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4장 반비간에서 주방으로3. 여성의 공간

불삼으멍 책은 봤주

‘주방’이라는 용어는 1970년대 후반부터 쓰기 시작하였다. ‘주방’은 부엌이 다른 공간과 동일 평면상에서 계획되고 취사 작업은 물론 식사를 함께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확대되면서 기존의 부엌과 차별화하려는 의도에서 사용한 용어이다. 한편 1950년대에는 ‘부엌방’이라는 용어를 쓰기도 하였다. 이곳은 취사뿐만 아니라 복합적 용도의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1960년대에는 ‘식당방’이라 하여 식사 행위를 위한 별도의 공간이 있었다. 이러한 ‘식당방’은 서구 생활양식이 보급되면서 과도기적으로 생겨났지만, 널리 퍼지지는 않았다. 부엌에서 부엌방 → 식당방 → 주방으로 이어지는 부엌 명칭의 변화는 부엌에서 하던 노동의 성격과 부엌의 기능 변화를 잘 보여 준다.

부엌은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개방적이고 다기능적인 공간이었다. 무엇보다 여성이 취사 노동뿐 아니라 전반적인 가내 노동을 하던 장소였다.300) 산업화 이전 주부들은 산업 사회의 취업 주부와 마찬가지로 가사 돌보기와 자급자족을 위한 노동 외에 생산 노동에 종사하였다. 과거 대다수 의 부녀가 가내에서 하던 생산 노동을 현재는 일부 주부가 취업을 통해 사회라는 다른 장소에서 수행하고 있다. 오늘날의 취업 주부와 산업화 이전 사회에서 생산 노동을 수행하던 주부와의 차이점은 가정과 일터의 공간적 분리 여부이다. 남성은 가정과 일터의 분리로 일이 덜어졌지만 취업 주부는 경제 활동과 더불어 여전히 가사도 돌보고 있다.

<김매기>   
송석(松石) 이한철(李漢喆, 1808∼?)이 1월부터 12월까지의 농사 절기에 따른 노동 장면을 그린 풍속도 10폭 병풍 중 일부이다. 밭에 나가 김을 매고 집에서 방아를 찧고 곡식을 말리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전근대 시기 주부들도 가사 돌보기와 자급자족을 위한 노동 외에 생산 노동에도 종사하였다.
<방아 찧기>   

전근대 시기 여성의 가내 노동은 일반적이고 광범위하였다.

한국의 여자에게 부여되는 으뜸의 과업은 아내로서의 역할과 어머니로서의 역할이지만 남편이 빙충맞고 남에게 의지하기를 좋아하거나 심보가 사나울 경우에는 그의 돈벌이를 보조하여 가계를 도와야할 때가 많다. 비단은 한국의 중요한 산업으로 되어 있는데 그 공정에서 여자들이 큰 역할을 하며 시골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누에알을 간수하고 뽕을 먹이며 고치를 따고 실을 뽑는데 있어서 농부가 된 몰락한 선비의 아내들은 많은 시간을 보내며 물질적으로 가계를 돕는다.301)

가내 노동을 통한 생존은 비단 ‘빙충맞은 남편’이나 ‘몰락한 선비’의 아내에게만 해당되지는 않았다. 특히 누에치기, 직조(織造) 등은 여성 가내 노동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 밖에 장유(醬油) 담그기, 염색 등의 노동을 하였다. 최남선의 글에는 당시 여성이 가내 노동을 하는 여러 가지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길쌈>   
이한철이 1월부터 12월까지의 농사 절기에 따른 노동 장면을 그린 풍속도 10폭 병풍 중 일부로, 다듬이질·물레질·길쌈·실 널기 등을 그린 것이다. 직조, 누에치기 등은 여성 가내 노동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실 널기>   

한경(서울)에서 사인(士人)이라는 남자는 아무리 궁하나 속수무책하거늘 안에서는 바느질, 세탁 외에 계아(鷄鵝, 닭과 거위)를 기른다, 장주(醬酒)를 담근다, 초유(醋油)를 담근다, 염색을 한다, 박물(博物)을 판다하여 온갖 내조로써 가계를 버텨 가는 것이 도리어 비장의 느낌을 주었다.302)

최남선의 묘사와 같이 세탁은 물론 젓갈 담그기, 고추장·된장 담그기, 식초 담그기, 기름 짜기, 염색하기, 대추·밤·감·귤·석류 따위를 저장하는 일 등 여성 가내 노동의 종류는 다양하였다. 여성은 가족에게 음식과 의 복을 제공하는 것을 넘어 많은 부분 가계 유지에 필수적인 수입을 얻기 위하여 가내 노동을 하였다. 가내 노동의 종류에서 알 수 있듯이 여성이 노동하던 주된 장소는 부엌과 부엌 주변 공간이었다.

