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1장 여자여 외출하라2. 여성의 장삿길

행상

여성의 사회 활동이 제한되었던 조선시대의 여성 노동은 대부분 가족을 단위로 이루어지는 가사 노동, 길쌈, 농사일 등에 집중되었다. 가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여성의 생산 노동은 강도나 중요성에서 결코 무시하기 어려운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 사회에서도 가정이라는 테두리를 넘어서서 대외적인 경제 활동에 종사하는 여성이 적지 않았다.

아손 그렙스트에게도 빨래터 풍경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여성이 그처럼 빨래는 공공연하게 하면서도, 장사는 체면 상하는 일로 생각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다.

(중산 계급의 여성들은) 어떤 종류의 장사라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이 직접 상행위는 할 수 없어 대신 여종들을 시켜 이를 담당케 한다. 단지 세탁물에 관해서만은 체면이 손상됨이 없이 받아들이고 빨래도 할 수 있다. 장사 행위는 여성의 체면이 손상되는 것이고 빨래 일은 여성의 품위에 맞는다는 이 독특한 사고방식.18)

<신윤복의 어물 장수>   
아낙네가 이고 있는 광주리에서 삐져나와 있는 생선은 말린 생선이 아니라 날생선이다. 한겨울이 아니면 해안이나 강에서 가까워 별다른 처리를 하지 않고도 날생선을 운반할 수 있는 지역에 한해 생선 행상들이 돌아다녔다.
<김홍도의 행상>   
장돌림이나 장돌뱅이는 일단 집을 떠나면 몇 개월 동안 행상을 한 후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특별한 거주지 없이 가족을 모두 이끌고 행상에 나서는 상인들도 적지 않았다. 부부로 보이는 그림의 두 주인공 가운데 아내는 생선 광주리를 이고 있으며 남편은 젓갈류를 담은 것으로 보이는 나무 광주리를 지고 있다.

그렙스트 같은 이방인에게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위계적 인식이나 여성의 이중적 존재 양식이 낯설기 짝이 없었지만, 그것은 당시 사회를 지배하는 가치이자 질서였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많은 제약에도 불구하고 상업 활동에 종사하는 여성이 존재하였다. 서울의 시전(市廛)에서 상점을 벌이고 있는 여성이 있는가 하면, 보부상(褓負商)에도 ‘여상단(女商團)’이 있었고, 전국 각지에서 5일마다 열리는 장시(場市)에 출입하는 여성도 있었다.

조선시대에 여성 상인이 활동하였다는 사실은 그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18세기의 풍속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신윤복(申潤福, 1758∼1813 이후)이 그린 어물 장수나 김홍도(金弘道, 1745∼1806 이후)가 그린 행상(行商)에는 생선 광주리를 이고 있는 아낙네가 등장한다. 바닷가 주변에서는 어부의 아내들이 광주리에 생선을 담아 머리에 이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직접 파는 경우가 많았다.

일제 강점기에도 생선 행상은 대부분 여성이었다. 어로 활동은 주로 남성이 담당하고 인근 지역을 대상으로 한 소규모 행상은 여성이 담당하는 식 으로 역할이 나뉘어져 있었던 것 같다. 또 여성이 주로 사용하는 여러 가지 잡화를 공급하는 일도 여성이 맡는 경우가 많았다. 생선 행상 외에 빗, 바늘, 장신구 등 여성이 사용하는 물건을 취급하는 방물장수도 대부분 아낙네였으며, 집 안에서 그들을 불러들여 물건을 구매하는 사람도 여성인 경우 많았다.

<새우젓 행상>   
여성의 시장 출입이 자유롭지 않았던 시대에는 직접 가정을 방문하는 여성 행상에게 물건을 사는 경우가 많았다. 부엌에서 사용하는 젓갈을 파는 행상도 여성이 많았는데, 이들은 일단 집을 나서면 몇 개월 동안 객지를 떠돌았다.

