)을 빌며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국태민안을 기원하며 시주한 사람의 복을 빌고 있는 1315년(충숙왕 2) 신 당주(申當住) 발원의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사경이라든지,270) 황제의 만년(萬年)을 빌고 앞서 세상을 떠난 부모가 고해(苦海)에서 벗어나 다음 세상에 낙(樂)을 얻을 것을 빌며 부부가 현세에서 수복(壽福)을 더하고 재앙이 없을 것과 다음 세상에 극락왕생할 것을 발원한 1337년(충숙왕 후 6) 최안도(崔安道) 부부 발원의 『화엄경』 사경은271) 사경 신앙의 모습을 잘 보여 준다.

<감지금니 화엄경의 사성기>   
1337년에 최안도 부부가 발원하여 사경한 『화엄경』의 사성기 부분으로 고려시대 사경 신앙을 잘 보여 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대장경 사경과 관련된 공덕 신앙은 원나라에서 크게 유행하였다. 원나라는 고려에 사경 제작, 사경승 파견, 사경지의 공급 등을 수차례 요구하였는데, 이는 고려의 경전 간행 전통에 대한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272) 민지(閔漬, 1248∼1326)는 “대장경을 사성한 것이 금자·은자·묵자가 있고 인출한 것이 요본(遼本)·송본(宋本)·향본(鄕本, 고려본)이 있는데 향본은 유행하는 판으로 예로부터 내외의 명찰(名刹)에 있지 않은 적이 없다.”고273) 하여 경전 간행과 사경을 고려의 전통이라 언급하였다.

고려 후기에는 단편적인 경전을 사성하기도 하지만 발원문에 나오는 함수(函數)가 대장경의 함수를 나타낸다든가 특정 시기에 사경 기록이 집중되는 것 등으로 미루어 1328년(충숙왕 15) 완성된 금서밀교대장(金書密敎大藏) 130권의274) 예처럼 사경으로 대장경을 조성한 경우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대장경을 국가적인 차원에서 사경하였던 것은 대장경을 제조하던 고려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다만 그 의미가 공덕에 한정되면서 대규모의 대장경 제조보다는 장식성이 강하고 화려한 금은 사경으로 나타났다.275)

충렬왕대에는 금자원과 은자원을 설치하고276) 본격적으로 사경을 제작하였다. 이 시기 고려에서는 국가적 차원에서 왕실이 주도하여 금은으로 대장경을 사경하는 대규모의 불사를 자주 벌리곤 하였으므로, 금자원이나 은자원에서의 사경은 장기간에 걸쳐 대장경을 모두 필사하는 작업일 가능성이 크며, 특정 교단에서 주도하였다기보다는 종파를 초월하여 유행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것은 현존하는 사경 발원문 중 승려가 참여한 사경 중에는 선종 승려의 참여가 많이 보인다는 점이다.277) 1289년(충렬왕 15) 금자대장경이 완성되자 왕이 금자원에 직접 행차하여 경찬 의식(慶讚儀式)을 베풀어 대장경이 완성된 것을 기념할 정도로 대장경 사경은 국가적인 불교 행사였다.278) 이러한 사경 역시 고려 말 불교가 쇠퇴하면서 화려한 금자·은자 사경 대신 백지에 먹으로 쓰는 사경이 주로 제작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공덕을 위한 사경은 조선 초 잠시 조성되다가 경전 인쇄를 대신하는 필사본만이 제작되었다.

[필자] 강호선
269)권희경, 『고려 사경의 연구』, 미진사, 1986, 208쪽.
270)권희경, 앞의 책, 402∼407쪽.
271)권희경, 앞의 책, 421∼422쪽.
272)강호선, 앞의 글, 20쪽.
273)주남서(周南瑞) 편(編), 『천하동문(天下同文)』 전갑집(前甲集)7, 민지, 「고려대장경이안기(高麗大藏經移安記)」, 장동익, 『원대 여사 자료 집록』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7, 92∼93쪽.
274)이제현, 『익재난고(益齋亂藁)』 권5, 「금서밀교대장서(金書密敎大藏序)」.
275)강호선, 앞의 글, 21쪽.
276)『고려사』 권123, 열전35, 염승익(廉承益).
277)강호선, 앞의 글, 21쪽.
278)『고려사』 권30, 세가30, 충렬왕 15년 윤10월 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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