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의 산대희
지방의 산대희로는 우선 고려시대 서경(평양)에서 베풀어진 팔관회를 들 수 있다. 고려시대에 서경에서는 10월 보름에, 개경에서는 11월 보름에 연례적으로 팔관회가 열렸는데, 이러한 팔관회에는 으레 산대희가 이루어졌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임금이 궐 밖으로 거둥할 때면 으레 산대희가 베풀어졌다. 그리하여 임금이 어떤 지방으로 거둥하면 그 지방 단위의 산대희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였다. “청주에 이르니 목사 진여의와 판관 민도생 등이 나례를 갖추어 북교(北郊)에서 맞이하고, 부로(父老)들은 노래를 불러올리면서 어가 앞에 절하였다.”242)는 『태조실록』의 기록은 이를 잘 보여준다.
조선시대 지방의 산대희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각 지방에 새 감사가 부임할 때에 베풀어진 산대희라 할 수 있다.
판서 권진과 신상 등이 “이번에 각도에서 새 감사를 맞이할 때에 높은 무대를 만들어 놓고 나례희를 하거나, 채색 비단을 두르고 군사를 늘어 세우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신 등의 생각에는 그전에는 지시문이 없이 갈 때에도 예식을 갖추어 맞이하였는데, 더구나 지금 지시를 받들고 가는 마당에서 예식을 갖추지 않을 수 없다고 봅니다. 만약 폐가 있다고 하면 산붕과 나례는 없애고, 결채와 군위만으로써 맞이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건의하여 그 말대로 따르니, 지신사 안숭선 등이 건의하기를 “이 행사는 고을마다 행하는 것이 아니고 경상도 같은 경우에는 상주·진주·경주·성주 등 큰 고을에서만 합니다. 큰 나라 사신이 올 때에도 이상의 행사를 벌이는 것은 황제의 지시를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작은 폐단 때 문에 옛 행사를 폐지하는 것은 옳지 않은 만큼 모두 그전대로 하기 바랍니다.” 하였다. 임금이 “경 등의 말이 옳다. 그러나 감사(監司)가 갈리는 것은 연례행사인데, 별례(別禮)로 왕지를 받드는 사신 외에 새 감사에게는 산붕·나례·결채·군위 등의 의식을 없애면 어떨까?” 하니, 좌대언 김종서가 “예전대로 금하지 말고, 만약 농사 때에나 혹 흉년이 들 적에 감사가 그때그때 없애도록 하면 어찌 융통성 없는 폐단이 있겠습니까? 예전대로 두어 왕명을 존중하게 하시기를 청하옵니다.” 하므로 그대로 따랐다.243)
앞의 기사에 따르면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중국 황제를 높여서 중앙에서 산대희를 하고, 중앙에서 왕의 명령을 받은 새 감사가 부임하면 중앙 정부를 높여서 지방에서 산대희를 하여야 했다. 그런데 왕이 감사의 부임은 연례행사라고 말하고 있듯이 조선시대의 감사, 곧 관찰사의 임기는 1년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다만, 후대에 들어 평안도와 함경도는 2년으로 연장되기도 하였다. 감사, 곧 관찰사의 임무는 어떤 지역을 다스리기보다 관할 지역 수령들이 목민관(牧民官)으로서의 임무를 잘하고 있는지를 순력(巡歷)을 다니며 평가하여 보고하는 것이 주임무이기에 그런 일에 있을 수 있는 부정부패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경상도로 치면 상주·진주·경주·성주 등과 같은 큰 고을에서는 매년 새 감사 맞이 산대희를 해야만 하였다. 경상도뿐만 아니라 전국에 걸쳐 큰 고을에서는 모두 매년 산대희를 열어야만 했던 것이다.
조선시대 지방 산대희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감사가 새로 부임할 때 이루어진 산대희였다. 조선시대에는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중앙에서 산대희를 하고 중앙에서 감사가 내려오면 지방에서 산대희를 하는, 중앙과 지방에 걸쳐 조직화된 산대희 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은 조선시대 지방 산대희의 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다.
