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천민 예인의 삶과 예술의 궤적을 내면서

근대 이전 시기는 인간 개개인마다 신분에 따라 차별이 존재하는 사회였다. 우리의 경우에도 어떤 때는 귀족(貴族)과 천민(賤民)으로, 또 어떤 때는 양반(兩班)과 천민으로 ‘최상’과 ‘최하’의 신분 계층이 나뉘어 있었다. 그러다가 비록 법제적 조치에 불과하였지만, 우리나라에서 신분제가 철폐되는 계기는 19세기 말 ‘갑오개혁(甲午改革)’의 단행이었다. 따라서 우리 역사 속에서 천민은 적어도 2000여 년 이상 존재해 왔으며, 나름대로 삶의 궤적(軌迹)을 이어 나갔던 것이다.

천민의 범주는 시대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정형(定形)을 말하기 어렵다. 다만, 고려와 조선시대에 국한하자면 대체로 노비(奴婢) 외에 화척(禾尺)·백정(白丁)·무당(巫堂)·기생(妓生)·광대(廣大)·재인(才人)·악공(樂工)·사당(社堂) 등이 이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이들 천민 유형은 현재 대부분 자취가 사라졌지만, 일부가 지금도 꾸준히 명맥을 이어 나가고 있다.

예인(藝人)은 노래, 춤, 연기, 악기 연주 등과 같은 여러 가지 기예(技藝)를 익혀 남에게 보이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을 말한다. 오늘날 흔히 ‘연예인(演藝人)’이라고 부르는 사람과 큰 차이가 없다. 그러고 보면, 예인의 역사 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고 앞으로도 무궁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관심을 갖고 주목해야 할 대상은 바로 ‘신분은 천민이나 예인으로 살아 간 계층들’이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인간에게 있어 기예는 필수 조건이다. 왜냐하면 기예는 생활의 활력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귀족이건 양반이건 간에 최소한 한 가지 정도의 기예를 익히거나 장기로 삼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 지배 신분층은 기예를 업(業)으로 할 수 없었다. 이른바 “양반의 자제는 단지 독서만 허락할 뿐, 기예를 익혀서는 안 된다.”는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탓이다. 결국 기예를 전문으로 익혀 생활의 방편으로 삼았던 부류는 따로 있었다. 지금과 달리 전근대 사회의 예인은 대부분 천민이었다. 양반들은 기예를 필요로 하고 좋아하면서도 전문 기능을 갖춘 예인을 천대하는 ‘자기모순’적 관념을 지니고 있었다.

이 책에서는 ‘천민 예인’을 주제로 다루기로 하고 기생, 무당, 광대, 유랑 예인 등을 대상으로 삼았다. 이처럼 대상을 네 유형으로 국한한 까닭은 이들이 우리가 주목하고자 한 천민 예인 집단을 가장 잘 대표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은 근대 시기에 이르기까지 존재가 남아 있거나, 일부는 현재에도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어 다른 천민 예인에 비하여 생명력이 긴 때문이기도 하다.

제1장에서는 기생(妓生)의 삶과 생활 모습을 다루었다. 기생은 고려 및 조선시대 관청에 소속되어 가무(歌舞)와 악기 연주로 연희의 흥을 돋우거나, 상대 남성을 접대하던 사치 노비(奢侈奴婢)였다. 이들은 특정 역할과 기능에 따라 다양하게 표현되었는데, 노래를 잘하는 기생은 가기(歌妓), 춤을 잘 추는 기생은 무기(舞妓), 가야금을 잘 타는 기생은 금기(琴妓), 시를 잘 짓는 기생은 시기(詩妓)라 하였다. 또한 말을 아는 꽃이라는 의미로 ‘해어화(解語花)’, 누구나 취할 수 있는 처지라는 의미로 ‘노류장화(路柳墻花)’라고 표현되기도 하였다.

기생의 기원은 고려 태조 때, 백제 유민 계통의 양수척(楊水尺)을 관청에 소속시켜 노비로 삼고, 그 중 색예(色藝)가 있는 비(婢)를 기생으로 삼아 가무를 연습하게 한 것이다. 이후 설치 연대는 명확치 않으나 기생을 교육하는 시설인 교방(敎坊)을 두기도 하였고, 12세기 전반 인종대에는 관에 소속된 기생이 700여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는 고려 때의 기생 제도를 거의 답습하는 한편 제도를 확립시켰다. 물론 기생 제도의 존립과 폐지를 두고 상당한 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유교적인 명분론을 앞세워 폐지를 주장하는 논리와,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해서 존치해야 한다는 논리가 팽팽하게 맞섰던 것이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명분은 현실에 녹아들기 마련이다.

