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3장 부국강병의 토대, 조선 전기의 무기와 무예3. 위기 속의 무기

나는 새도 쏘아 떨어뜨리는 조총

[필자] 박재광

1592년 4월 14일에 일본군의 부산진성(釜山鎭城) 공격으로 시작된 임진왜란은 조·명·일 삼국이 화약 병기를 주요 전투 무기로 삼아 벌였던 동아시아 최초의 대규모 국제 전쟁이었다. 임진왜란 이전까지만 해도 무기 체계의 발달 측면에서 명나라에 버금간다고 자부하던 조선은 전쟁의 발발과 함께 비로소 무기 후진국임을 깨달았다. 이 사실은 초기 전투에서 연전연패함으로써 여실히 증명되었다.

당시 조선군은 다양한 화약 병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화기인 총통들은 일본의 화기인 조총과 화약 병기라는 점에서는 같았으나 성능 면에서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즉 조선의 화기가 심지에 직접 불을 붙이는 방식인 지화식(指火式) 화기인데 반하여 조총은 격발 장치가 있어 방아쇠를 당기면 용두(龍頭)에 끼워져 있는 화승이 화약에 불을 붙여 줌으로써 탄환이 발사되는 방식인 화승식(火繩式) 소총이기 때문에 성능과 운용에서 많은 장점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임진전란도(壬辰戰亂圖)>   
1834년에 화사(畵師) 이시눌(李時訥)이 임진왜란 당시 부산진과 다대포진의 전쟁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이 그려져 있다. 임진왜란은 동아시아 삼국이 화약 병기를 주요 전투 무기로 삼아 벌인 최초의 대규모 전쟁이었다.

일본이 조총을 입수하게 된 때는 1543년 8월 25일이다. 일본의 조총 전래 사실을 담고 있는 『철포기(鐵炮記)』에 의하면 당시 일본 규슈(九州) 다네가시마(種子島)222)의 영주 다네가시마 토키타카(種子島時堯)는 내항(來航)한 두 명의 포르투갈 상인에게 두 정의 조총을 구입하였으며,223) 이들에게서 화기의 제조 방법, 화약의 배합 방법, 사격술을 전습(傳習)받았다. 다네가시마에서 조총 제조에 성공하자 이것이 일본 각지로 보급되어 제작되기 시작하였는데, 1544년 한 해 동안 600여 정이 일본 전역에 보급되었다. 이와 더불어 조총을 이용한 전술을 개발하고 이를 통하여 병사를 적극적으로 훈련시킴으로써 실제 전투에서의 활용도를 높였다. 이후 실전에서 조총의 효용 가치는 한층 더 빛을 발하여 더욱 활발하게 보급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1575년의 나가시노(長篠) 전투이다. 당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3,000정의 조총 부대를 세 열로 배치한 다음 한 개 조가 사격하는 동안 나머지 두 개 조는 장전하게 하여 각 조가 교대로 사격하게 함으로써 기마대를 주축으로 한 다케다 카츠요리(武田勝賴)의 군대에 대승을 거두었다. 일본말로 ‘무데포(無鐵砲)’는 ‘무턱대고 일을 저지르는 경우’를 일컫는다. ‘데포(鐵砲)’, 즉 “나는 새도 능히 맞힐 수 있다(能中飛鳥).”고 하여 이름 붙인 ‘조총(鳥銃)’도 없이 싸움에 나서는 것은 무모하다는 의미로 쓰였다.

<조선제 조총>   
임진왜란 초기 조선군은 조총의 위력을 절감하였다. 이에 조선은 여러 경로를 통해 조총을 입수하고 이를 모방하여 제조하려는 노력을 기울인 끝에 1593년부터 조총을 제조하여 사용하였다.

조선이 조총의 위력을 실감한 것은 임진왜란을 맞게 되면서였다. 물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589년(선조 22) 7월에 쓰시마 섬 도주(對馬島主) 소오 요시토시(宗義智)가 우리나라에 몇 개의 조총을 진상하였으나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겨 군기시(軍器寺)에 사장시키고 말았다. 그 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선군은 초기에 일본군의 화기와 전술에 잇따라 참패하였다. 당시 일본군은 대체로 기사와 보병으로 편제되어 있었고, 보병은 다시 조총병(鳥銃兵)·창병(槍兵)·궁병(弓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벽제관(碧蹄館) 전투에 참가한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의 부대를 보면 전투 주체인 조총병은 350명, 창병은 640명, 궁병은 91명으로 조총병은 창병의 절반이었다.

<임진정왜도(壬辰征倭圖)>   
임진왜란 당시 순천 왜교성 전투에서 조명 연합군의 공격에 맞서 싸우는 일본군 조총병 모습이다.

아울러 일본군은 다음과 같이 전술을 구사하였다. 즉 적과 대치한 상태에서 먼저 조총병이 사격을 하고 난 후 2선으로 물러나 재장전에 들어가면, 이어서 궁병이 조총병의 장전 시간을 메우기 위해 활을 쏘았고, 그 후 조총병이 계속적으로 사격하여 적의 전열이 흐트러지면 창병이 뒤를 따라 보병의 후방에 위치해 있던 기사와 함께 돌격하여 백병전을 벌임으로써 전투의 승패를 결정지었다. 이러한 전술은 원거리 무기인 총과 접전용 무기인 창을 효과적으로 배합 운용함으로써 전술적 효과를 극대화한 것이다.

이에 반해 조선의 지휘관들은 일본군의 조총과 화기를 통한 전술에 대하여 정확한 인식을 갖고 있지 못하였다. 이 점에 대해서는 유성룡(柳成龍, 1542∼1607)도 『서애선생문집(西厓先生文集)』에서 “신립이 충주에 도착하였을 때 만약 조령을 먼저 점거하고 길을 끼고서 5, 60리 사이에 사수를 많이 세워 두고 별도로 산골짜기에 의병(疑兵)을 세워 적으로 하여금 우리 군사들이 많고 적음을 예측할 수 없게 하고, 적들이 장사진을 펴고 골짜기에 들어 왔을 때 미리 약속하여 앞과 뒤를 끊은 다음 동시에 어지럽게 화살을 발 사하면 적들은 필연 험난한 곳을 빨리 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험한 곳을 버린 채 지키지 않고 넓은 들판에 적을 끌어들여 그 단점으로 겨루어 저들의 장기를 더욱 유리하게 하고 우리의 단점을 더욱 불리하게 해서 패망하기에 이르니, 이는 병법을 모른 탓이다.”고 하여224) 전술 부재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당시 조선군 장수들은 일본군의 전술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에 대응할 만한 전술을 익히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임진왜란 개전 초기에 조선군이 조총을 이용한 일본군의 보병 전술에 맥없이 당한 이유는 물론 일본군이 소지한 조총의 성능이 월등하였던 데도 있지만, 조총을 이용한 전술을 처음으로 경험한 조선군이 이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일본군은 비교적 조총을 많이 소지하지 않고서도 기대 이상의 월등한 공격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진격을 계속하였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군은 가지고 있던 화기조차 제대로 한 번 사용해 보지도 못한 채 무너졌던 것이다.

[필자] 박재광
222)우리에게 다소 생소한 다네가시마는 일본의 우주 발사 기지가 있는 곳이다.
223)난포분시(南浦文之), 『철포기(鐵砲記)』(1606).
224)유성룡, 『서애선생문집(西厓先生文集)』 권14, 잡저(雜著) 전수기의(戰守機宜) 10조 병서(幷序) 갑오년(1594, 선조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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