취사와 가내 노동이 부엌에서 이루어지는 실제적 기능이라면, 부엌은 여성의 은신처로서 문화적 기능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은신처로서의 부엌은 아궁이와 부뚜막에서 눈물을 흘리며 설움을 달래던 생활공간이었다. 또한 고자질이나 뒷공론의 장으로 기능하기도 하였다. 주 생활공간과 떨어져 있어 여성은 물론 여성을 둘러싼 뒷공론이 부엌에서 일어났고, 이로써 남성은 부엌을 출입하는 여성의 ‘입’을 항상 두려워하며 경계하였다. 여성은 우물가와 부엌을 중심으로 마을 여론의 형성을 주도하였다.

부엌은 일상용품의 수납공간이었다. 부엌은 마당비, 넉가래, 도끼, 부지깽이, 대야 등의 주거 생활 물품을 보관하는 만능 수납장이었으며, 집이 좁으면 더 많은 물건이 부엌에 들어갔다. 그 밖에 부엌은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빨래하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같은 상에서 밥을 먹을 수 없었던 여성은 부엌에서 ‘한술 떠 넣는 것’으로 식사를 가름하였다.303)

공식 교육에서 배제되었던 여성은 야학이나 독학으로 글공부를 하였는데, 여성은 부엌에서 배움의 욕구를 채웠다.

그때는 1등이 장원이주. 게메(글쎄)∼ 장원을 허면 그것만 채우라 하는 거라. 나는 아무렇게나 영행 봐도 또 장원이 되는거라. 그추룩행 하면 우리 친구들은 날 보명…… 용길이 어멍은 옛날 처녀 때 공부하멍 불 삼으멍도(불 때면서도) 솥뚜껑이에 글을 썼다…… 가라도(말해도)…… 나는 솥뚜껑에 글은 안 쓰고 그 불 삼으멍 책은 봤주…… 영…… 그 불 삼는 불에…… 경 책은 봤지. 이제도 신문 일일이 보고 그 책을 꼭 그런거 봐나 난 습관이 되부난 봐져(보게 돼). 경 봐져.304)

냇가, 개울가에서 목욕할 수 없었던 여성에게 부엌은 목욕 공간이었다. 부엌에 나무로 만든 목욕통을 놓고 가마솥에 끓인 물로 목욕을 하였다.

예전에 목욕도 자주 못하지 뭐. 여름에는 거렁에 가서도 하지마는 겨을에는 못하지. 옛날에 잘 사는 집에는 목욕통이 있었지. 나무로 맨든 거 있어. 그 옆에서 불 때고 목욕하고 그랬지. 우리네야 목욕하기도 힘들었지. 바아서(: 방에서) 더러 하고 부엌에도 가 씻고. 옛날에 그쿠 누가 씻고 하였어요? 대강 냄새 안 날 정도로 씨있지.305)

이렇듯 부엌의 다양한 기능은 196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까지 아파트가 증가하면서 사라졌다. 아파트의 보급은 부엌을 깨끗하게 만들었던 반면 부엌을 단순 기능화시키고 폐쇄적인 공간으로 만들었다. 아파트와 개량 한옥을 중심으로 부엌이 실내로 들어왔지만 높이가 방이나 마루보다 낮았고 취사 기능만을 수행하였으며, 주 생활공간과는 더욱 떨어져 폐쇄적인 공간이 되었다.306) 난방이 되지 않는 부엌에서 여성은 어떤 동료도 없이 혼자서 일하였으며, 손님 접대와 가족 간의 대화는 주로 안방과 마루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부엌 공간의 고립과 단순화는 남편 가부장을 중심으로 한 핵가족의 구성에서 여성의 경제 활동과 그 의미가 축소되는 시대 상황과 맞물려 있었다. 가족 부양자로서의 남편과 그 보조자로서의 아내로 구성되는 가족 모델은 고립되고 단순 기능화된 부엌에서 남편의 휴식을 위해 집안일을 정성스럽게 하는 아내 역할을 강화시켰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부엌의 기능은 다시 개방적이고 다기능적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된 원인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산업화 시기 부부를 중심으로 한 가족주의가 확고해졌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여성의 경제 활동이 증가하였다는 측면이다. 가부장의 권위가 확고해진 뒤 남편과 가족을 위해 봉사만 하는 ‘유폐된 아내상’은 스위트 홈을 완성하지 못하였다. 여성은 적 극적으로 가정에서 주도성을 얻어 나갔고, 적어도 가정에서는 여성의 뜻을 따라야 한다고 이야기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실제적으로 주방과 거실을 일대일로 배치한 주방 중심의 생활공간 구성으로 나타났다. 부엌의 확대와 주방을 중심으로 한 생활양식의 변화는 여성이 더욱 어머니 역할과 아내 역할에 몰입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하였다. 특히 부부 중심에서 자녀 중심으로의 생활양식 변화가 주방 기능의 변화를 주도하였다고 볼 수 있다. 자녀 중심의 생활양식은 전업 주부와 마찬가지로 취업 주부도 추구하였다. 주부는 자녀의 양육자이면서 감시자로 항상 아이와 함께해야 한다고 이야기되었다. 이런 요구는 아이를 위해서라면 집안의 어른이나 남편이 스스로 불편을 감수해야 할 만큼 강력하였다.