조선시대의 기생 역시 관청에 소속된 관기(官妓)였기에 처지 자체는 관비와 크게 다를 게 없었다. 다만 자신의 속한 지역이 어디냐에 따라 역할과 생활 방식에 약간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서울 지역의 경기(京妓)는 대개 장악원(掌樂院)에 소속되어 악기와 가무를 교습하였고, 때때로 궁중의 연회에 동원되었으며, 지방 관청에 소속된 향기(鄕妓)는 지방 순시를 나온 중앙 관료나 지방 관료의 수청기(守廳妓)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들은 서울 기생만으로 충족되지 못하는 대규모 연회가 열릴 때는 서울로 차출되기도 하였다.

한편, 평안도와 함경도는 다른 지역과는 달리 국경을 맞대고 있어 고향을 떠나 장기간 수자리 서는 군사들이 모여 있는 특수성이 있었다. 이에 북쪽 변방에 소속된 기생들의 주 임무는 군사들을 위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반 군졸들까지 모두 상대한 것은 아니고, 군관층이 주된 대상이었다. 특히 평안도 지역은 중국으로 통하는 길목이었기에 이 지역에 속한 기생들은 중국의 사신 및 중국으로 가는 조선의 사신들을 위한 연회에서 가무를 담당하였을 뿐 아니라, 수청기로서의 역할도 수행해야 하였다.

기생은 비록 신분상 천민이지만 그들이 상대하는 부류가 주로 양반이나 중국 사신 등과 같은 상층 신분이었기에 특별 관리와 교습을 받았다. 서울 장악원에서는 악적(樂籍)을, 지방에서는 기적(妓籍)을 두어 소속 기생들을 관리하였다. 기생들은 글은 물론 가곡(歌曲), 춤, 악기 연주법 등을 익혔는데, 악기는 당비파(唐琵琶)가 기본이었다. 그 밖에도 재능이 뛰어나면 현금(玄琴), 가야금(伽倻琴), 장고(杖鼓), 아쟁(牙箏), 대금(大琴) 등 다양한 악기를 익히기도 하였다. 한편, 주요 지방에는 교방을 설치하여 기생을 교습시켰다. 기생 수가 많은 고을에는 기생을 위한 공간인 기생청(妓生廳) 또는 기생방(妓生房)이라는 별도의 거주 공간이 마련되어 있기도 하였다.

기생의 생활 처지는 어찌 보면 열악하였지만, 어찌 보면 천민으로서는 과분한 대우를 받기도 하였다. 장악원에 소속된 기생들과 선상기(選上妓) 기생들은 약간의 쌀을 지급받았으며, 지방 관청에 소속된 기생들도 입역(立役)하는 관비와 비슷한 처우를 받았다. 그리고 일정한 급료 외에 명절 때에는 따로 곡식, 생선, 땔감, 옷감 등을 특별히 지급받기도 하였다. 또한 고정적으로 보장된 것은 아니었지만 연회에 참석한 후 사례로 지급받는 연폐(宴幣)도 생계에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공적 수입만으로는 생계를 보장받지 못하였기에 기생은 사적인 수입원을 확보하려고 노력하였다. 복무 기간이나 정해진 시간 외에는 사적인 영업에 종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적인 영업은 대부분 양반 등 지배층의 잔치에 불려 나가 여흥을 돋우는 것이었다.

기생의 신역(身役)은 대물림되었으며, 50세가 되어야 역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 기생의 역을 면제받았다고 해서 천민 신분에서 해방되는 것은 아니었다. 기생의 자식은 원칙적으로 천민 신분을 면할 수 없었다. 기생의 딸은 기생, 아들은 악공(樂工) 또는 무동(舞童)이 되어 업을 세습하였다. 기생이 천역을 대물림하지 않을 방법은 양반의 기첩(妓妾)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조선시대의 기생은 1908년 관기 제도가 공식적으로 폐지되면서 자신들이 지닌 ‘예인’과 ‘성적 접대’라는 기능·역할에 따라 크게 두 유형으로 분 리되어 변모하여 갔다. 즉 악기 연주와 노래와 춤의 공연에 전적으로 종사하는 예술인 모습과 접대·매춘에 종사하는 모습으로의 변화였다.

