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20세기 여성, 전통과 근대의 교차로에 서다를 내면서

근대 이전의 여성은 아버지나 남편 또는 자식과의 관계로 표현되는 존재였다. 여성은 여성 주체가 아닌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드러냈다. 따라서 여성이 자신을 공식적으로 드러내고자 할 때는 ‘누구누구의 처 아무개 씨’, ‘과녀 아무개 씨’, ‘누구누구의 어머니’라고 표현하였다. 양반 가문 부인 가운데 저술 활동이나 예술 활동을 할 경우에는 당호(堂號)를 썼고, 신분이 낮을 때는 ‘소사(召史)’를 쓰기도 하였다.

또한 어린 여자 아이는 ‘간난이’, ‘섭섭이’, ‘이쁜이’ 따위로 불리다가 결혼 뒤엔 ‘영광댁’ ‘안성댁’ 따위로 불리는 게 고작이었다. 그래서 여성을 지칭했던 용어도 여성(女性)이 아닌 부녀(婦女), ‘누구누구의 처 아니면 딸’이었다.

여성이 더 이상 ‘섭섭이’이가 아닌 독자적인 이름을 갖게 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였다. 또한 여성이 부녀가 아닌 여성으로 자신의 정체성과 권리 등을 선언하였던 것도 20세기 들어와서였다. 물론 19세기 말부터 그러한 움직임은 서서히 진행되었다.

우리의 관심은 독립적인 이름을 갖게 된 “20세기 여성들은 타자와의 관계가 아닌 독립적인 개체로 얼마나 독자적인 삶을 이루어왔는가”에 있다.

이에 대한 답을 구하는 과정은 쉽지 않겠지만 우리는 ‘여기저기에 널려 있는 것들을 정리한다.’는 생각으로 시작하였다. 공사영역에 두루 걸쳐 있는 ‘소비 - 계 - 교육 - 가정(부엌) - 신체(월경)’로 나누어 이루어졌다. 이 고리들은 서로 어긋나 있지만 한편으로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소비는 사회적 소통 공간을, 계는 소비와 생산을 연계하는 공사영역의 경계를, 교육은 여성 성 역할의 재생산 공간인 동시에 그러한 성 역할을 거부할 수 있는 틈새를, 부엌은 주부들의 전적인 공간이라는 사적 영역을 제공하였고, 가장 개인적이라고 간주되는 몸은 월경이라는 고리를 통해 접근하였다.

물론 ‘소비 - 계 - 교육 - 가정(부엌) - 신체(월경)’의 범위들은 칼로 무를 자르듯 공사영역을 분명하게 나누어 보여 주지는 않는다. 사실 소비는 공적 영역이고 부엌은 사적 영역이라는 구분은 느슨한 줄긋기에 불과하고 이 연구에서 다룬 모든 범위들은 공적 영역이면서 사적 영역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이 연구는 화륜차(火輪車)에서부터 KTX까지라는 식의 직선적 시간 개념으로 20세기 여성사를 파악하려 하지 않았다. 주제에 따라 한 시기를 강조하기도 하였으며 어떻게 이 범위들이 우리 근현대사와 관계를 맺고 여성의 삶에 관여하고 있는가를 다루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또한 이 범위들은 모두 자본주의 체제에 그리고 가부장제의 체계에 포섭되어 있지만 그 포섭을 균열 내는 지점인 틈새에 주목하고자 하였다.

제1장 ‘여자여 외출하라’는 여성과 소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20세기에 한국 사회가 경험한 변화는 어느 특정 분야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는데 여성의 주관적 의식이나 객관적 지위, 사회적 통념에도 커다란 변화가 나타났다. 특히 소비 생활과 여성의 관계는 더욱 극적으로 바뀌어 왔다.

자본주의의 산업화는 생산과 소비의 혁명을 초래하고 공장과 가정을 동시에 창출하였다. 그러나 20세기 내내 사회의 관심은 주로 생산과 공장에 집중되어 있었다. 가정은 노동 공간이 아닌 휴식 장소로, 가정에서 이루어 지는 소비 역시 부차적인 행위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생산하는 남성과 소비하는 여성의 서열도 자동적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후기 자본주의를 거치면서 생산이 아니라 소비가 오히려 사회의 중심 동력으로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이와 함께 소비 주체로서의 여성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오늘날 전체 시장에서 여성 소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대략 80∼90%라고 한다. 광고를 보고 구매 결정을 하는 사람은 대체로 여성이며 실제로 물건을 구입하는 사람도 대부분 여성이고, 나아가 가정에서 여성의 결정권은 압도적이다.