<아파트>   
1970년 4월에 준공된 한강 맨션 아파트의 전경이다. 아파트의 보급은 부엌을 입식화하고 깨끗하게 만들었지만 단순 기능화시키고 폐쇄적인 공간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부엌이야? 놀이터야? 경계가 없다. 일곱 살배기 원형이는 엄마만큼이나 주방에 있는 시간이 많다. 요리하는 엄마와 마주 보며 이것저것 만드는 것도 참견하고, 맛도 보고 때로는 함께 만들어 보기도 하고……. TV가 있는 거실보다 부엌이 더 재미있기 때문이다. 10년차 맞벌이 주부인 이혜원씨(37)도 마찬가지다. 원형이와 함께 있어 부엌에서 지내는 시간이 점점 길어진다. 외식도 줄고 만들어 먹는 일이 점점 늘어난다. 요즈음 유행하는 아일랜드형 부엌을 만들고 싶었지만 32평이라 잠시 뒤로 미루고 회전식 테이블과 이동식 테이블을 이용해 아일랜드형 부엌처럼 다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두 개의 테이블은 엄마의 간이 조리대로, 식구들의 보조 테이블로, 원형이와 엄마의 책상으로도 사용되는 만능 테이블로 부엌을 다용도 공간으로 바꾼 일등 공신이다.307)

<주방의 모자>   
부엌의 기능은 1980년대 중반 이후 다시 개방적이고 다기능적으로 바뀌었다. 주방은 이제 가정의 중심을 차지하였고, 그곳에는 주부와 아이가 있다.

가정의 중심에 주방이 있고, 그 주방에는 주부와 아이가 있다. 이곳에서 주부는 노동을 하지 않으며 아이들과 여러 놀이와 공부를 한다. ‘즐겁고 아름다운 부엌’에 대한 이러한 상상은 주부의 노동을 은폐할 뿐만 아니라, 노인과 남편을 집 밖으로 내몰았다. 여성은 아이의 양육과 감시에 전적으로 몰입하도록 부엌 공간은 재구성되었다.

[필자] 김춘수
300)김성희, 「산업화 이전 사회에서의 여성의 경제 활동」, 『한국 가정 관리 학회지』 제16권 2호, 한국 가정 관리 학회, 1998, 39∼64쪽.
301)헐버트, H. B., 신복룡 옮김, 『대한제국 멸망사』, 평민사, 1984, 343∼344쪽 ; 김성희, 앞의 책 재인용.
302)최남선, 『고사통』, 삼중당, 1944, 197쪽 ; 김성희, 앞의 책, 재인용.
303)서정자, 「가사 노동 담론을 통해 본 여성 이미지 ; 191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여성 소설을 중심으로」, 『한국 문학 연구』 19, 동국 대학교 국문학 연구소, 1997, 23∼51쪽.
304)제주도·제주도 여성 특별 위원회, 강지하 구술, 『구술로 만나는 제주 여성의 삶 그리고 역사』, 제주도, 2002, 48쪽.
305)구술 성춘식·편집 신경란, 앞의 책, 41쪽.
306)주영하, 「식구론 현대 한국 사회에서의 음식 관습」, 『정신 문화 연구』 25(1), 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2002, 3∼28쪽
307)『경향신문』 2006년 3월 2일자.
창닫기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