제2장에서는 조선시대 무당(巫堂)의 생활 모습에 주목하였다. 원래 무당은 제례 의식을 주관함으로써 신(神)의 의사를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의례 전문가(사제자, priest)였으며,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치병 전문가(의사, medicine man), 그리고 신으로부터 받은 직감과 예지로 인간의 길흉을 판단하고 일깨워주는 점복 전문가(예언자, prophet)였다.

또한 무당은 연희자(演戲者)로서의 직능도 지니고 있었다. ‘巫(무)’라는 글자가 천상(天上) 세계와 지상(地上) 세계를 잇는 ‘工(공)’ 자의 양옆에서 두 사람(人人)이 춤을 추는 형상을 취해 만든 글자라는 점은 바로 무당이 연희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임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점차 전문 직능인이 생겨나면서 무당이 지닌 복합적인 직능·권위는 축소되거나 소멸되어 결국 신분 질서의 밑바닥인 천민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무당의 그 오랜 역사에서 가장 큰 몰락을 겪게 되는 시기는 성리학적 통치 질서를 최고의 가치로 삼았던 조선시대였다. 성리학으로 이념적 무장을 한 조선시대의 위정자와 지식인들은 무당을 백성을 현혹시켜 재물을 사취할 뿐 아니라 나라의 기강을 어지럽히는 간악하고 요망·음탕한 존재이기에 반드시 억압하여 없애야 한다고 여겼다.

조선시대에 국가가 무당들을 억압한 방식은 매우 자의적이고 다양하였을 것이지만, 크게 ‘도성(都城)에서의 추방’과 ‘무세(巫稅) 징수’라는 두 가지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무당을 억압하여 근절시키기 위해 마련한 무세 제도는 본래 의도와는 달리 무당을 공인(公認)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무당에게 거둔 세금이 중앙 및 지방 관아의 재정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무당은 ‘무격(巫覡)’이라고도 쓰는데, 여기서 ‘무’는 여자 무당, ‘격’은 남자 무당을 지칭한다. 조선시대 무당에 대한 호칭은 여자 무당의 경우 ‘여무 (女巫)’ 또는 ‘무녀(巫女)’ 외에 별다른 용례가 보이지 않으나, 남자 무당의 경우는 ‘남무(男巫)’ 외에도 ‘무사(巫師)’·‘양중(兩中)’·‘낭중(郎中)’·‘무부(巫夫)’·‘화랑(花郞)’·‘취타수(吹打手)’·‘광대(廣大)’·‘무포군(巫布軍)’·‘무공(巫工)’·‘업중(業中)’ 등과 같이 매우 다양하게 나타났다.

조선시대 무당의 생활 모습을 경상도 단성현(丹城縣)이라는 산간 고을의 17∼19세기 호적(戶籍) 자료를 통하여 살펴보았다. 이에서 확인된 경향은 첫째 무업 세습이 강고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둘째 무당 집안 간의 강고한 통혼 양상을 보였고, 셋째 후손 가운데 일수(日守)나 사령(使令) 등의 하급 관속으로 종사하는 경우도 나타났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호적 자료에서 세습무(世襲巫)들이 지닌 일정 지역에 대한 무업권(巫業權), 이른바 ‘단골판’을 형성하거나 확산시켜 나가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무당은 사회적으로 가장 천대받는 계층의 하나였기에 사회적인 생활 형편은 거의 최저 수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 형편은 사회적 형편과 반드시 부합되는 것만은 아니었다. 무당은 굿이나 점복(占卜) 등의 무업을 행한 대가로 금품을 받을 수 있었으며, 특히 ‘단골판’을 지닌 경우는 이를 다른 무당에게 전매(轉賣)할 수도 있었다. 조선 정부가 무당에게 무세를 징수한 데에는 그리해도 될 만한 실정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무당마다 재능이 달랐기에 수입에서도 자연 많은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특히 궁중에 출입하거나 양반 부잣집과 ‘단골’ 관계를 맺은 무당은 적지 않은 재산을 축적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관아에서 무세를 거둘 때 무당에게 상·중·하 또는 원(元)·반(半), 원(元)·가(假) 등과 같은 차등을 두어 징수액을 달리하기도 하였다.