20세기를 지나면서 소비 시장에서 벌어진 일은 한마디로 여성을 소비 자본주의에 포섭하는 것이었다. 여성을 어떻게 소비로 끌어들이는가가 소비 시대의 관건이 되었다. 곧 여성 소비자를 충동적이며 자본주의의 덫에 걸린 욕망의 노예로 보든, 스스로의 욕구를 실현하기 위해 능동적으로 나선 소비 주체라고 보든, 여성은 우리 시대를 압도하고 있는 소비문화의 주인공임에 틀림없다.

지난 100년 동안 여성이 소비 사회의 주인공으로 부상하는 과정은 무엇보다도 가족 안에서 여성의 지위와 권리가 증대되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그에 비례해서 여성은 자본주의적 소비주의의 적극적 포섭 대상이 되었고, 상업주의의 희생양이라는 이미지 역시 강화되었다. 오늘날 소비의 대상은 단지 물건이나 용역에 그치지 않는다. 몸도, 감정도, 이미지도, 심지어 인간관계조차도 상품으로서 소비되고 있다. 소비의 대상이 되는 상징과 기호는 양적·질적으로 상상의 한계를 초월하여 다양해졌다. 그에 따라 자기실현 욕구도 자칫하면 그러한 상징과 기호를 따라 끝없이 부유할 위험에 처해 있는지 모른다. 해방과 소외가 교차하는 소비사회의 이미지는 여성의 주체화라는 과제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제2장 ‘한 달 만의 외출’은 여성과 계에 관한 연구이다. 계는 조선 후기 동족 촌락이나 씨족 집단의 공동 작업, 친목, 상호부조 따위를 목적으로 광 범위하게 조직되었는데, 이 계를 구성하고 운영한 주체는 남성이었다. 그러나 6·25 전쟁을 전환점으로 여성이 중심이 되어 주로 경제적 목적의 계가 조직되었다.

6·25 전쟁으로 남성이 전쟁에 동원되어 죽거나 부상당하고, 징집을 피하려고 도피한 현실에서 여성은 남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게 되었다. 배우자의 유무나 나이에 관계없이 농촌 여성은 가사 노동뿐만 아니라 들일을 해야 하였고 도시 여성은 자금을 융통하여 행상, 노점상 같은 소규모 상업 활동에 나섰다. 전쟁의 피폐함은 여성의 생활을 고단하고 힘겹게 하였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행해지는 경제 활동은 가정의 경제권을 장악하거나 자녀 교육을 책임지는 등으로 여성의 지위를 변화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여성의 지위 변화에 커다란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여성이 주체가 되어 조직되었던 ‘계’였다. 이러한 특성을 반영하여 6·25 전쟁 뒤 여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계를 ‘부녀계’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이렇게 조직된 부녀계를 통해 여성은 이전과 다른 경제적 경험을 하였다. 그러나 여성이 계를 통해 얻은 경험이 단순히 경제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여성은 계를 조직하고 운영하는 과정에서 부계 가족 중심의 인간관계를 벗어나 이웃, 동창, 동업자, 학교 등으로 관계망을 넓힐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관계는 집을 사들이고 살림살이를 하는 데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거나 나아가 자기 사업을 하는 토대가 되었다.