전주로 들어가는데 판관이 기악(伎樂)과 잡희로 반 마장이나 나와 환영하였다. 고취(鼓吹)가 하늘 가득 울려 퍼지고 온갖 춤이 길에 가득하였다. 천오(天吳, 바다신)와 상학(翔鶴)의 춤이 베풀어지고, 쌍간(雙竿)과 희환(戲丸)의 놀이들이 있었으며, 대면(大面)과 귀검(鬼臉)의 춤도 있었다. 몰려 보는 사람들이 도성(都城)을 넘쳤다.244)
1601년(선조 34) 허균(許筠, 1569∼1618)의 맏형 허성(許筬)이 전라도 관찰사가 되어 전주 감영에 부임한 며칠 뒤, 당시 조창(漕倉)에 대한 감독 임무를 맡고 있던 허균이 형수와 조카들을 데리고 전주로 들어갈 때의 모습이다. 관찰사였던 허성이 부임할 때 이미 베풀었던 것을 다시 보여 주어서 그런지 산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기록만으로도 지방 산대희에서도 쌍간(雙竿, 쌍줄타기), 희환(戲丸, 구슬 던져 받기), 각종 가면 춤 등 중앙의 산대희에 못지않은 광대들의 여러 예능이 행해진 것을 알 수 있다.
임금의 지방 거둥이나 중앙 정부에서 내려오는 감사 부임 외에도 안태 (安胎)나 실록 봉안 등을 할 때에도 지방 산대희류의 행사가 베풀어졌다. “태실(胎室)을 진주로 옮겨갈 때에 태실이 있는 곳에는 채붕을 만들고 나희를 벌일 것이며, 지나가는 고을에서는 관문(舘門)에 결채하고 의장대와 악대들을 데리고 교외까지 나가 맞이하는 것에만 그치도록 하여 각도의 감사와 고을 원은 자기 관할 구역을 넘어가지 못하게 한다.”245)는 『세종실록』의 내용에서 태실을 조성할 때에 산대희가 으레 베풀어졌던 모습을 볼 수 있다. 중앙의 산대희에 비견되는 지방의 산대희는 주로 중앙 정부와 관계될 때 제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중앙의 산대희에 비견되게 산대도 갖추고 대규모 광대 놀음을 벌였던 지방의 산대희는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 점차 산대를 시설하지 않는 등 규모가 축소된 듯하다. 중앙에서도 중국 사신이 오는 외에는 국내용 산대희가 더는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방의 산대희류 행사는 중앙 정부와 관계되는 일이기에 조선 후기에도 어떤 식으로든 행해졌을 것이다. 지방 산대희는 근본적으로 중앙 정부를 높이고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에 그려진 평양감사환영연도(平壤監司歡迎宴圖)가 국립 중앙 박물관, 서울 대학교 박물관, 미국 피바디 에섹스 박물관, 『조선의 민화(李朝の民畵)』(1982) 등에 현재 네 종류 남아 있다. 평양 감사를 환영하는 연회는 새 감사가 부임할 때에 베푼 지방 산대희류의 행사라 할 수 있다. 다른 지역 감사의 환영연도는 남아 있지 않고 평양감사환영연도만 여러 종류 남아 있는 것은 평양 지역에서는 조선 후기까지도 신임 감사가 부임할 때 산대희류의 행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평양은 고려시대의 서경으로 팔관회가 열렸던 곳이고, 조선시대에도 중국에서 사신이 올 때면 제일 먼저 산대희를 한 곳이었다. 그리하여 일찍부터 산대희 문화가 발달한 지역이었다. 1년 단임이던 관찰사의 임기가 후대에는 평안도와 함경도는 2년으로 정착되었기에 조선 후기에 들어서도 평양에서는 2년마다 한 번씩 오는 감사를 맞아 전래의 산대희류의 행사를 여전히 치를 만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 후기에도 지방 산대희류의 행사는 여전히 이어졌다고 보아야 한다.