조선시대에는 서울의 운종가를 끼고 뻗어 있던 시전 가운데도 여인전(女人廛)이라고 하여 여성 상인으로만 구성된 상점이 있었다. 상설 점포인 여인전은, 과일을 판매하는 우전(隅廛), 바늘을 파는 침자전(針子廛), 족두리와 노리개를 파는 족두리전(簇道里廛), 감미료로 쓰는 엿을 파는 백당전(白糖廛), 채소전(菜蔬廛) 등으로 구성되었다. 조선시대의 공식 자료에서도 확인되는 여인전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었는지, 실제로 어떻게 운영되었는지는 정확히 밝혀져 있지 않다. 여성과 직접 관련된 상품을 판매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런 물건을 잘 아는 여성이 판매를 담당하고 소비자 역시 대개 여성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지역에 따라 여성의 상행위에 대한 인식에는 커다란 편차가 있었다. 삼남 지방에서는 여성의 외부 활동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지배적이었던 데에 반해, 북부 지방은 그렇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황해도 여성은 장사를 잘하기로 유명하였다. 황해도 여자라 하면 으레 광주리를 연상할 정도로 그들은 봄철부터 여름철에 걸쳐 광주리 하나 달랑 챙겨서 장삿길을 나섰다.

봄이나 여름철이 되면 서울의 골목골목에는 언진머리에 광주리를 이고 “조개젓 사오. 물조개젓이요. 단 것도 있고 소주도 있습니다. ……” 하고 둘씩 셋씩 앞뒤를 연이어서 돌아다니는 여자들이 잇다. 그들은 불문가지 황해도의 여자들이다. 황해도 여자들은 물론 농사도 잘하고 길쌈도 잘하지 만 그 중에도 특색은 이 광주리장사를 잘하는 것이다. …… 그들 중에도 물론 빈한한 사람도 있겠지만 대개는 상당한 집 가정에서도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지 않고 일종의 업무로 생각한다. …… 그들은 가을과 겨울에는 집에서 길쌈도 하고 다른 살림살이를 하다가 봄철이 되면 약간의 자본금을 가지고 남으로 서울을 향하야 온다. 행구(行具)라고는 광주리 한 개뿐이다.19)

<광주리를 인 여인들>   
광주리를 이고 둘씩 셋씩 앞뒤를 연이어서 서울의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면서 젓갈이나 소주를 파는 황해도 여자들은 광주리장사를 잘하기로 전국에서도 알아주었다. 그들은 가을과 겨울에는 집에서 농사일과 길쌈을 하다가 봄이 되면 약간의 자본금과 함께 광주리 하나 달랑 챙겨 길을 나섰다.

집에서 농사일과 길쌈, 각종 가사 노동을 담당하던 황해도 여성은 봄철이나 여름철이면 광주리를 이고서 장사를 다녔다.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서 광주리를 이고 다니며 장사를 하는 황해도 여성은 그렇게 번 돈으로 자녀에게 고등 교육을 시켰다. “광주리장사라고 천시하지 마라.”20)라는 말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러한 활동력과 경제력은 남편에게 절대 복종하는 여성의 이미지와 병존하기 어렵다. 가정 밖에서 경제 활동에 종사하는 여성은 남녀 관계가 변할 가능성, 변해야 할 필요성을 증대시키는 존재였음에 틀림없다.

여성 상인에게 물건을 사는 사람도 대개 여성이었다. 각 가정을 방문하는 행상은 안주인이 사용하는 장신구나 부엌에서 소비되는 생선 등 식료품 같은 것을 팔았기 때문이다. 특히 상품을 구매할 능력이 있는 상류층의 여성일수록 물건을 사려고 직접 가게나 시장으로 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옛날에는 장사들이 들어오지, 우리가 가서 사는 법이 별로 없었어요. 고기 장사도 이고 들어오고, 모든 면에 가지고 들어와서…… 장에, 그런 건 다른 사람들이 가죠. …… 심부름시키고…… 식모도 있고 바깥주인들이 심부름시키는 남자, 일하는 사람들도 있고 행랑들이 또 있고, 많았어요.21)

어쩌면 개울가에서 빨래를 하던 여인네들도 역시 여인전이나 여성 행상에게 물건을 사던 구매자였는지 모른다. 1960년대까지도 구매 여부에 대한 결정권, 가계에 대한 관리권을 남자가 행사할 때가 많았지만, 이미 조선시대부터 여성 상인과 여성 구매자가 서로 만나는 접촉면이 가정의 안과 밖의 경계 지대에 조성되었던 것이다.

[필자] 허영란
18)아손 그렙스트, 앞의 책, 181쪽.
19)「팔도 여자 살님사리 평판기」, 『별건곤(別乾坤)』 16·17, 1928년 12월, 134쪽.
20)「팔도 여자 살님사리 평판기」, 『별건곤』 16·17, 1928년 12월, 135쪽.
21)구술 노지욱(1913년생)·면담 허영란, 2006년 7월 17일(국사 편찬 위원회 소장 구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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