제3장 ‘무식하면 짐승과 같습니다’는 여성과 학교, 교육에 관한 연구이다. 개항과 더불어 남성이든 여성이든 점점 더 많은 사람이 교육 기관의 증가로 기본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근대 교육 기관인 학교가 세워진 뒤에도 여전히 여성에게 가장 중요한 임무는 어머니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자연이 부여한 여성의 임무라고 생각되었다. 여성에게 허용된 교육은 제한되었으며 또 엄격하게 감시되었다. 그렇지만 학교나 가정에서 또는 그 밖의 다른 공간에서 표출된 여성의 배우고자 하는 열망은 이러저러한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읽고 쓰는 능력을 향상시켰다. 한편 여성이 교육 받을 기회가 확대된 것은 교육 제도의 발달뿐만 아니라 여성의 끊임없는 노력의 결실이었다. 교육이 여성에게 사회와 관계를 맺고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중요한 연결 고리이자 가장 분명한 방법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여성은 교육을 열망하였고 이를 위해 노력하였다. 교육을 통해 여성은 읽고 쓰는 능력을 향상시켰을 뿐 아니라 점차 생각하고 자기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단계로 나아갔다. 이러한 과정은 여성에게 이제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변화의 시작이었고 해방의 물꼬를 트기 시작하였음을 알려 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학생들은 매일매일 학교에 가는 거리에서, 학교에서 만나는 친구와의 일상에서, 그리고 책 읽기나 여행 등을 통해 넓은 세상과 문화를 체험하게 된다. 그리고 자의식의 확장을 가져왔다. 이렇게 매일 집 밖을 나가 보고 듣는 다종다양한 행위는 이전에 경험하지 못하였던 자유였다.

학교는 한편으로 억압과 감시의 공간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여성들이 함께 생활하고 책을 돌려 읽고 서로의 고민을 나누면서 공동체적 유대감을 만들어 나가는 곳이었다. 학교생활에서의 다종다양한 경험은 ‘충성하는’ 현모양처가 될 것을 강요하던 학교 체제에 작은 균열을 만들어 나갔으며, 여학생은 주체적 인간으로 자라고 있었다. 이러한 여성의 변화는 가족 제도, 사회의 변화를 이끄는 원동력이 될 수 있었다.

제4장 ‘반비간에서 주방으로’는 여성과 부엌에 관한 연구이다. 전근대 사회에서 서민의 부엌은 여성이 취사 노동을 하는 공간이자 가내 노동을 하는 공간이었다. 부엌에서는 매일의 식사 준비뿐만 아니라 계절마다 장 담그기, 젓갈 담그기, 김장 담그기 같은 저장과 관련된 일을 하면서 한 해의 먹을거리를 제조하는 일을 하였다. 또한 손을 보지 않은 먹을거리 재료를 보관하고 먹을거리를 다듬는 일은 부엌 주변의 앞·뒷마당 또는 창고에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부엌은 불과 솥이 있는 공간과 창고나 장독대 같은 저장 시설까지 포함하였다. 더불어 부엌은 여성의 노동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가사 노동의 장이었다.

근대 이후 부엌은 작업장이 아니라 사적인 공간으로, 주부의 공간으로 바뀌었다. 한국에서 ‘신가정’, ‘스위트 홈’ 등의 이름으로 가족 담론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시기는 1920년대이다. 이는 여성이 추상적인 인격으로서의 국민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가사와 육아를 통해 국가에 공헌하는 구체적인 국민으로 파악되었음을 의미한다.

1960년대까지 도시의 중산층 가정에는 대부분 ‘식모’가 있었다. 그러나 점차 ‘주부’는 어떠한 조력자 없이 혼자서 부엌일을 담당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놓였으며, 이 과정에서 부엌은 ‘주부’라는 존재를 탄생시켰다. 이는 가정주부를 중심으로 한 근대화, 근대적 가족의 탄생이라는 역사적 과정과 짝을 이루었다.

1970년대까지 부엌 개량(서구화, 입식화)은 근대적이고 문화적인 생활의 표본으로 제기되었다. 동시에 부엌 개량의 담당자로서 주부는 가정의 중심으로 자리 매김되었다. 식모를 없애고 주부가 스스로 가정 살림을 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는 부엌 개량이 급선무였으며, ‘식모 없이 서구화된 부엌에서 주부가 직접 살림’ 하는 것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이는 국가가 가정을 매개로 사회 구성원을 국민화하는 과정에서 여성은 가정의 주부로, 남성은 가족 부양자로 호명한 결과이다. 여성이 국민의 이름으로 호명될 때, 여성이 차지하고 있던 공간은 가정이었으며, 부엌이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는 이미 입식화되고 서구화된 주택의 개량을 넘어서 주부의 서비스 개선과 감정 노동을 요구하였다. 주부는 이제 근대화의 기수에서 보람과 사랑의 화신으로 다시 태어나야 했다.

