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3장 부국강병의 토대, 조선 전기의 무기와 무예1. 부국강병의 길

군사 훈련으로서의 무예

[필자] 박재광

조선 왕조는 성리학을 근간으로 유교적 문치주의(文治主義)를 국시(國是)로 삼았는데, 이러한 인식은 숭문언무(崇文偃武) 사상으로 굳어졌고, 문치주의가 정착하면 할수록 더욱더 강고해졌다. 숭문언무 사상은 장수의 임명에도 영향을 미쳐 문관이 최고 군사령관이 되고 무관은 부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또한 국방 전략에도 영향을 미쳐 『손자병법(孫子兵法)』의 “싸우지 않고 승리한다(不戰而勝).”와 같이 싸우지 않고 외교로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고 가능한 군사적 충돌을 자제하려는 입장을 견지하였던 것이다. 사실 전쟁 자체를 죄악시하며, 무기를 흉기로 인식하는 성리학적 세계관에서는 무기와 이를 다루는 무예 자체가 크게 발달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에서 무예를 포함한 모든 신체 활동은 가급적 낮게 인식되거나 소홀히 하는 태도를 피할 수 없었다.

기본적으로 무예란 곧 개인의 무사적 자질과 능력을 나타내는 수단인 동시에 곧 군사적 능력 내지 국방력의 근간이 되어 왔기 때문에 조선시대 무예는 곧 무기 내지 병기와 함께 발달하였으며, 조선의 국방 전략 및 전술 과 무관하지 않았다.

<서장대야조도(西將臺夜操圖)>   
1795년 정조가 화성(수원)의 서장대에서 야간 군사 훈련을 지휘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으로, 화성능행도병(華城陵行圖屛) 중의 하나이다. 비록 조선 후기의 그림이나 조선시대 군사 훈련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부국강병을 위하여 강무, 대열, 습진, 시방, 시사 등의 군사 훈련을 꾸준히 실시하였다.

한편 문을 숭상하고 무를 낮게 여겼던 조선 왕조도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대외 방비, 왕실 호위, 도성 방어, 민생 치안 등의 국방 자체를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국방과 치안을 담당할 무관과 장수를 선발하기 위해 무과(武科)를 시행하였고, 도시(都試, 병조·훈련원의 당상관 또는 지방의 관찰사·병마절도사가 무사를 선발하던 시험)·연재(鍊才, 군사에게 각종 무술을 수련시키고 시험하던 일)를 통해서 무사 발굴과 함께 무예 진흥에 힘썼던 것이다. 특히 부국강병을 위하여 국가의 모든 군사들을 모아 강무(講武, 임금이 신하와 백성들을 모아 일정한 곳에서 함께 사냥하며 무예를 닦던 행사), 대열(大閱, 임금이 군대를 정렬해 놓고 친히 검열하는 행사), 습진(習陣, 진법 연습), 습사(習射, 활쏘기 연습), 시방(試放, 총이나 대포 연습), 시사(試射,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시험 보아 뽑던 일) 등의 군사 훈련을 꾸준히 실시하였다. 이런 군사 훈련은 문치주의 사회 속에서 그나마 무예가 발달하는 동기로 작용하였다.

조선시대의 군사 훈련 가운데 가장 큰 규모로 실시된 것은 대열과 강무였다. 대열은 국왕의 친림한 가운데 군사를 모아 행하는 대규모 군사 훈련으로 일종의 열병식이자 군사 퍼레이드였다. 열병식이 끝나면 반드시 군사들의 활쏘기와 창쓰기를 중심으로 한 보병 무예와 기병 무예를 테스트하는 관무재(觀武才)가 뒤따랐다. 관무재 가운데 모구(毛毬), 삼갑사(三甲射), 삼갑창(三甲槍) 등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시행된 무예이다. 모두 말을 타고 달리면서 행하는 무예로서, 기병의 무예 연마를 권장하기 위한 시험이었다.

[필자] 박재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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