한편, 무당은 지역별로 재능에 큰 차이를 보였다. 남부 지역의 무당은 예능적(藝能的) 특색을 지녔던 반면, 북부 지역의 무당은 주술적(呪術的) 특색을 지녔던 것이다. 그래서 ‘춤추는 무당’과 ‘춤추지 않는 무당’으로 유형을 나누기도 하였다. 오늘날은 춤추지 않는 무당이 대세인 사회로 변모하고 있다. 더군다나 통신 기술의 혁명에 부응하여 전화나 인터넷으로 점을 쳐주는 무당이 늘어나는 추세이다. 시대에 걸 맞는 무업의 탄생이라 하겠다.

제3장에서는 광대 집단의 역사와 연희 활동에 대해 살펴보았다. 광대 집단이 형성되는 계기는 신라 진흥왕 이후의 팔관회(八關會)와 고려의 팔관회·연등회(燃登會) 같은 대규모 국가 행사들이 정기적·지속적으로 행해지면서 이러한 행사를 공식적으로 담당하는 하나의 신분 집단이 요구되었던 때문이다.

광대 집단은 크게 경기 이남의 ‘화랑이 집단’과 경기 이북의 ‘재인촌 사람들’로 구분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들 화랑이 집단과 재인촌 사람들은 광대이기 이전에 기본적으로 악기 연주를 익힌 악공들이었다. 악공이 광대의 역을 겸하도록 한 중국의 제도를 그대로 따랐던 것이다. 화랑이 집단은 신라 화랑 계통에서 내려온 사람들로 우리 민족의 고유 신앙인 무속 영역에서 활동하다가, 고려 말에 무당 집안의 남자들을 호적에 악공으로 올리게 되면서 광대 집단으로 분명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고 재인촌 사람들은 고려 중기에 기생의 아들들이 악공이 되고 이 악공이 광대의 역도 겸하는 과정에서 광대 집단으로 확실하게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따라서 경기 이북의 재인촌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무속과는 관계가 없었다고 하겠다.

이들 광대들은 궁궐이나 중앙 및 지방 관아에서 행하는 산대희(山臺戲)와 나례희(儺禮戲), 은영연(恩榮宴)·유가(遊街)·영친의(榮親儀) 등의 과거 급제 행사, 세시 놀이·고을굿·마을굿 등의 민간 축제, 환갑잔치와 같은 일반 연회 등등에 동원되어 예인으로서의 재능을 한껏 발휘하였다. 광대들이 발휘한 예능은 각종 악기 연주, 판소리·타령·재담소리 등의 소리, 화극(話劇)·가면극·인형극 등의 전통극, 줄타기·땅재주·솟대타기 등의 기예, 전문적 농악 등이었다.

한편, 이러한 광대 집단을 하나의 신분 집단으로 유지시킨 가장 중요한 문화적 기반이었던 중앙의 산대희가 조선 말기까지 공식적으로 유지됨으로써, 광대 집단도 명맥이 유지되었다. 그러다 갑오개혁으로 신분 제도가 철폐되면서 비로소 이들은 ‘창우(倡優)’, 곧 ‘광대’ 신분에서 공식적으로 해방되었다.

이후 경기 이남의 광대 집단인 화랑이 집단은 판소리 공연자로 진출하였다. 당시에는 판소리 공연의 흥행력이 높아 생계를 이어 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악기 연주에서도 전래의 기능 음악인 삼현육각(三絃六角)을 넘어 예술 음악인 산조(散調)를 만들어 내면서 창극(唱劇)을 중심으로 독립된 공연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였다. 이에 반해 경기 이북의 재인촌 사람들은 배뱅이굿, 병신 타령 등 재담소리 수준에 머물러 흥행 면에서 일정한 한계를 지녔다. 악기 연주에서도 삼현육각 정도의 수준에 머물렀다. 결국 근대 이후에 자신들만의 공연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들이 근대에 들어 급속히 사라진 데에는 이런 까닭이 있었다.

오늘날에도 광대 집단의 후손 가운데 상당수는 이전 광대 집단의 예능이던 각종 악기 연주, 민요, 판소리, 줄타기, 땅재주, 전문적 농악 등을 계승하고 있다. 전통 사회 광대 집단의 문화사적 의의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끝으로 제4장에서는 유랑 예인 집단의 삶과 변화를 다루었다. 유랑 예인은 떠돌아다니면서 연희를 팔던 천한 존재였다. 떠돌이 예인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전부터 시작되었으나, 조직적 결집력과 전문성을 아우르면서 서민대중을 직접 상대하던 유랑 예인 집단이 질적·양적으로 팽창한 시기는 조선 후기였다.