근대 가족의 표상인 ‘스위트 홈’은 이렇듯 소외된 여성의 노동으로 탄생되었으며 유지되고 있다. 부엌은 이러한 소외된 여성 노동의 장소이자, 여성의 소외된 노동을 유지하기 위해 역사적으로 재구성되는 공간이다.

제5장 ‘붓그러하면 큰 병이 생깁니다’는 여성과 월경에 관한 연구이다. 월경은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이 ‘현상’은 시대와 사회적 상황에 따라 특정한 방식으로 설명되어 왔다. ‘더러운 것’이기에 공식 행사에서 참여가 금기시되기도 하고, ‘부끄러운 것’이기에 조신하게 다뤄야 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월경 때의 신체 작용이 여성의 감정을 혼란시킨다고 여겨, 여성 범죄와 연결시키기도 하였다. 그런데 월경은 개인의 생리적 현상만이 아닌 정서적이고 사회적인 경험의 일부가 되어 왔다.

일제 강점기 월경에 대한 병리학적 담론은 근대적 신체에 대한 과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하였고, 의학의 시선은 여성의 역할, 여성성을 새롭게 구성하였다. 여성을 출산하는 신체로서 위치 지우는 ‘모성론’ 또한 널리 퍼졌다. 그러나 출산을 위해 보호받는 신체라는 생각이 생리 휴가의 요구와 연결된 일본과는 달리 식민지 조선에서는 여성 노동자의 처지와 연결되지는 않았다.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공장법을 언급하거나, 8시간 노동, 산전 산후 휴가가 요구되는 정도였다. 나아가 전시 체제기 모성은 동원 체제의 의무로서 강조될 뿐이었다. 한편 광복 뒤 근로 기준법이 제정되면서 일본을 모델로 한 생리 휴가가 도입되었으나 사문화된 조항에 불과하였다.

1960∼1970년대 가족계획 정책 속에서 월경에 대한 의학적 지식이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월경은 여성의 생식기와 연결되면서 ‘출산’과 연결된 것으로 이미지화되었다. 국가는 출산, 양육의 ‘모성’이 아닌 피임과 산아 제한을 통해 ‘모성’을 의미화시켰다. 성교육에서 월경은 2차 성징이자 임신 가능한 몸이 되는 것으로 설명되었다. 또한 남성의 사정과 월경이 사춘기의 상징으로 대비되면서, 월경은 사정과 달리 수동적이며 조용히 치러야 하는 현상으로 받아들여졌다.

1990년대를 지나면서 여성의 몸, 섹슈얼리티, 욕망을 둘러싼 여성 문화 운동이 일어났다. 이에 힘입어 사회적으로 금기시되어 온 월경에 대해 여성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월경을 하는 것에 대한 열등감이나 수치심을 극복하여 주체적으로 그리고 긍정적으로 월경을 경험하자는 생각 또한 대두되었다.

여성의 실제 경험과 그러한 경험을 매개하는 여성의 몸에 새겨진 문화적 의미 사이에는 늘 긴장이 있다. 깨끗함과 센스라는 차원으로 여성의 월경을 상품으로 관리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자본의 논리, 여성 특유의 어떤 성질을 자아낸다고 말하는 의학의 논리, 귀찮고 조용히 해치워야 하는 것으로 의미화하는 남성주의적 논리를 거부하고 자유롭게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는 ‘20세기 여성’이라는 큰 주제를 갖고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였다. 그러나 좀처럼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이 주제와 관련하여 ‘작은 것’에서 출발하기, ‘여성 주체’를 드러내기, ‘여기저기 널려 있는 것’을 정리하기 같은 몇 가지 원칙을 정하였다. 그렇게 해서 의견을 모아 결정된 범위가 ‘소비 - 계 - 교육 - 가정(부엌) - 신체(월경)’였다. 우리는 여성 잡지, 신문 따위의 문헌 자료를 이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미 발행된 구술 자료나 직접 구술을 받아 작업을 진척시켰다.

작업이 끝난 지금 처음에 우리들이 정한 원칙이 충실하게 결실을 맺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처음에 막연하기만 했던 지난 100년 간 여성의 일상에 조금은 접근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혼자 고민하던 문제를 함께 모여 의논하다 보면 어느새 뒤엉킨 실타래가 풀린 것처럼 이 경험이 여성사 연구에 우리를 깊숙이 끌어들일 것이다.

2007년 8월

성균관대학교 강사

[필자] 이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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