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1장 천문의 관측과 기상의 측후

4. 기상 현상의 측후

[필자] 구만옥

조선 왕조의 물적 토대는 토지와 노동력이었고, 주산업은 농업이었다. 따라서 농업 인구를 확보하고 농업 생산력을 증대시키는 문제야말로 국가 운영 담당자의 가장 큰 관심사였다. 과학 기술사의 측면에서 본다면 농업 기술의 개량·발전, 농서(農書)의 보급과 아울러 농업에 영향을 주는 기상 여건을 파악하는 문제가 중요하였다. 1416년(태종 16) 서운관에는 다음과 같은 임무가 부과되었다.

서운관에 명하여 1년의 기후를 미리 기록하여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제부터 매년 정월 초하루부터 12월 그믐까지 매일의 기후를 조사하고 살펴서 낱낱이 기록하여 보고하고, 또 책에다 적어 후일의 빙험(憑驗)이 되게 하며, 금년 하지(夏至)부터 시작하여 햇무리(日暈)와 달무리(月暈) 같은 것은 그 빛깔을 상세하게 살피고, 무지개(虹蜺)는 색깔과 나타난 방향을 아울러 살펴서 아뢰게 하였다.34)

1년 동안의 기후 변화를 예측하고 기록하게 하였다는 사실에서 조선 왕조가 기상 관측을 체계화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노력의 연장선상에서 강우량의 측정을 위한 측우기(測雨器), 하천의 수위를 측정하기 위한 수표(水標), 풍향과 풍속 등 바람의 변화를 측정하기 위한 풍기(風旗) 등의 기구가 고안·발명되었다.

이러한 기구는 우리나라의 농업 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한반도는 여름철에 강우량이 집중하는 지역이며, 전반적으로 농업 생산을 유지하기에 강우량이 부족하다고 평가된다. 이는 전근대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우기(雨期)의 편재’와 ‘강우량의 과소’라는 자연적 조건은 농업 생산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기를 예측할 수 있는 방안과 적은 강우량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통계 처리가 필요하였다. 강우량의 지속적인 측정과 기록은 이러한 사회적 요구를 배경으로 이루어졌다.

[필자] 구만옥
34)『태종실록』 권31, 태종 16년 5월 갑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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