유랑 예인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집단은 사당패(社堂牌)였다. 그런데 사당패의 원형은 거사배(居士輩)였다. 거사가 출현한 데에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숭유척불(崇儒斥佛)’ 정책이 강하게 추진된 시대적 배경이 있었다. 즉, 수많은 사찰이 폐사(廢寺)되면서 절을 떠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절 로 되돌아갈 수도 없던 많은 ‘잉여 인력’이 존재하였고, 그 ‘잉여 인력’이 민중 속에서 거사(居士)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조선 전기 절에서 갑자기 쏟아져 나와 유랑 예인 집단으로 변모한 거사는 우리 사회에만 존재하던 ‘비승비속(非僧非俗)’의 특수한 집단이었다. 이들은 사람들을 모아 놓고 징과 북을 치며 가무를 함으로써 재물을 얻어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런데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거사의 양상은 크게 변하였다. 이전 시기와는 달리 이들 집단의 수가 급격히 늘어났고 본격적으로 유랑을 하고 있어, 흉적(凶賊)의 무리로 취급되기도 하였다. 거사의 무리가 대폭 불어난 까닭은 기존의 거사패에 유리걸식(流離乞食)하는 유민들의 일부가 합세하였기 때문이다.

거사는 관아의 통치력이 적게 미치는 곳이나 산사(山寺)의 아래, 상업이 발달한 곳, 천민들이 많은 곳에 모여 살았다. 그러나 실상은 끊임없이 유랑하고 있었다. 유랑 생활 덕분에 거사들은 폭넓은 정보망을 지니고 있었으며, 세상 물정에도 밝았다. 그리고 대를 이어 거사로 살아 나갔고 집단적으로 움직였다. 거사는 스승 밑에서 일정한 배움의 과정을 거쳤다. 주로 사주(四柱), 관상(觀相), 손금, 척점(擲占) 등 점술에 관한 학습이었다.

한편 조선 후기에 들어와 이들 무리의 성격이 유랑 예인 집단으로 굳어지면서 명칭도 거사배에서 사당패로 바뀌었다. 불교적 요소가 강하던 명칭에서 떠돌이 예인 집단의 요소가 강한 명칭으로 변한 것이다. 또한 남녀가 어울려 다닌 본래의 사당패 외에 남자들로만 이루어진 남사당패가 등장하게 된 것도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였다.

사당패의 연희에는 삼국시대부터 내려오던 방울던지기 따위의 요술에서부터 고려시대의 꼭두각시극까지 전승되는 모든 기예가 종합되었다. 풍물, 법고춤, 탈춤, 줄타기, 솟대타기, 땅재주, 무동(舞童), 요술, 죽방울치기, 비나리, 삼현육각, 판소리, 민요, 창, 접시돌리기 따위를 망라하였다. 물론 집단마다 특성에 따라 주력으로 삼는 연희 종목에 차이가 있었다.

사당패나 남사당패는 우리나라 성의 역사에서도 빠뜨릴 수 없는 존재였다. 이들은 연희를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기본이었지만, 가진 것이 몸뚱어리밖에 없는 천민 신분이었기에 육체까지도 판매 대상으로 삼았다. 특히 남자들로만 이루어진 남사당패의 성행위를 계간(鷄姦)이라 불렀는데, 이른바 ‘호모 섹슈얼’이었다.

이 책에서 대상으로 삼은 기생, 무당, 광대, 유랑 예인 계층은 각각 독특한 전문 직능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동질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 동질성의 중심에는 무당(무격)이 자리 잡고 있었다. 즉, 무녀의 일부는 무업을 떠나 기생 또는 사당으로 전업하기도 하였고, 일부 남무(男巫)의 경우도 사당의 남편(거사)으로 생활하거나 광대가 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간혹 이들의 연희가 서로간의 공연(共演)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았던 점은 바로 그들의 생애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근대 이전의 천민 예인은 ‘역사는 있으나, 기록은 없는’, 즉 ‘유사무서(有史無書)’의 삶을 살다 간 사람들이다. 이들이 살았던 시대는 천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지 않으려는 사회였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기록이 풍만하게 남은 지배 계층에 대한 관심과 연구도 소홀하면 안 되겠지만, 기록을 남기지 못한 천민 계층의 매몰된 역사를 발굴·탐구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다. 이 책을 발간하면서 숨겨진 또 다른 천민 예인은 어디 없나 찾아보게 된다. 추후 이번에 다루지 못한 이들을 발견한다면 한편으로 반갑고, 또 한편으로 미안할 것이다.

2007년 10월

인하대학교 강사

[필자] 임학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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