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5장 풍수지리와 정치

3. 고려의 정치와 풍수 도참

[필자] 임종태

왕건이 풍수의 도움을 받아 후삼국을 통일하고, 그 뒤로도 풍수를 정치에 적극적으로 이용한 이후 고려의 정치에서 풍수는 계속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958년(광종 9) 쌍기(雙冀)의 건의로 시작한 과거 제도에는 여러 전문 관료를 선발하는 잡과(雜科)에 의학 및 천문학과 함께 지리(地理) 과목이 포함되어 있었다. 정부 내에 풍수지리 전문가들을 체계적으로 교육하여 관료로 선발하는 제도가 마련되었던 것이다.161)

고려 왕조는 11세기 중엽에서 12세기 초에 걸쳐 문화적 전성기를 구가하였는데, 이 시기는 풍수지리가 다시금 정치의 주된 쟁점으로 부각된 때이기도 하였다. 도선의 이름을 빌린 여러 풍수지리서가 유행하였고, 이를 이용하여 참위적(讖緯的) 예언을 설파하는 많은 술사가 등장하였다. 그리고 고려의 문화와 학술의 진흥을 이끈 영명한 군주로 유명한 문종·숙종·예종·인종 등의 임금은 모두 풍수지리와 참위설을 굳게 믿었고, 나아가 이를 왕실의 정치에 깊이 끌어들인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 시기 풍수지리의 쟁점은 고려 초와 마찬가지로 개경을 대신할 대안적 명당에 관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의 논의는 고려 초에 비해 두 가지 차이가 있다. 첫째, 건국 초의 논의가 주로 서경이 지닌 풍수적 이점에 집중 되었다면, 이 시기에는 서경 이외의 새로운 명당 지역이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둘째, 개경 이외의 지역이 명당으로 부각되는 과정에서 “개경의 지덕이 쇠퇴하였다.”는 논리가 전면에 등장하였다. 이미 개국 초부터 명당으로서 개경의 독보적인 지위가 다른 지역에 의해 위협받았음을 지적하였지만, 고려 건국으로부터 상당한 세월이 흐른 이 시기에 이르자 아예 개경이 명당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하였다는 극단적인 주장이 대두하였다.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나라의 기업(基業)을 연장하기 위해서는 개경의 소진한 지덕을 벌충할 어떤 풍수상의 조치가 반드시 필요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태조나 정종이 추구한 것과 같이 아예 수도로서 개경을 포기하자는 급진적인 천도 논의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대개는 새로운 명당을 선택하여 궁궐과 비보 사탑을 짓거나, 더 나아가 개경을 보완하는 도읍지로 건설한 뒤 그곳에 왕이 일정 기간 거주함으로써 개경의 쇠한 지기를 보충하자는 선에서 이루어졌다.

<『대전통편(大典通編)』>   
정조 때 편찬한 법전인 『대전통편』에서 천문 지리를 담당하던 부서인 관상감의 직제를 설명한 부분이다. 전근대 시기 왕실에는 대개 풍수지리를 담당하는 부서를 두고 있었다.
[필자] 임종태
161)고려의 과거 제도에 풍수지리가 포함된 사실과 실제 시험 방식에 대해서는 『고려사』 권73, 선거(選擧)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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