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1장 기생의 삶과 생활5. 처지와 생활상

만남과 이별 그리고 기다림

양반층을 주로 상대하는 기생들은 수준 있는 응대를 위해서 어느 정도 글을 익혀야 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시조나 한시 등을 주고받는 것이 일상적인 사교의 방편이었다. 만나면 헤어지고 헤어지면 또 만나는 숱한 남성들과의 관계 속에서 기생들도 인간인지라 정들고 사랑하는 감정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러한 감정과 애환을 시조나 한시에 담아 남기기도 하였다. 그러한 문학 작품에서 기생들의 처지나 생각의 단편을 엿볼 수도 있고, 그 중에는 문학성이 뛰어난 작품도 있다.

기생은 마음에 드는 사람과 만남에 앞서 시조를 주고받으면서 서로 뜻을 확인하기도 하였는데, 이런 수작(酬酌)의 과정을 거치면서 더욱 친밀한 정을 더하였다.

함경도 경성의 기생 금춘(今春)은 멀리 경상도 울산에서 부방(赴防)하기 위해 올라온 군관 박계숙(朴繼叔)을 만나 며칠 동안 함께 지냈다. 금춘은 자신을 비루하게 보지 않고 인간적으로 따뜻하게 대해 주는 데에 끌려 마침내 다음과 같은 시조 두 수를 주고받으며 서로 감정을 확인하였다. 박계숙이 먼저 자신의 애절한 마음을 담아 시조를 읊었고, 이에 대해 금춘이 처음에는 튕기는 척하다가 마침내 허락한다는 뜻으로 화답하는 식이었다.98)

비록 장부(丈夫)일지라도 간장(肝腸) 철석(鐵石)이랴

당전(堂前) 홍분(紅粉)을 고계(古戒)로 삼았더니

치성(治城)의 호치단순(皓齒丹脣)을 못 잊을까 하노라

당우(唐虞)도 친히 본 듯 한당송(漢唐宋)도 지내신 듯

통고금(通古今) 달사리(達事理) 명철인(明哲人)을 어디 두고

동서(東西)도 미분(未分)한 정부(征夫)를 걸어 무엇하리

나도 이러하나 낙양성동(洛陽城東) 호접(蝴蝶)이로라

광풍(狂風)에 지불려 여기저기 다니더니

새외(塞外)에 명화일지(名花一枝)에 앉아 보려 하노라

아녀(兒女) 희중사(戲中辭)를 대장부(大丈夫) 신청(信聽)마오

문무(文武) 일체(一體)를 나도 잠깐 아노이다

하물며 규규무부(赳赳武夫)를 아니 걸고 어쩌리

금춘이 부른 이 시조는 자신의 독창적 작품은 아니었다. 이미 비슷한 내용의 가사를 성종 때에 영흥 기생 소춘풍(笑春風)이 부른 바 있었다. 소춘풍 또한 창작물이 아니라 이전부터 전해지던 가사를 분위기에 맞게 약간 고쳐 부른 것으로 짐작된다.99) 따라서 이 비슷한 가사는 당시 기생들 사이에 널리 회자하던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어쨌든 두 사람은 비록 뛰어나거나 독창적인 작품은 아니었지만 서로 정을 확인하는 매개로 시조를 활용하였던 것이다.

기생이 먼저 선창한 경우도 있었다. 평안도 강계의 기생 진옥(眞玉)은 유배 온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을 만나자 이름에 빗댄 다음과 같은 노골적이고 농밀한 시조를 주고받으면서 친밀함을 더하였다.

철(鐵)을 철(鐵)이라커든 무쇠 석철(錫鐵)만 여겼더니

다시 보니 정철일시 적실(的實)하다

마침내 골풀무 있더니 녹여볼까 하노라

옥(玉)을 옥(玉)이라커든 형산백옥(荊山白玉)만 여겼더니

다시 보니 자옥(紫玉)일시 적실하다

내게 살송곳 있더니 뚫어볼까 하노라100)

홍원의 기생 홍낭(洪娘)은 북평사로 온 최경창(崔慶昌, 1539∼1583)을 만나 함께 지내다가 그가 서울로 떠날 즈음에 다음과 같은 이별의 시조를 보내었다.101)

묏버들 갈해 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대

자시는 창 밧긔 심거 두고 보쇼셔

밤비예 새닙 나거든 날인가도 너기쇼셔

송도의 명기 황진이(黃眞伊)는 사랑의 감정과 아울러 사랑하는 임을 기다리는 안타까움을 다음과 같은 시조로 전하였다.

내 언제 신(信)이 없어 님을 언제 속였관대

월침삼경(月沈三更)에 올 뜻이 전혀 없네

추풍(秋風)에 지는 닢소리야 낸들 어이하리오

부안의 명기 매창(梅窓)은 당대의 시인이자 풍류객인 유희경(劉希慶, 1545∼1636)을 사랑하였다. 유희경이 서울로 올라간 뒤에 소식이 없자, 그리움과 회한의 정을 다음과 같은 유명한 시조로 담아내었다.102)

이화우(梨花雨)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이러한 작품 속에는 애절한 사랑과 그리움이 절절이 배어 있다. 기생이 가진 원초적인 슬픔의 첫째가 바로 만남과 헤어짐의 덧없음이었던 것이다.103)

[필자] 우인수
98)우인수, 앞의 글, 2003, 108∼110쪽.
99)차천로(車天輅),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
100)조광국, 『기녀담 기녀 등장 소설 연구』, 월인, 2002, 79쪽.
101)조광국, 앞의 책, 87쪽.
102)조광국, 앞의 책, 88쪽.
103)매창은 또한 다음과 같은 애틋한 시도 남긴 바 있다. “깊은 봄이 좋아라 새들은 노래하나, 이 심사 둘 데 없어 상사곡(相思曲)을 뜯노라. 눈물을 머금고 사창을 열어보니, 동풍에 꽃은 지고 제비는 비껴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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